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38화 (538/862)

13화. 또 다른 후예 (3)

“젠장…… 빌어먹을!”

연우는 허공 한가운데에 쓰러지듯이 누우면서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후왕의 허물은 대련하는 내내 정말이지 연우를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덕분에 연우는 거마신룡의 특성을 얻고 난 뒤 처음으로 ‘피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과 싸울 때에도 느끼지 않았던 것을, 대련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심상 개변을 자유자재로 발휘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절대 아니었다.

물리 세계에 강제로 새겨 넣은 의념 통천을 성역으로 지정하고, 이것의 성질을 통째로 바꾸어 개변(改變)을 일으킨다는 것.

그리하여 심상 속에 잡아 놓은 이미지를 물리 세계에 구현한다는 것은 막대한 심력 소모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범위나 위력이 크면 클수록 소진되는 마력량은 또 터무니없이 컸다.

그러다 보니 연우는 삼극(三極)에 다다르는 것만 해도 탈진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고, 사극(四極)이 되었을 때에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가야만 했다.

오극을 풀어내고도 지쳐 보이기만 할 뿐, 비교적 괜찮아 보이던 미후왕의 허물이 정말이지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으니.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계속 무한 대련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검뢰팔극에 대해 숙련도가 쌓였다는 점이었다.

[‘유성검결’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여 빠르게 Max치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플레이어의 능력치를 산정하여 새로운 스킬을 탐색합니다.]

[스킬과 관련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상위 스킬을 오픈합니다.]

[스킬 ‘검뢰팔극’을 오픈합니다.]

[검뢰팔극]

넘버링 ???(측정 중)

숙련도: 5.2%

설명: 기존에 창안되었던 ‘유성검결’을 새로운 제천류와 합치면서 재해석해 한 단계 이상으로 끌어 올린 스킬. 기존 소유자가 초월을 이루었을 경우, 신권급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사용법에 따라 다양한 응용기가 탄생할 수 있다.

그 폭발적인 위력과 가능성은 이미 많은 신과 악마들을 직접 봉신시키면서 입증되었을 정도로 대단하다.

또한, 총 8회에 걸쳐 심상 개변을 통한 위력 강화가 가능하며, 그 밖의 특징은 현재 알려진 바가 극히 적어 거듭된 개량이 필요하다.

* 일극(一極)

팔괘의 끝, 팔극의 기운 중 ‘건괘’의 힘을 임의로 불어 넣어 위력을 강화시킨다. 심력과 마력의 소모에 따라 위력과 효과가 미치는 범위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 이극(三極)

팔괘의 끝, 팔극의 기운 중 ‘태괴’의 힘을…….

……

**이 스킬은 ‘레전더리’입니다. 탑 내에서도 오로지 당신만이 구사할 수 있으며, 절대 타인에게 전수하거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아직 미완성인 스킬입니다. 권능 혹은 신권으로 발전할 잠재 가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완성’을 이루어 당신만의 고유 스킬로 장착하세요.

그에 시스템은 유성검결도 한 단계 이상 진화했다고 판단했는지, 검뢰팔극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새로운 스킬 정보창을 띄웠다.

다만, 스킬창 안에는 이렇다 하게 참조할 만한 내용은 크게 없었다.

아마도 연우가 독창적으로 성립시킨 체계를 비튼 것이라 그런 것이겠지. 미후왕의 허물이 만들었다지만, 그는 플레이어가 아니니 이런 정보창이 없을 테고.

그래도 이렇게 보고 있노라니, 자신이 다시 한번 더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어 매우 기뻤다.

계시록을 얻고, 그토록 바라던 거마신룡도 터득하며 난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어 다니는 혼돈도 쓰러뜨리는 데 성공한 이때.

이제는 한계에 봉착하면 어쩌나 하고 염려하고 있었던 차에, 다시 한번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졌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조금만 쉬어야겠어.’

미후왕의 허물도 조금 피로하다면서 쉬겠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

연우는 그동안 여기서 가만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 참이었다. 다행히 자신의 무의식 세계이다 보니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정신력의 회복도 보다 더 빨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좀 회복을 기다리려는데.

쿵!

갑자기 묵직한 무언가가 자신의 옆에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연우는 뭔가 싶어 슬쩍 눈을 떴다.

거대한 붉은색 동공이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여름여왕.”

