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거마신룡 (8)
현실로 돌아오기 직전.
신력이 체내에서 조금씩 소화되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의 마지막 사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었으면 되었던 것인데……!』
『그분께서 왜 이곳에 잠드신 줄…….』
『하지만 이제야 알겠구나.』
『그랬던 것이었어.』
『역시. 인간…… 너는 너무나 재미난 존재였……!』
녀석은 자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사고(思考)가 정제되지 않아 하나같이 뒤죽박죽이었다. 어떤 것은 안타까움을, 어떤 것은 깨달음을, 또 어떤 것은 미련을, 환희를, 도저히 통일되지 않은 감정을 마구 풍겨 대고 있었다.
그리고 드래곤 하트에서 샘솟은 마력이 신력을 융화시키려는 순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지금보다 더 재미난 것을 볼 수 있겠군. 하하하……!』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조용히 사라졌다.
* * *
성역에서는 이제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우. 리. 의. 신. 이.
혼. 돈. 께. 사. 라. 졌.
어. 떻. 게. 된.
망자 거인들의 틈바구니에 둘러싸여 겨우겨우 저항을 시도하던 타계의 신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젖은 사념을 한껏 토해 냈다.
이렇게까지 밀렸어도 그들을 어떻게든 버티게 했던 것은 기어 다니는 혼돈이 이들을 물리치고 어떻게든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거인이 부활하든 말든 간에 상관없이, 이들은 언젠가 기어 다니는 혼돈이 장난감처럼 마구 부려먹었던 존재들이 아닌가.
그러니 이번에도 그 운명이 다르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런 믿음이 단번에 바스러지고 만 것이다.
더구나 지금 이곳은 죽음과 투쟁이 만연한 연우의 성역.
그런 상황에 그나마 그들을 붙들고 있던 기어 다니는 혼돈의 기운이 모두 사라져 버리자, 그들의 격도 급속도로 하강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콰르르릉!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검붉은 벼락이 거세게 떨어졌다.
벼락은 양서류같이 기괴한 생김새를 하고 있던 녀석을 관통하고 지나가 대지에 작렬하고, 여기서 튀어 오른 뇌기는 다시 수십 갈래의 벼락으로 분리되어 사방팔방으로 뻗쳐 거대한 거미줄을 그려냈으니.
아. 아. 아.
안. 돼.
이. 럴. 수. 는. 없.
녀석들은 거기에 모조리 휩쓸리면서 마지막 사념을 이리저리 풍겨 대다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마지막 녀석을 처치한 발데비히는 고개를 위로 높이 들어 허공에서 천천히 아래로 하강하는 연우를 보며 포효했다.
『신께서 돌아오셨도다!』
그 말은 승리를, 기어 다니는 혼돈의 죽음을 의미했으니!
망자 거인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높이 들면서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신을 따라라!』
방향을 돌려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던 배반자들에게로 몸을 날렸다.
전쟁을 전부 끝낼 시간이었다.
* * *
『어찌, 이런……!』
『기어 다니는 혼돈이 정말 패배했단 말인가……? 아무리 거인족을 부활시키고 사룡(死龍)을 불러내는 권능을 부린다고 해도……!』
더 이상 저항을 해 봤자 무소용이라는 것을 깨달은 배반자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바닥에 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이미 전황은 확실하게 연우 측에게로 기울어진 상태라, 어떻게 협상을 시도해 볼 수 있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해야만 했고.
공허를 비집고 나온 검은 쇠사슬이 신체(神體)를 속박하는 것에 순순히 따라야만 했다.
그들이라고 해서 이 쇠사슬이 모든 신력과 마기를 속박하는 신진철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자칫 이렇게 묶인 채로 봉신되거나, 가브리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영육이 모조리 갈릴지도 몰랐지만. 그들로서는 연우의 자비심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 있을 거란 기대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허락된 선택지가 아예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온 상태.
그러니 더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천계는 아직 ‘타계(他界)’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여태껏 관측되지 않았던 외우주였고, 창생과 질서의 법칙이 닿지 않은 곳이다 보니 알아낼 수 있는 바가 극히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자신들이 있는 내우주(內宇宙)로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고, 그 첨병(尖兵)이 바로 기어 다니는 혼돈이라는 것.
그 때문에 녀석이 가진 권능이며 신권이 아주 대단하다는 것까지도.
지금은 ‘천마증’으로 인해 깊은 잠에 들고 만 최고신이나 창조신, 고대신들이 나서는 게 아니고서야 막을 엄두를 내기 힘든 존재라는 것!
어쩌면 아스가르드나 올림포스, 절교와 같은 대형 사회가 나서야 할지도 모르는 존재일 텐데.
그런데 연우가 그것을 꺾어 버렸으니…….
비록 여러 가지 우연적인 요소가 따랐고, 그만큼 강한 존재들이 도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만한 업적을 깎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신과 악마는 업(業)을 쌓아 만든 신화를 바탕으로 계속 강해지는 존재.
기어 다니는 혼돈을 이겼다는 신화만으로도, 연우는 이미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아무리 연우에게 휘둘렸어도, 내심 그를 필멸자라며 무시하던 것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도리어 두려움마저 피어났다.
필멸자인 지금도 벌써 이만큼 성장을 이뤘는데, 대체 탈각과 초월을 모두 이뤘을 때에는 어떤 모습이 되는 것일까?
저 말도 안 되는 존재, 제2의 올포원이라도 되려는 것인가?
거기다.
『칼라투스에…… 발데비히까지……!』
『마지막 용왕이며 거인왕까지 돌아왔다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사멸했다고 알려진 옛 종족들의 왕까지 옆을 호종하고 있는 데야, 이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덜덜 떠는 것이 전부일 뿐.
