7화. 거마신룡 (7)
『잠깐.』
그때였다.
여태 잊고 있었던 마성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직 정산이 전부 끝난 건 아닐 텐데?』
연우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비그리드가 자취를 감추더니, 어느새 저 멀리 이목구비가 없는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있었다. 마성이 본체로 현신한 것이다. 특히 녀석의 손에는 분명히 방금 전까지 쇠사슬로 묶어 두었던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응집체가 들려 있었으니!
그 순간, 전사장의 영혼과 칼라투스가 빠르게 움직였다.
칼라투스는 아가리를 뒤로 젖혔다가 그대로 크게 한껏 벌렸다.
콰르릉!
기어 다니는 혼돈의 화신체들을 처리할 때에는 최대한 범위를 넓혀야 했기에 상대적으로 위력이 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표면적이 확 줄어들면서 그 만큼 위력이 몇 배로 증가될 수 밖에 없는바.
하지만 마성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너무나 재미나다는 듯 하얀 이빨이 훤히 드러나도록 웃어 대면서 제자리에서 풀쩍 뛰어올랐다.
브레스가 아슬아슬하게 녀석이 있던 자리를 스치고.
그 순간, 전사장의 영혼이 마성의 뒤편에서 나타난다 싶더니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핼버드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화신체의 머리통을 날렸던 그 무기였다.
마성은 허공에서 크게 몸을 젖히며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헬버드가 튕겨 나는 것과 동시에, 녀석의 손이 실타래처럼 수십 갈래로 풀리더니 그대로 전사장의 영혼을 관통했다.
「컥!」
쾅!
전사장의 영혼은 채찍처럼 날아오는 줄기들을 모두 쳐 내고자 했지만, 베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서너 가닥뿐. 다른 것들은 그대로 어깨와 팔뚝, 가슴팍 등을 꿰뚫으며 그를 저 아래에 있는 지반에다 처박았다.
마성은 손을 뻗은 그대로, 허공에서 다시 자세를 똑바로 갖추면서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공간이 열리면서 미후왕의 허물이 여의봉을 내리쳤다. 미후왕의 허물이 어떻게 움직일지 투로를 미리 예측했던 것이다.
쿠우웅!
끼리리릭-
둘의 충돌에 따라, 충격파가 뻗쳐 나가면서 연우의 무의식 세계가 크게 요동쳤다.
미후왕 허물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빛났다. 화안금정이 타오를 것처럼 굴면서 여의봉이 똑같이 크게 떨렸다. 기어 다니는 혼돈을 봉신했을 때처럼 다시 여의봉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칼라투스도 그런 그를 엄호하겠다는 듯 아가리를 크게 젖혔고, 전사장의 영혼도 영체를 결박하던 줄기를 모두 쳐 내고 자세를 똑바로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여의봉이 마성의 팔뚝 위를 미끄러지면서 변화를 시도하려는데.
『아 참, 미리 말해 두겠는데. 만약 여기서 그걸로 날 어떻게 해 보려 하면, 키키킥! 나도 궁지에 몰리는데 똑같이 정말 막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마성이 기괴한 웃음을 흘리면서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그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응집체를 입가로 가져가는 시늉을 했다.
순간, 여의봉의 떨림이 멈췄다.
미후왕의 허물은 마성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마성을 응시했지만. 별다른 사념이나 의념도 풍겨 대지 않고, 이목구비도 없이 기괴한 입 모양만 드러내는 녀석에게서는 어떤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결국 미후왕의 허물은 짜증 섞인 얼굴로 인상을 찡그리다, 연우를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그만 들을 수 있도록 어기전성을 날렸다.
『아무래도 저놈, 우리와 어떤 거래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친데?』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마성이 그냥 단순히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응집체를 가로챌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제 입안으로 밀어 넣었겠지. 만약 그랬다간 정말 재앙이 닥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태 그들을 괴롭히던 기어 다니는 혼돈보다 더 지독한 괴물이 나타난단 뜻이었으니.
연우가 기어 다니는 혼돈과 겨루고, 그를 봉신시킬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마성과 합일(合一)을 이뤘기 때문이었다. 홀몸으로 기어 다니는 혼돈과 겨루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마성이 주는 힘의 차이는 아주 컸다.
그런 녀석이 구태여 그러지 않고 있다는 건, 미후왕 허물의 말마따나 원하는 게 있다는 뜻.
아마도 연우가 녀석을 끌어들일 때 제시했던 대가를 내놓으란 뜻이겠지.
연우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뜻대로 되지 않는군.’
