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36화 (536/862)

11화. 또 다른 후예 (1)

연우가 무저갱 밖으로 나온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왔니?』

“아들아, 버릇없게 어디서 반말을…….”

미후왕의 허물은 오른 주먹을 슬쩍 들어 올리면서 씩 웃었다.

『뒈질래?』

“남아일언…….”

쾅!

미후왕의 허물은 웃는 낯 그대로 주먹을 가볍게 휘둘렀다. 연우의 관자놀이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충격파가 스쳐 지나가면서 저 멀리 있던 암흑의 장벽을 두들겼다. 금세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응? 뭐라고?』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연우는 냅다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였다.

『그래. 조심해. 이제야 겨우 막 피려는데 뒈져서야 되겠어?』

미후왕의 허물은 굳이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에 주먹만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여차하면 연우를 두들겨 팰 심산인 듯 보였다.

연우는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고모도 있는데’라는 말을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랬다간 정말 머리통이 부서질 것 같았다.

자신의 무의식 세계이니 그와 한바탕 다퉈도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처음부터 접은 상태였다. 없는 여의봉도 만들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을 봉신시킨 양반인데, 괜히 개개어서 좋을 건 없었다.

『장난은 이만하고.』

미후왕의 허물은 주먹을 내리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보다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무저갱 속에서 무사할 수 있냐는 의미였다. 아무리 연우가 계시록을 통해 격이 상승했다지만, 그래도 저 무저갱은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공허보다도 더 공허처럼 짙은 곳이 아닌가. 존재마저 삼키는 곳이기 때문에 신과 악마들도 다가가길 꺼려 할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미후왕의 허물도 저곳만큼은 늘 경계했었고,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면 자기도 모르게 홀릴 것 같았기 때문에 절대 보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그런데 연우는 너무 쉽게 무저갱에 접근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시간 동안 체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것 덕분인 것 같습니다.”

연우는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수갑을 들어 보였다.

『그건…… 칠흑이 남겼다는 유물이었지?』

“예.”

『음. 칠흑을 봉인한 물건이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자아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건가?』

“구조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연우는 처음 무저갱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미후왕의 허물이 말한 것처럼 ‘강’으로 보이기도, 혹은 계곡 같은 ‘틈’으로 보이기도 했던 그곳에 들어갔을 때. 분명히 정신이 흐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아가 낱낱이 해체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때 칠흑왕의 형틀이 일제히 떨리면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흩어지려는 내 존재를 단단히 붙들려 하고 있었어.’

연우는 다시 조용해진 검은 수갑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 분명히…… 어디론가 연결되고 있었고.’

칠흑왕의 형틀은 연우의 ‘존재’를 단단히 붙들어 놓는 한편, 어디론가 연결된 것처럼 그를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잡아당기고 있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그걸 정확하게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아직은 시간이 여유롭게 있으니 천천히 준비해 보자고. 나도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와 줄 테니.』

“예.”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연우는 본격적으로 무저갱에 들어가기 위한 연습을 시작했다.

‘심연 속에서 호흡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대체 형틀이 인도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해.’

심연.

그가 무저갱에 붙인 이름이었다.

무의식 속에 있고, 너무나 새카매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데다가, 마치 그 속에 음험한 괴물이 살 것 같아서였다.

『음? 뭔가가 있다고?』

“예.”

『그렇단 말이지.』

미후왕의 허물은 연우로부터 심연 속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뒤,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 끝에 있는 게 이게 잠들어 있다는 칠흑왕의 본체로 향하는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고. 확실한 건 직접 확인해 봐야 한다는 거지?』

“예. 칠흑왕, 본인이 있지 않다고 해도 그와 관련된 뭔가는 있을 테니까요. 심연의 본질에 대해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건 안 느껴졌어? 타인의 영혼이라든가, 아니면 잉태되려는 영력이라든가. 물질세계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들 있잖아.』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감각은커녕 인지라는 기능 자체가 정지되는 기분이었어요.”

『하긴 자아도 망가질 뻔했었다고 했으니. 그렇다는 건, ‘인지’만으로 네 동생을 찾기란 요원한 건가? 어렵네.』

미후왕의 허물은 깊어지는 생각에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 그를 빤히 보고 있던 연우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미후왕께서는 칠흑왕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으십니까?”