여름여왕이 본체를 이룬 채로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흥. 이미 육체도 없는 몸이다. 영혼도 없는 찌꺼기 주제에 계속 그런 낯간지러운 별칭으로 불리는 것도 참 우습군.」

여름여왕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다가, 늘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바닥에 엎드렸다. 잠이라도 청하는 것 같은 모습. 연우 따윈 안중에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연우는 그런 여름여왕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흉악한 이를 드러내면서 폭압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던 이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 때문에 탑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그녀를 두려워했고, 사실상 그녀는 수백 년간 탑의 지배자로서 공고한 입지를 갖출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 전부 해방된 이후로는 전혀 달랐다.

오만한 기세는 그대로였지만, 만사에 큰 흥미가 없어진 모습이었다. 오히려 너무 시니컬해져서 자신이 살아생전에 쌓은 것들에 대해서도 대개 무관심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미후왕의 허물이 검뢰팔극을 만들 당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로서는 믿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이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 몸이 왜 굳이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거지?」

“안 해도 돼. 하지만 대신에.”

파지직!

연우는 자신의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 위로 검뢰가 가볍게 튀어 올랐다.

“이건 어디로 튈지 나도 모르겠는데.”

「……헤븐윙은 그래도 이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어떻게 쌍둥이라는 것들이 이리 다른 거지? 너희들은 유전적으로는 동일하게 태어난 것 아니었나?」

여름여왕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맞아. 그 녀석도 나와 똑같은 성격이지. 몰랐나?”

「웃기지 마라. 지독하기는 네 쪽이 훨씬 지독하니까.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면 그럴 수도 있다. 싶지만…… 그렇다 해도 인간의 정신적 성숙은 2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니, 너희 형제는 거의 같을 텐데도. 흠. 이해할 수가 없군. 형제가 나란히 이렇게 단기간에 탑을 석권한 걸 보면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닌데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단정 내리지?”

「나 역시 쌍둥이 형제가 있었으니까.」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여름여왕에게 쌍둥이가 있었다고?

그렇다면 용종은 멸종한 게 아니었단 건가?

하지만 여름여왕 외에 다른 용종이 있었다면 왜 여태 소문이 나지 않았던 거지?

그러나 여름여왕은 그 의문에 대해서는 답해 주기 귀찮다는 듯, 머리를 지면에다 댄 그대로 한쪽 눈만 게슴츠레하게 뜬 채 연우를 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다 하지 않았던가. 어서 빨리 물어라. 졸리니까.」

“검뢰팔극. 만드는 데 도와준 이유가 뭐지?”

사실 검뢰팔극의 의미는 단순히 심상 개변을 통해 검뢰의 위력을 증가시키는 것에만 있지는 않았다.

그 안에는 수많은 무론과 마법적 장치들이 낱낱이 해체되고 결합되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굴러가 전혀 새로운 학문처럼 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연우로서도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의 내용들이 많아, 만약 연우가 검뢰팔극과 비슷한 수준의 무공을 구성하려 했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게 분명했다.

그건 여름여왕이 그만큼 전력을 다해 자신의 지식을 빌려 주었단 뜻이었다.

「고작 그따위 걸 물으려고 내 잠을 방해한 건가? 참으로 고얀 놈이로군. 바깥세상이었다면 즉시 목이 매달려도 이상하지 않을 중죄다.」

여름여왕은 떴던 눈을 가만히 감으면서 대답했다.

「이유는 예전과 여전히 다르지 않다. 내 가족과 친지들을 앗아간 올포원의 낯짝을 후려갈기고 싶다는 네놈의 뜻이 조금이라도 빨리 현실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헤븐윙의 영혼을 찾아 그가 다시 온전해지게 하기 위해서. 이 둘뿐이다.」

“이미 정우와는 화해도 하지 않았었나? 녀석이 용서도 해 준 걸로 알고 있는 건데.”

「그렇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몸이 지난날에 지은 죄가 있으니 그것을 다시 매듭지으려는 것뿐이다. 다만, 지금 이 몸은 이렇다 할 몸뚱이가 없는 상태이니, 네놈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고.」

연우는 그동안 단순히 여름여왕이 동생의 사념체를 만나고 난 뒤 어떤 심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확하게 알 것 같았다.

‘사실은…… 정우를 좋아하고 있는 거였나?’

연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동생 녀석의 여자관계가 참 복잡하기도 하다 싶었던 것이다. 정말 만나게 되면 한 대 때려 주기라도 해야 하는 건지.

「네놈의 그간 행보를 보니 괜찮겠다 싶어서 이제는 좀 도와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기억해라.」

여름여왕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눈은 자그마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용은 절대 수치를 잊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의 목을 물어뜯는 것도 나라는 것도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래야 여름여왕이지.’

여태껏 시니컬한 모습만 보이다가 제대로 된 적의를 띠니, 이제야 겨우 원래의 여름여왕으로 돌아왔다 싶은 것이다.