그냥 스리슬쩍 넘어가면서 마성도 기어 다니는 혼돈과 똑같이 공허에다 도로 처박아 버릴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마성이 이쪽을 보면서 씩 웃었다. 연우는 녀석의 웃고 있는 낯짝에서 ‘네놈의 인성을 모를까?’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결정은 네가 해.』
미후왕 허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만, 하나만 참고해라. 사실 우리에게도 이제 남아 있는 영력이 거의 없다는 것. 계속 이대로 싸웠다간 셋 다 소멸을 면할 수 없을 거야.』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후왕의 허물, 전사장의 영혼, 고룡 칼라투스, 그들 모두 자신을 대신해 기어 다니는 혼돈을 그렇게까지 몰아쳤으니. 사실 이렇게 형체나마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생전에 쌓은 격이 대단해서일 뿐이었다. 아마 지금 속은 금세 바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겠지.
결국 연우는 물러나라는 수신호를 내렸고.
칼라투스는 도로 브레스를 삼키고, 전사장의 영혼은 탐탁지 않다는 듯 마성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헬버드를 내렸다. 미후왕의 허물도 축지를 밟아 다시 연우의 옆으로 돌아왔다.
『키키킥! 이거 참, 너무하단 말이지. 너희들을 구할 때는 나도 같은 한 몸이었으니, 나 역시 지분이 꽤 크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야. 따지자면 나도 저놈과 마찬가지로 너희들의 신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신도들이 이렇게 신을 막 홀대해도 되는 건가? 응?』
마성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연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만 빈정대고. 원하는 걸 말해. 대가를 원하는 거냐?”
『당연하지. 내 몫은 내가 알아서 잘 챙겨야지, 안 그래? 안 그랬다간 저 밖에 있는 멍청한 신과 악마 놈들처럼 실컷 부림만 당하다가 토사구팽당할 수가 있으니. 나는 전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원하는 건?”
『키키킥! 네놈이 원래 주기로 했던 것.』
마성의 시선이 연우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맛난 것. 준다며? 네놈이 생각했던 게 있을 것 아니냐? 아마 내가 생각한 것과 비슷할 것 같은데 말이야.』
원래 연우가 말했던 ‘맛난 먹잇감’은 기어 다니는 혼돈을 말하는 것이었으니.
“다 내놓으란 건 아니겠지?”
『설마. 옛날의 나라면 또 모를까, 이것을 그냥 날로 삼키려 했다간 탈이 날 게 분명한데 왜 그런 짓을 하겠어? 그리고 욕심 많은 네놈이 그렇게 내버려 둘까. 이래 봬도 나는 인성밖에 안 남은 너와 다르게 꽤 합리적이어서 말이지.』
‘옛날의 나?’
연우는 순간 놓쳐서는 안 될 말을 들었단 사실을 눈치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말했다.
“그럼 뭘 원하는 거지?”
마성은 여전히 잘게 떨리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응집체를 꽉 쥐면서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귓가까지 찢어진 입술이 너무 흉측하게만 보였다.
『이놈의 자아.』
“자아?”
『그래. 이놈이 억겁의 세월 동안 몇 번씩이나 붕괴시켰다가 수복하기를 반복하며 단단히 다진 의식이면 된다. 그 외 신력이나 업 따위는 네가 알아서 처리하고. 어때?』
연우는 마성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신력이나 업, 영혼도 아니라, 그냥 단순히 자아라고?
얼핏 보면 ‘자아’라는 부분은 현상에 대한 인식(認識)과 가치에 대한 판단(判斷)의 기준점이며, 육체와 영혼을 이끌어 가는 선두이니 가장 중요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기어 다니는 혼돈이 가진 여러 가치 중 가장 떨어지는 부분이라 할 수도 있었다. 본디 자아라는 것은 무의식이라는 깊디깊은 바다 위에 아주 조금 떠올라 있는 표층(表層)에 불과하니. 그것이 거둬진다고 해도, 언젠가 새로운 표층이 만들어져 자아와 인격을 형성할 터였다.
웅, 우우웅-
안. 돼.
죽. 더. 라. 도.
다. 풀. 고.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응집체는 할 말이 있다는 듯 다시 울어 댔지만, 마성은 시끄럽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응집체가 고통에 크게 요동쳤다.
끄아아.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키키킥! 어서 결정이나 해라. 어차피 네놈에게도 그리 크게 부담되는 거래는 아닐 텐데?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따로 이놈을 해체할 수고도 덜어지는 것이니 편하지 않나?』
“…….”
연우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마성의 노림수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바가 없던 차에.