칠흑왕을 공허에다 처박은 건 분명히 천마라고 했다. 그러니 천마의 전생인 미후왕이 뭔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혀.』

미후왕의 허물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본체가 아닌 일개 분신일 뿐이야. 그렇다는 건 수용할 수 있는 정보 용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고. 본체는 물론, 애송이 놈과도 단절된 마당에 그런 걸 알 수가 있을까.』

애당초 본체로부터 분리되었을 때부터 중요 정보는 생략된 채로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가 맡은 임무가 궁전을 지키는 것이었으니, 그와 관련 없는 것들은 배제된 것이겠지.

연우는 어쩐지 미후왕의 허물이 짓는 쓴웃음이 너무 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현실감 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그가 진짜 미후왕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전히 못미덥기만 했다.

자신이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채 살아가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모든 자유의사도 박탈된 것이니. 그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물론, 그런 걸 내색할 수는 없는 일. 괜한 동정심은 미후왕 허물의 자존심만 건드릴 뿐이란 걸 잘 알기 때문에 화제를 슬쩍 돌렸다.

“그렇다면 미후왕과 같이 있던 것도 분신입니까?”

『나와?』

“처음 제가 미후왕과 만났을 때 봤던 용, 있잖습니까.”

『아, 성? 확실히 응룡(應龍)의 권능도 이어받아서 층계도 제멋대로 유영하고 다니는 그놈이라면, 뭔가를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본체 놈은 물론이고, 애송이 녀석과도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럼…….”

『하지만 그놈은 안 돼.』

“네? 무슨?”

『워낙에 제 주인을 닮아 제멋대로인 놈이라서,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거든.』

“궁전에 같이 기거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냐. 그놈이 심심하면 놀러 오는 거였지.』

연우는 마군과 대주교에 의해 미후왕의 허물이 위험에 빠졌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그를 인도했던 건, 어떤 빛의 구슬이었다. 분명히 용신의 기운이 담겨 있었지만, 진짜 용신은 아니었다. 그때는 왜 그런가 하고 의문만 가졌었는데, 사실은 용신이 다른 어디론가 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걸까.

‘확실히 그가 나섰으면 미후왕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도 않았을 테고.’

용신은 그때 무엇을 했던 걸까? 그리고 어째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여하튼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건 아주 단편적인 정보밖에 없고. 나머지는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는 거네. 나는 도와주고 싶어도 힘들 것 같고.』

미후왕의 허물은 짜증 섞인 얼굴로 심연을 내려다보았다. 한낱 사념체에 불과한 자신은 들어가 봤자 존재만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한평생 모든 세상이 좁다 하며 돌아다녔던 그로서는 분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지금 여기에서 도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잠수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니. 안 돼, 그건. 형틀이 아무리 존재를 붙들고 있어도, 그 기능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최대 유지 시간이 따로 있을지도 모르고, 깊이에 한계가 있을 수도 있어. 그때는…… 너라도 힘들어.』

연우는 칠흑왕의 형틀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로서는 그렇지 않으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미후왕 허물의 말마따나 도구에만 의존하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심연 속에서는 아무것도 인지되지 않는 까닭에,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호흡’이 중요하단 말씀이시군요.”

『그래.』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거야 딱 하나밖에 더 있겠어?』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다르게, 황금색으로 빛나는 미후왕 허물의 두 눈은 진지했다.

『의념 통천!』

역시나.

연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그라고 해서 어디 그걸 생각 안 해 봤을까.

“아뇨. 심연 속에서는 안 됩니다.”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 잡아먹힐 뻔했을 때에도, 마해에 갇혔을 때에도, 의념 통천을 사용해 이성을 유지하며 시스템의 제약을 벗어던졌다지만.

심연에서는 도저히 그게 잘 먹히지 않았다.

정신적 영역을 외부로 방출하려 해도 그냥 ‘먹히는’ 느낌이었다. 인지되는 것이 전혀 없다 보니, 뭘 하려 해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의념 통천의 성립이 힘들었다.

하지만.

씨익!

미후왕의 허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거야 네가 그저 그런 의념 통천을 쓰니까 그런 거지.』

“……?”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 걸까.

『전부터 느꼈던 건데, 넌 의념 통천까지는 이제 능숙하게 잘 해 내는데, 왜 심상 개변까지 이뤄 내지는 않는 거냐?』

연우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상 개변은 결계 구축이 우선이 아닙니까? 하지만 제게는 영역 선포가 있으니 별 차이가 없…….”

『별 차이 없긴. 운영하는 주체가 전혀 다른데.』

“……?”

『너의 성역을 자동으로 설치하는 권능, 〈영역 선포〉와 심상 개변을 위한 심상 결계의 구축은 전혀 궤를 달리해. 영역은 네가 밟고 있는 신위를 바탕으로 마련되는 것이지만, 심상 결계는 너의 자아를 바탕으로 비롯되는 것이니. 밖에서 시작되느냐, 안에서 방출되느냐의 차이인 거지.』

“…….”