연우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서서 그들의 면면을 살피기만 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상대에게 두려움을 안기는 법. 차갑기만 한 황금색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어깨를 떠는 그들의 모습이 영 우스웠다.
고작 이따위밖에 안 되는 존재들이 그동안 초월자입네 불멸자입네 저들끼리 떠들어 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웃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그냥 이대로 계속 내버려 둘 수만도 없는 일.
이미 모든 전투가 끝났으니 뒷정리도 해야 했다. 그에게는 이것 외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줄줄이 매달아 다른 놈들처럼 에너지원으로 삼고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적을 더 많이 만들 필요는 없겠지.’
이미 여기서 죽어 나간 놈들만 해도 숫자가 꽤 많았으니, 굳이 사서 더 많은 적을 만들어 운신의 폭을 좁힐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아가레스나 펜리르를 비롯해 중립 내지 아군의 편을 들었던 놈들의 시선도 있었고.
연우는 차라리 이번 기회를 틈타, 하나로 뭉치려는 천계를 다시 사분오열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죽은 놈들의 사회와 네 편을 들어 준 사회들 간에는 당연히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지? 인질도 이 정도로 잡아 두면, 저놈들 사이에도 반목이 빚어질 테고. 참으로 간교한 술수야. 악마인 나조차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가레스가 연우만 들을 수 있도록 어기전성을 통해 키득거렸다. 생각을 모두 짐작한다는 듯이. 그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대로 홀릴 정도였다.
그의 말마따나, 천계는 이번 일을 계기로 아마 갈등이 심해질 게 분명했다.
연우의 편을 든 곳과 그러지 않은 곳으로.
문제는 그렇게 나눠진 파벌 내에서도 다시 여러 파벌이 생길 게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적군 내에서는 인질이 잡힌 곳이 연우를 상대하는 데 있어 주춤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아군 내에서도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유무에 따라 차등이 생길 수밖에 없을 테니.
올포원을 상대하자는 공통된 목표 하나로, 관리국의 기능마저 마비시키면서 추진되었던 계획이 본격적인 시도를 하기도 전에 삐걱거리게 된 셈이었다.
단 한 명의 필멸자 때문에.
『인페르날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원한다면 너를 위해 어떤 자리라도 내어 주마. 어떠냐?』
아가레스는 필멸자 주제에 천계를 들었다 놨다 하려는 연우의 심계가 너무나 재미있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연우는 그에 가볍게 코웃음만 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디 그라고 해서 올포원을 돕고 싶을까. 그를 쓰러뜨리고자 하는 염원은 연우도 그들만큼 크면 컸지, 절대 작지는 않았다.
그러나 올포원을 상대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의 몫이어야 했지, 다른 이들의 몫이어서는 안 되었다.
더구나 천계가 자칫 하계로 내려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대폭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하기 때문에, 연우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단순히 천계를 갖고 놀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봉(封).”
촤르륵-
연우의 선언에 따라, 배반자들을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이 돌아갔다. 공허가 아가리를 잔뜩 크게 벌리자 녀석들의 얼굴에 더 큰 공포가 어렸지만, 그래도 소멸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배반자들에 대한 봉신도 전부 끝나고.
연우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미묘한 경계심을 보이고 있는 사절들과, 언제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재차 움직일 차비를 하고 있는 권속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콰콰콰콰!
별안간 하늘에서부터 지옥불이 잔뜩 응축된 거친 숨결이 연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야말로 그를 죽이겠다는 일념이 가득 담긴 불길. 타계의 신들도 불사르던 겁화(劫火)였다.
다행히 겁화가 연우에게 닿기 전에, 바로 옆에서 그를 지키고 있던 발데비히가 앞으로 뛰쳐나가면서 대검을 거칠게 휘둘러 겁화를 옆으로 치워 냈다.
『여름여왕!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이제 크기만 수십 미터에 달할 만큼 커진 발데비히가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리자, 그를 따라 막강한 마력 폭풍이 일어나면서 대기가 우르르 떨렸다.
그의 머리 위에는 여름여왕이 거대한 붉은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상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잔뜩 진노를 토해 내면서.
「비켜라, 반편이. 이 몸은 네놈과 네 주인 놈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즉.」
『뭐?』
반편이. 그 말은 반거인 출신인 발데비히가 가장 싫어하던 별칭이었다.
물론, 여름여왕의 오만한 성정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 몸은 네 주인 놈의 옆에 있는, 저 가증스러운 일족의 배반자에게만 용건이 있을 뿐이다.」
여름여왕은 잔뜩 일그러진 시선으로, 연우의 뒤쪽에 있던 고룡 칼라투스를 정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가야겠군.」
칼라투스는 쓰게 웃으면서 거대한 몸집을 크게 일으켰다. 그리고 연우에게 물었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겠나? 저 아이와 이야기를 끝내고 올 터이니.」
연우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칼라투스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크게 날갯짓을 하면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우선 자리부터 옮기자꾸나, 아이야.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에 그리 적합한 곳이 아닌 듯하니.」
「네놈의 무덤으로는 적합하지!」
칼라투스는 안타까움에 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여름여왕은 가당치도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더 브레스를 내뿜었다. 칼라투스는 그것을 가볍게 피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여름여왕이 바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연우는 저만치 점이 되어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보다, 다시 사절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우리도 정산하도록 하지.”
[‘말라흐’의 메타트론이 안경을 고쳐 쓰며 당신의 결정을 기다립니다.]
[‘르 인페르날’의 바알이 당신을 주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