「웬만하면 녀석의 제안을 들어 주는 게 좋을 듯하다.」
고룡 칼라투스가 메시지 마법을 통해, 연우에게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녀석의 생각은 나도 추측할 수 있는 바는 적으나, 지금은 보다 먼저 너에게 필요한 것들을 최우선 순위로 체크해야만 해.」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칼라투스의 말이 맞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기어 다니는 혼돈이 억겁 년의 세월 동안 쌓은 신력과 업. 자아는 분리되어도 그것들은 남으니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결국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칼라투스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그러도록 하지.”
『키키킥! 네놈과 이렇게 말끔하게 거래를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마성은 다시 한번 더 기괴하게 웃더니, 응집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우드득-
그대로 비틀어 옆으로 우악스럽게 찢기 시작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 부르르 떨면서 격통을 호소했지만, 오히려 그런 울음소리는 마성의 재미만 더할 뿐이었다. 연우의 무의식 세계가 크게 요동칠 정도로 거친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응집체가 완전히 분리되었을 때, 울음소리도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마성의 양손에는 똑같은 형태를 한 검은 구슬이 각각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받아라.』
마성은 그중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것을 연우에게로 던졌다.
연우는 그것을 받았다가 살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깊이를 도저히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강대 한업과 신력이 잔뜩 뭉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념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고요한 바다처럼 너무 평온했다.
정말 녀석의 말마따나 너무 깔끔하게 분리된 것이다.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자신도 나중에 따로 시간을 들여 기어 다니는 혼돈을 해체할 생각을 했었는데. 마성은 너무도 쉽고 말끔하게 이런 일을 해낸 것이다.
실제로 마성이 들고 있는 검은 구슬은 연우의 것과 달리 갈팡질팡하며 떨고 있었으니. 기어 다니는 혼돈이 울음을 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성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검은 구슬을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우드득. 우득. 뭔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놈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마성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키키킥’거리며 쾌활하게 웃었다. 진미(眞味)라도 즐긴 듯한 모습. 오히려 더 없어서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뭐가 달라진 거지?’
연우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도저히 찌푸린 미간을 펼 수가 없었다. 뭔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힘이 이전보다 더 크게 늘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런 게 보이지 않았으니. 겉만 봐서는 도저히 차이점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봐, 애송이.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라고. 이런 일엔 얼마든지 협력해 줄 테니까. 키키킥!』
마성은 그 말만 남기고, 도로 비그리드의 형태로 돌아가 다시 기나긴 잠에 빠졌다. 녀석이 있던 자리에는 힘을 잃은 비그리드만이 땅에 꽂혀 있었다.
연우는 여전히 녀석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그리드를 검은 쇠사슬로 결박해 도로 공허에다 처박아 넣었다.
그리고.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력 덩어리를 가만히 보다가, 그것을 똑같이 4등분으로 나눴다.
그리고 그중 한 개는 자신이 갖고, 남은 세 개는 각각 미후왕의 허물, 전사장의 영혼, 그리고 칼라투스에게 고루 나눠 주었다.
“이번 일로 영력 소모가 극심했을 텐데, 우선 이것으로 보충하십시오.”
『호오. 네가 웬일이냐? 이런 걸 다 나눠 주고?』
미후왕의 허물은 조각을 받으면서 별일을 다 본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연우는 담담할 뿐이었다.
“나눠 준다고 한 적 없습니다.”
『뭐?』
“어차피 제게 속해 있는 한, 미후왕이 먹는 게 제가 먹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여차하면 그만큼 부려 먹으면 그만이고.”
『…….』
“안 드십니까?”
『……그래.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 어휴! 본체 놈과 만나면 대체 어떨지 눈에 선하다, 선해.』
미후왕의 허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재미나다는 듯 씩 웃으며 신력을 한껏 크게 삼켰다. 비록 혼돈의 성질을 품고 있어 전부 소화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테지만, 그래도 더 이상 사념체를 유지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전사장의 영혼과 칼라투스도 마다하지 않고 조각들을 받았다. 오랜 박제 생활로 피폐해졌던 그들의 영혼이 다시 윤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선악과를 삼키듯 남은 신력을 그대로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모든 용건이 끝났으니 무의식 세계에서부터 현실 세계로 방출되려는 것이다.
그렇게 시야가 꺼지기 직전.
연우의 시선은 저 밑에 있는 무저갱, 심연에 향해 있었다.
저곳은 대체 무엇일까. 저 안에는 무엇이 살고 있고, 기어 다니는 혼돈은 저기서 무엇을 봤기에 그토록 ‘조금만 더……’라고 애절하게 외쳐 댔을까. 수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결국 그런 생각을 뒤로한 채, 연우는 다시 현실 세계에서 눈을 떴다.
화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