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35화 (535/862)

10화. 거마신룡 (10)

연우는 미후왕의 허물과 만났던 곳, 무의식 세계를 떠올렸다.

온통 짙은 어둠으로만 가득했던 세계.

분명히 영혼의 본질을 이루는 장소라고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그곳에서 익숙하기보다는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미후왕의 허물도 그곳이 위험하다고 말하기도 했었고.

대체 그동안 어떻게 미후왕의 허물과 여름여왕이 그곳에서 머물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진즉에 그곳에서 자아가 붕괴되었을지도 몰랐다.

특히 무의식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어둠, 기어 다니는 혼돈도 어떻게든 탐험하고자 했던 ‘무저갱’ 혹은 ‘심연’이라고 불렀던 곳은 미후왕의 허물도 다가가지 말라고 했던 곳이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칠흑’이라고?

하지만.

“그렇군요.”

연우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사실 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니까.

기어 다니는 혼돈도 봉신시킬 정도로 무지막지한 상상력을 구현했던 미후왕의 허물도 다가가 기를 꺼려 했던 곳이라면…… 그런 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말이 되질 않으니까.

다만, 궁금한 점이 있었다.

대체 그런 것이 어떻게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동생의 영혼은 바로 그 속에 있는 걸까?

「역시 짐작하고 있었군. 그렇다면 혹시 집단 무의식(集團無意識)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칼라투스는 그런 연우의 궁금증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합적 무의식(集合的無意識)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브라함에게 얼추 강론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우도 이제 마법에 대해 어느 정도 깊게 통달한 상태. 덕분에 세상을 구성하고, 이면을 형성하는 여러 주요 법칙에 대해 대략 적으로라도 알고 있는 바가 많았다.

그중 집단 무의식, 혹은 집합적 무의식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브라함이 몇 번씩이나 강조해서 가르쳐 주던 지식이었다.

“전 우주에 걸쳐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를 넘어선 본능과 영혼의 고향이라고 말입니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전부 다름에도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특징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저절로 타고난 반응 양식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잉태되기 이전인 태곳적부터 이어진 것으로, 심상(心象)이나 상징(象徵)이 발현되는 공유적인 저장고가 따로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모든 생명체들은 바로 이런 저장고로부터 시간과 공간 단위를 넘어서 연결되어 활동하게 된 것이다.

다만, 이 저장고의 정체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신과 악마들에게도 그런 것이 있어 몇 번이고 접촉하기를 시도했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거나 도중에 영적인 타격을 입어 도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것은 거대한 ‘흐름’이라, 그들도 자칫 휩쓸릴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어떤 존재들은 그것을 두고 ‘시스템’이라고 명명하기도 했으니. 영혼에 법칙을 씌우는 모양새가 꼭 탑을 운영하는 시스템과도 성질이 사뭇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본 그것은 그런 집단 무의식의 일부라네. 모든 영혼들이 태어나고, 사멸하게 되면 저절로 돌아가게 되는 고향. 또한, 모든 진리와 법칙의 근간(根幹)이지. 그곳은 영혼이라는 물고기가 사는 ‘강’과도 같아 계속 흐르고 있고, 주기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생명체들이 저마다 본능을 가지고 사고를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강’이 있기 때문이고.」

“어찌 보면 윤회전생과 비슷할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전혀 달라. 윤회전생은 본디 수미산에서 시작하여 그 중심이 되었던 세계수의 ‘줄기’로써, 영혼이 생사를 통해 계속 돌고 돌 수 있도록 순환 고리를 형성하지. 반면에 저것은 세계수의 뿌리가 닿는 토양에 가까우니. 이 모든 우주의 가장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이라 봐야 해.」

우리가 살고 있는 내우주도, 타계의 신들이 머무르는 외우주에도 그 밑바닥에는 저것이 흐르고 있으니.

「아주 오래전…… 창세가 마무리될 무렵, 반고라는 존재가 잠들어 있던 곳이기도 한데, 그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도록 하고.」

칼라투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여하튼 나는 그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관측했고, 구성과 법칙이 어떻게 되는지를 연구했다네. 그리고 언제부턴가 ‘칠흑’이라고 명명하였지.」

연우의 눈이 빛났다.

“그럼 어떻게 그런 게 제 무의식 세계에 닿아 있는 겁니까?”

