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40화 (540/862)

15화. 또 다른 후예 (5)

설마 이런 곳에서 시의 바다의 수장과 만나게 될 줄이야.

‘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거지?’

연우 자신도 이곳에 오기 위해

상당한 수고와 노력이 필요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녀석은 그야말로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의문과 반대로 맹공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차차창!

녀석은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손날을 옆으로 쳐 냈다. 순식간에 마장대검과 여러 합이 오고 갔다.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강한 힘이 가득 묻어났다.

그러다 갑자기 녀석의 옆에 있던 곰 인형이 폴짝, 하고 뛰어오르더니, 위에서부터 아래로 연우에게 앙증맞은 주먹을 날렸다.

보기에는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막대한 마력이 담긴 게 분명 한 주먹질. 심지어 마력장 때문에 공간이 우르르 떨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연우는 급격하게 심상 구현으로 비그리드를 닮은 검을 소환, 그대로 위로 쳐올렸다.

쿠르르릉-

연우는 충격파를 타고 녀석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하늘 날개로 홰를 치면서 도로 균형을 잡았다. 녀석을 보는 두 눈이 금색으로 예리하게 빛났다.

곰 인형도 연우와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다가, 다시 녀석의 옆에 가볍게 착지했다. 쓸데없이 귀여운 모습이 은근히 연우의 심기를 자극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듣던 대로 확실히 거친 분이시네요.』

시의 바다의 수장은 연우를 보면서 슬쩍 미소를 흘렸다. 고스로 리 복장에 곰 인형을 안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 연우는 상대가 참 괴악한 취미를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웅, 웅, 우우웅-

지이이잉!

하지만 그는 그보다 다른 것이 더 눈에 들어왔다.

녀석의 목과 왼쪽 팔목, 그리고 오른쪽 발목에 채워져 있는 세 개의 형틀이 보였던 것이다.

연우가 착용한 것과는 정반대되는 위치였다. 심지어 팔뚝을 칭칭 감고 있는 쇠사슬도 똑같았다.

그리고.

“……너 인간이 아니로군.”

연우는 단번에 녀석이 인간이 아닌 이종(異種)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의 모습은 단순한 폴리모프 마법에 의한 트랜스폼(Transform)도 아니었다. 의념이 투영된 화신체였던 것이다.

화안금정을 담은 용신안은 흐릿한 모습 뒤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어둠에 둘러싸여 있어 정확한 형체는 알아볼 수 없지만, 칼라투스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크기에 불그스름한 광채가 감도는 비늘을 가진…… 용이었다.

순간, 녀석의 눈동자가 세로 동공으로 확 바뀌었다.

용종을 상징하는 세로 동공.

용마안이었다.

『눈썰미도 아주 좋으시구요. 이러니 그분의 총애를 받으시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걸요?』

연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녀석의 정체가 무엇일까 빠르게 고민할 뿐이었다.

‘용종은 분명히 여름여왕을 마지막으로 멸종을…… 아니군.’

연우는 뒤늦게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용종이 한 마리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역시 쌍둥이 형제가 있었으니까.

언젠가 여름여왕이 지나가듯이 했던 말.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기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자가 여름여왕과 쌍둥이이거나, 혹은 그와 연관된 인물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뒤늦게 그동안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브라함도 언젠가 용종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브라함이 성육신을 갖추고, 타천(陀天)을 감수하면서까지 하계로 내려왔던 이유.

그것은 작은 유희에서 시작했으나, 훗날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해 주었던 용이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아난타의 어머니가 된다는 용.

‘아냐. 브라함의 짝은 분명히 죽었다고 했었어.’

하지만 브라함이 들은 건 어디까지나 ‘소식’이었고, 시기상으로도 용들이 대량으로 멸종했던 용살대전 이후였기 때문에 찝찝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자꾸만 이상하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

저만한 존재가 여태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이런. 저 혼자만 떠들고 있네요.』

하지만 녀석은 그런 연우의 생각을 도중에 멈추게 하려는 듯,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여기까지 온 것은 정말 칭찬할 만한 일이에요. 지금껏 기나긴 탑의 역사 동안,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도전했지만 당신 만큼 다가온 자는 극히 드물었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당신은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준비? 그게 무슨 소리지?”

연우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녀석은 가만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그긍-

무언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끼리릭, 끼릭-

쿠쿵!

별안간 거대 문의 아래에서부터 커다란 쇠사슬이 수십 개 튀어나와 그대로 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문을 아예 봉쇄하려는 것이다.

저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연우가 다급하게 하늘 날개를 펼치려 했지만.

쿠르르르-

갑자기 심연을 따라 흐르던 해류가 급격하게 요동치면서 연우를 강제로 밖으로 밀어냈다. 어떻게든 안간힘을 다해 버티려 했지만, 해류는 그보다 더 거칠었다.

『더.』

저 멀리서, 녀석의 의념만이 메아리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더 많은 자격을 갖추고 돌아오세요. 칠흑과 직접 마주해도 될 정도의 자격을 가지고서요. 저분은 그만한 격이 되지 않는 이가 오는 걸 아주 싫어한답니다.』

연우의 의식은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다.

* * *

쿠쿠쿠……!

『응?』

미후왕의 허물은 여름여왕과 무언가를 논의하다 말고, 갑자기 저 아래에 있는 심연이 요동치기 시작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는군.」

여름여왕은 가만히 그것을 보면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아아앙!

갑자기 엄청난 폭발과 함께, 심연에서 어마어마한 높이의 물기둥이 치솟았다. 그 끄트머리에서 힘없이 튕겨 나고 있는 연우의 모습이 보였다.