연우는 잠깐 고심에 잠겼다.

‘내가 그동안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건가.’

그림자 영역을 퍼뜨려 임시로 성역을 구축하는 영역 선포만으로도. 그는 다양한 신권과 권능을 풀어낼 수 있었고, 적들을 외부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었다. 그 안에서만큼은 자신이 유일신(唯一神)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그것을 심상 결계와 비슷한 개념으로 여겨 왔다. 실제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후왕의 허물은 그 두 가지가 전혀 별개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역 선포는 신위를 근거로 발현되는 권능이니, 어찌 보면 정해진 알고리즘에 기초한 프로그램에 가까워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이라 할 수 있었고.

의념 통천을 이용한 심상 결계의 구축은 정신에서 시작되어, 물질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것에 가까웠다.

『너는 이제 분명히 계시록을 획득하면서 웬만한 신이나 악마쯤은 가볍게 찜 쪄 먹을 수 있는 수준에까지 올랐어. 옛 거인족도 신도로 두고 있으니, 이대로 계속 성장해 탈각과 초월을 이룬다면 어쩌면 최고신(最高神)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을 테지.』

미후왕의 허물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심상을 법칙에 새기는 건 자신의 역량이지. 그것을 얼마나 잘 이뤄 낼 수 있는지도. 보통 초월적인 존재들이 한번 계급이 정해지고 나면 더 크게 성장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체되는 것도 그 때문이야. 신위를 그냥 사용하는 게 훨씬 편하고 순조로우니까. 어디까지나 존재가 신위를 도구처럼 다스려야 하는데, 반대로 신위에 잡아먹히고 마는 거지.』

신과 악마들이 결국 최소한의 자아만 남고, 법칙을 위한 단순한 톱니바퀴로 전락하고 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인 거지. 미후왕의 허물은 그렇게 말하면서 연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런 면에서 이미 무공을 바탕으로 업(業)을 하나로 엮고 있는 너에게는, 의념을 더욱더 강화시켜서 심상으로 신위와 신화 등을 전부 담아 버리는…… 그런 훈련법이 필요해.』

연우는 어쩐지 자신도 모르게 미후왕의 허물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계속 홀리는 기분이 들었다.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검뢰.

미후왕 허물의 말대로라면 이것을 더 강화시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

『모든 걸 일념(一念)에 담아 세계를 개변시키는 것.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심연 속에서, 도구의 의지를 벗어나 자연스러운 호흡이 가능해질지도 모르지. 그때는 심연 깊숙한 곳에 있는 ‘그걸’ 볼 수도 있을 거다.』

일념으로 세계를 개변시킨다.

그것을 얼추 일반적인 초월자의 영역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럼 의념 통천을 이보다 더 발전시키려면 어떤 방식이 좋을까요?”

미후왕이 생전에 밟은 길은 연우로서도 도저히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까마득할 터.

무(武)에 있어서 그가 어디까지 이뤘을지 도저히 짐작도 가질 않았다. 비교한다면 끽해야 스승인 무왕을 들 수 있을 테지만…… 워낙에 둘 모두 닿아 있는 곳이 높다 보니 어떤 차이가 있을지 자신도 짐작하기가 아직 힘들 정도였다.

『내가 본체 놈과 분리되고 난 뒤로, 성이 녀석이 올 때가 아니면 내내 심심해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럼 그동안 대체 뭘 했겠어?』

그게 무슨 말뜻인지 알아챈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기나긴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참오만 거듭했다면…… 그 심득(心得)의 깊이가 얼마나 될지 도저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참 긴 시간이었어. 지겹기도 하고 악바리만 남기도 하고. 그래서 다짐했지. 짜증 나는 본체 놈이 이룬 것보다 더 나은 뭔가를 만들어 내고 말겠다고.』

“…….”

『거기다 이곳으로 오고 난 뒤에는 이스메니오스 녀석과 툭 하면 담론을 나눴었지. 마지막 용이라 그런가, 꽤 아는 게 많더라고? 덕분에 그동안 구상해 놓기만 했던 것들, 이것저것 더하고 뺄 거 빼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지. 그리고 너에게 맞게끔 고칠 수도 있었고.』

“……!”

『그러니 지금부터 가르쳐 주마.』

미후왕의 허물이 장난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놈에게 알맞게 새롭게 개량된 새로운 제천류, 검뢰팔극(劍雷八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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