「닿아 있는 게 아니야. 그대는 기회가 닿아 우연히 다른 생명체에 비해 가까이 가게 된 것일 뿐. 그리고 그런 이들은 종종 태어난다네. 보통 그들은 ‘천재’라고 불리지. 근원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셈이니까.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아이가.」

“정우였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칼라투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연우는 허구한 날 자신이 동생을 불렀던 별명을 입에 담았다.

재능충.

「그 아이의 특성이었던 만통(萬通). 현상계에 대한 모든 감각이 열려 있고 깊은 재능까지 타고 났던 그 아이의 영혼은, 세상 그 누구보다 본래 칠흑과 가장 가까이 있던 것이었지. 축복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총애? 하여간 그런 걸 받고 태어난 것이라고나 할까.」

아니, 당시엔 축복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의 연우는 알고 있었다.

그게 저주나 다름없다는 걸.

‘빌어먹을 새끼. 하여간 죽어서도 내 속을 썩이는구나.’

연우는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바득 갈았다.

하지만.

그만큼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죽으면서 본래의 법칙대로라면 윤회전생을 겪어야 하나, 거기서 곧장 이탈되어 칠흑으로 되돌아가고 만 것이네.」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말이었지만, 결국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동생의 영혼을 찾기 위해서는 바로 칠흑을 탐험해야 한다는 것. 문제는 그것에 성공한 이가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신도, 악마도. 심지어 그것을 가장 오랫동안 깊이 연구했을 칼라투스조차도.

그래도 다행인 것이 있다면, 이전과 다르게 칠흑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헤맬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무엇이?」

“만약 칠흑에 가까울수록 타고난 재능이 개화되는 것이라면, 저와는 맞지 않지 않습니까?”

연우는 스스로 ‘재능이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비교 대상이 동생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는바. 다른 이들의 눈에는 이미 지금 이만한 경지에 오른 것도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연우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가 비정상적인 성장이 가능했던 건 어디까지나 동생이 남긴 일기장 때문이었고, 본격적으로 모자란 재능을 채우기 시작했던 건 여름여왕의 영혼을 흡수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사실 칠흑왕의 형틀이라는 치트가 없었더라면 이만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 한참의 세월을 필요로 했을 터였다.

「그 아이로부터 시스템을 승계받지 않았던가? 칠흑은 사실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니,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칠흑에 가까워졌던 것이지. 거기다 용체를 개발했던 건…….」

“당신이었죠.”

「그래.」

연우는 그제야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깔린 인과들이 엮이고 엮여 지금의 자신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칠흑의 후예로 발탁된 건 왜입니까? 그것도 정우 녀석 때문입니까?”

「그건 나도 정확한 내막은 모른다네. 하지만 저 밑바닥에 흐르는 칠흑의 ‘의지’가 종종 외부로 발현되고, 그중 하나가 그대를 선택했다는 건 알지. 어쩌면 자네의 말마따나, 정우 때문에 자네를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야.」

칠흑의 의지가 발현된다는 것.

연우는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여러’ 후예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의 아이가 바로 그중 하나겠지. 저 타르타로스에 깊이 처박혀 잠들어 있는 크로노스도 마찬가 지일 테고.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대체 칠흑…… 아니, 칠흑왕이란 건 무엇입니까?”

「말하지 않았는가. 모든 영혼이 잉태된 고향이라고.」

“그런 두루뭉술한 걸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음. 다르게 표현해야 하나? 그럼 이렇게 말하지. 세상의 근간. 모든 진리와 법칙의 원형 이전의 원형. 창세 이전의 것. 무(無). 공허…… 이명도 가지가지지. 세상의 틈, 모든 존재들의 아버지, 꿈의 주인 등등…….」

칼라투스가 씁쓸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개념적인 존재라고만, 창세와 함께 나타났다는 태고신보다도 더 오래된 존재, 그렇게만 여기는 게 생각하기 편할 것이네. 사실 그것은 이렇다 할 자아가 있다고 봐야 할지도 의문이니.」

연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대체 천마는 이런 걸 어떻게 공허에다 박은 거지? 배신했다던 존재들은 또 무엇이고?’

연우는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기만 했다.

알면 알수록 더더욱 거리가 멀어지는 것만 같이 여겨졌으니.

‘아니. 이미 지금까지 알아낸 것만 해도 커. 정우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고. 녀석만 데려온다면…… 모든 게 끝난다.’