미후왕의 허물은 재빨리 그쪽으로 손을 뻗어, 마력을 이용해 연우를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잡아당겼다.

『훠우! 이 새끼, 장난 아닌데? 뭘 이렇게 오래 있나 싶었더니, 밑바닥까지 다녀왔나 보네.』

미후왕의 허물은 연우를 따라 감도는 강한 사념을 읽고 가볍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사실 연우에게 검뢰팔극을 가르쳐 주었다지만, 심연 속에서 얼마 있지 못하고 금방 되돌아오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깊이도 제대로 측정할 수 없는 곳을 계속 잠수한다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할 테니.

아무리 대단한 자아를 가진 자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는 일 년 이상도 홀로 버티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해내고 말았다.

기약 없이 앞만 보고서 이 긴 시간을 내려가고, 정말 도착했다는 사실이 대단하게만 여겨졌던 것이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건가. 뭐, 그러니 맘에 드는 것도 있지만.’

사실 그냥 그저 그런 놈이었다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나서지도 않았을 테지만.

‘이놈이라면…… 그래. 정말 걸어 볼 만할지도.’

미후왕 허물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 불쌍한 녀석을, 아비의 망령이 남긴 저주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하르모니아를 만났나.」

여름여왕이 연우를 보면서 가볍게 냄새를 맡더니 중얼거렸다.

『하르모니아?』

「있다. 그런 것이.」

여름여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았다.

미후왕의 허물도 더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그녀가 저렇게 나오면 아무리 물어도 꿈쩍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그보다 이놈, 어쩌지?』

미후왕의 허물은 연우를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그가 마음에 드는 것과 별개로, 남자 녀석을 계속 병간호하는 건 사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긴.」

여름여왕은 뭘 그리 고민하냐는 듯, 아주 쿨하게 대답했다.

「던져.」

* * *

“……!”

연우는 억지로 눈을 떴다. 마치 깊고 답답한 물속에서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급격하게 공기를 들이마신 기분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정신이 좀 드나?』

멀뚱한 눈으로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발데비히였다.

연우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 누르면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아무래도 현실로 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 히든 스테이지가 그가 무의식 세계에 들어서기 전과 비교했을 때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지?”

『두 달.』

‘다행히 시간이 많이 흐르지는 않았군.’

무의식 세계와 현실 세계의 시간 흐름이 전혀 달라서 생긴 결과였다.

『그동안 신전 건설도 모두 끝나고, 대신전도 기존의 것을 보수해서 마무리되었어. 지금은 곳곳에 남아 있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흔적들을 정화시키고 있는 중이고.』

연우는 발데비히의 말에 망막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메시지들을 쭉 확인했다.

[성역 각지에 당신을 기리는 신전들이 건설되었습니다!]

[신전을 통해 당신의 의지가 전해집니다. 당신을 거부하는 불길한 기운들이 차례로 정화됩니다.]

[신도들이 신전에서 당신을 향한 강렬한 기도와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더 많은 신도들을 확보하여 신전으로 인도하세요. 보유한 신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신전에 대한 소문이 커지면 커질수록 당신의 위명도 덩달아 커질 것입니다.]

……

[대신전이 완성되었습니다.]

[대신전은 당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주요 장소입니다. 이제부터 신탁(神託)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

[시나리오 퀘스트(신과 왕의 증명 V)를 전부 달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5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보상으로……]

……

[모든 시나리오 퀘스트(신과 왕의 증명)이 끝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거인족의 신이자 왕으로 거듭난 당신을 경탄과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성역이 안정화되었습니다.]

연우가 메시지를 읽어 가는 와중에 각지에 세워진 신전을 통해 전해진 신앙이 저절로 신력으로 치환되어, 지끈거렸던 두통을 싹 씻어 내렸다.

『그런데 무슨 일 있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지금만 해도 마력장에 이상이 커 보여서 달려온 거였다만.』

발데비히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발데비히.”

『왜 그러나?』

“내가 부재중인 동안에도 성역 관리를 잘한 것 같은데. 앞으로도 계속 여길 맡겨도 되겠지?”

연우는 이제 여러 신전 등을 통해 성역 각지의 상황을 손바닥 보듯이 아주 간단하게 살필 수 있었다.

성역의 변화는 신전 건설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허물어졌던 옛 거인족의 유적지가 복구되어 제 모습과 기능을 찾아가고 있었고, 스테이지를 거의 뒤덮다시피 하던 수풀도 개간되어 곳곳에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원래 반거인들이 머물던 마을은 아주 큰 규모로 증축되어 대장간이나 저장고 등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섰고, 더불어 각 집들에도 이전과 다른 ‘생기’가 느껴졌다.

발데비히가 다른 거인들과 힘을 합쳐 성역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뜻.

조상들부터 자신들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그들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살기 좋게 가꾼 것이다.

그러니 굳이 타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발데비히는 연우의 말에 살짝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곧 단단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만 준다면.』

“믿지.”

쿵!

발데비히는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신이자 왕인 존재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까.

“그럼 여길 부탁하지. 나는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연우는 외부 층계로 향하는 푸른 포탈을 열었다.

“그리고 층계 공략도 틈틈이 해 둬. 언제 77층으로 갈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발데비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61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채널링으로 확인해 본 결과, 현재 라퓨타가 있는 곳은 66층.

연우는 우선 도일을 만나 시의 바다와 관련된 대책을 논의할 생각이었다.

‘브라함도 만나야 하고.’

화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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