사나운 맹수. 그런 아이덴티티가 없으면 여름여왕이 아닌 셈이다.

그래서.

연우도 따라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해 볼 수 있다면. 언제든지.”

「흥. 시건방진 것.」

여름여왕은 그렇게 투덜거리고 난 뒤, 더 이상 말하기 귀찮다는 듯 아예 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눈을 감았다.

* * *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연우는 모든 휴식이 끝나자, 다시 심연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명심해. 들어가다 힘들겠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나오도록 하고. 의념 통천, 계속 유지하는 것도 잊지 말고.』

미후왕의 허물은 연우가 여전히 걱정되었는지, 약간의 휴식 뒤에 재차 입수를 시도하려는 그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한껏 늘어놓았다.

“…….”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그러다 미후왕의 허물은 연우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살을 팍 찌푸렸다.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뭘?』

연우는 손으로 자신의 눈두덩이를 가리켰다.

양쪽 눈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피식-

미후왕의 허물이 가볍게 웃었다.

『야, 사내자식이 그런 거 가지고 째째하게 굴기는. 기분 좋게 대련했으면 된 거지, 뭘 아직도 꿍해 있어?』

“…….”

연우는 목 언저리까지 치고 올라온 욕지거리를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억지로 끌어다가 대련한 거잖아!

『그리고, 응? 이 미후왕님에게 이만큼이나 대들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기나 하냐?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도 된단다. 암, 그렇고 말고.』

연우는 더 길게 말을 나눴다가는 정말 화병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한번 더 하강을 시도했다.

미후왕의 허물은 그를 따라가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이 이상 가게 되면 정말 심연이 가진 중력에 강제로 빨려 들어가 잡아먹힐 것 같았으니까.

『새끼…… 무사해야 할 텐데.』

미후왕의 허물은 연우가 심연에 완전히 잠겨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걱정스러운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지이이잉-

연우는 심연으로 입수를 하자마자, 모든 인지와 감각이 흐트러지면서 자아마저 희미해질 것 같은 위험을 느꼈다.

하지만 목과 팔, 발목에서 각각 세 개의 형틀들이 울리는 느낌이 들자, 천천히 자아가 눈을 떴다.

그러는 것과 동시에.

의념 통천을 통해 의념을 외부로 방출시켰다. 물론, 인지와 감각이 전혀 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의념 통천이 제대로 구성되었는지를 확인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성공했다는 가정 하에서 그대로 검뢰팔극의 방식을 이용, 의념 통천을 성역으로 구축시키는 것과 동시에 심상 개변을 일으켰다.

콰드드득-

그러자 분명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야 할, 주변 세상이 크게 뜯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우어어!

끼아아-

키키, 키!

사방에서 뭔가가 놀라 울음을 토해 내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심상 세계는 자신이 구축한 곳. 당연히 ‘보는’ 것도 가능할 테니, 연우는 용신안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들은.

‘이건…… 대체 뭐지?’

무수히 많은 둥근 입자들이 일정한 흐름을 타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이상한 세계였다.

이곳은 바닷속이라고 해도, 혹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뭔가 제대로 된 것 하나 없는 어두운 것들이 이리저리 ‘흐르고’ 있었다.

물살을 따라 움직이는 그 무언가는 기괴한 소리를 풍겨 댔다. 다만, 아주 작고 미약해서 처음에는 입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영혼?’

아니, 영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영혼이었다.

‘갓 잉태된…… 아직 윤회전생의 시스템을 시작하지도 못한 초창기의 생명체. 생령(生靈).’

그것은 연우가 소울 컬렉션으로 담고 있는 망령과는 전혀 질이 다른 것이었다. 망령들은 오로지 원과 한만 내뱉을 줄 알지만, 생령들은 그와 전혀 다르게 순수한 호기심이 어린 모습으로 연우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반딧불이? 요정? 마치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생령들은 연우의 입과 코 등을 이리저리 툭툭 건드리면서 저들끼리 속삭이기도 하는 등, 가볍게 웃음을 흘려 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우가 자신들을 인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연우가 장난삼아 검지로 생령 중 하나를 톡 하고 건드리자.

끼아아!

녀석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사방으로 달아났다. 연우가 이래저래 움직이는 것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자신들을 인지하니 놀란 것이겠지.

연우는 그것을 보면서 피식 웃다가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심연에서도 아주 깊숙한 곳을 향해 칠흑왕의 형틀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곳에 뭔가가 있다.

칠흑왕의 본체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

그곳을 향해.

쾅-

연우는 전력을 다해 하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유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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