연우는 사실 동생만 데려올 수 있다면, 지금껏 쌓고 이룬 모든 것들을 미련 없이 포기할 수도 있었다.

「너무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네. 나 역시도 그리 오랫동안 보았어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니. 그래도 자네는 따로 할 일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이제 남은 건 하나.

“칠흑을 탐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 *

연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뒷정리는 모두 권속들에게 맡긴 상태.

어차피 성역이 안정화되려면 신전의 구축이 필수이기 때문에, 키클롭스 3형제가 일을 모두 마무리 지을 때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다.

자신은 그동안 칠흑의 탐험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미후왕의 허물은 되도록 거기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했었지만.

「미후왕의 말도 일리는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방관만 하고 있기도 힘들지 않은가? 게다가 그러라고 한다 해서 그대가 정말 물러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칼라투스는 연우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말리지는 않았다. 대신에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니 천천히 접근하자.」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칠흑은 모든 어둠을 집어삼키고, 수많은 영혼들이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틈’이라네. 그리고 말했듯 ‘강’이기도 하지. 물속이라면…… 천천히 그 속에서 헤엄치는 법부터 익혀야 하지 않을까? 나아가서는 호흡도 해야 할 테고.」

영법과 호흡법.

「신과 악마들조차 자아가 붕괴되기 십상인 곳이지만, 그래도 다행히 자네에게는 아주 요긴한 도구가 있지.」

연우의 눈이 빛났다.

“계시록.”

「그래. 자네가 그리 부르는 에메랄드 타블렛은 사실 칠흑을 좇는 공부이기도 하니.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계시록을 가진 그대라면 칠흑에서 그만큼 오래 버틸 수 있을 테지.」

연우는 입안이 바싹 메마르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근질근질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을 테니, 우선 칠흑에서 친해지는 것부터…… 가까이 다가가는 것부터 연습해 보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의식을 아래로 가라앉혔다.

의식의 세계에서 전의식으로, 그보다 아래인 무의식으로…… 그리고 훨씬 더 아래층에 해당하는 심연까지 천천히 다다랐다.

이전에는 자신 안에 있을 줄 전혀 생각도 못 하던 공간이었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을 좇아 ‘인식’을 하고 난 뒤부터는 그 길을 찾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래. 내 이럴 줄 알았다. 개새끼, 하여간 애송이 놈처럼 말은 겁나게 안 들어요.』

미후왕의 허물이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연우는 그의 발아래에 ‘틈’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을 보며,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씩 웃었다.

그에 미후왕의 허물은 더 못마땅해했지만.

“제 사정,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아니까 하는 소리지. 야, 저긴 내 본체 놈이 직접 와도 섣불리 가기 힘들어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네가 가겠다고?』

미후왕의 허물이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들이 그렇게 천마님, 천마님, 해 대는 애송이 놈도 어떻게 하지 못해서 밑바닥에 처박은 게 전부인데? 하여간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그냥 계시록인지 뭔지 하는 거, 그거 더 모아서 안전하게 들어가.』

“그래도 까짓것 한번 해 보렵니다.”

『하…… 그래. 맘대로 해라, 해! 그러다 뒈지건 말건 상관없…… 아니지. 뒈지면 나까지 사라지는데? 야! 그냥 가!』

“예. 갑니다.”

『아니. 돌아가라고! 미친 새끼야! 썅! 진짜 가네?』

연우는 미후왕의 허물을 지나치고, 무저갱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영체가 흔들릴 정도로 찌릿찌릿한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며 칠흑에 다가가려 했다.

미후왕의 허물은 연우를 얼마 쫓지도 못하고 어느 구간에 멈춰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네놈이 되면 내가 성을 간다, 갈아! 아니다. 그냥 내가 네 아들 한다! 그러니까 돌아와!』

하지만 연우는 저만치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 했고.

『얌마!』

미후왕의 허물이 내뱉은 의념은 메아리가 되어 울리다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는 정말 연우가 잘못되지 않을까,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그런데.

첨벙!

『……응?』

뭔가 높은 곳에서 다이빙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연우가 칠흑에 온전히 몸을 담근 채로 머리를 이쪽으로 드는 게 아닌가. 별반 힘들어 보이는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저게…… 되네?』

미후왕의 허물은 황당하다는 듯 두 눈을 끔뻑거렸고.

연우가 그더러 보라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서 반말이냐, 아들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