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41화 (541/862)

16화. 또 다른 후예 (6)

[이곳은 66층, ‘폐(廢)도시의 관’입니다.]

[시련: 이곳은 한때 극도로 발달한 마도공학을 바탕으로 눈부신 번영을 누렸지만, 지금은 몰락하고 만 어느 제국, 제도(帝都)의 구(舊)도심입니다.

도저히 근원을 밝힐 수 없었던 역병은 3분의 1도 넘는 인구의 목숨을 앗아 갔고, 이상 기후로 인한 흉작은 겨우 남은 백성들을 빈곤과 기아의 늪으로 빠뜨려 아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국의 황실은 백성들을 구제하기는커녕 곳간을 걸어 잠그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더 많은 세금을 거뒀으니, 결국 이를 참지 못한 백성들의 반란으로 제국의 국운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수명을 완전히 끊어 놓은 것은 오랫동안 제국을 질시해 왔던 이종족들의 침략이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을 노예로 부려 온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백만 명도 넘는 인구를 자랑했던 제도는 완전히 몰락해 인기척 하나 찾기 힘든 폐허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집단 피난 중에 황실과 백성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곳곳에 남아 있어, 이따금 트레저 헌터들이 고대 제국의 유산을 노리고 방문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리 속에 바로 당신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폐도시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모아 하나의 유산을 완성하세요.

그렇게 완성된 유산은 탑을 계속 오르고자 하는 당신에게 아주 유용한 친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냥 이것만 보면 정말 공략하기 쉬운 곳으로 보이는데.”

도일은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설명창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우가 부재중인 동안에도 아르티야의 층계 장악은 착실하게 이루어져, 지금은 거의 60층대 후반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이제는 사실상 탑 내에서 아르티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전무한 상황. 화이트 드래곤도 수장인 왈츠가 도일에게 패배를 겪으면서 기세가 크게 꺾여 그 뒤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르티야가 새로이 탑의 패권을 쥐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야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힌 상태였다.

바로 이곳, 66층 때문이었다.

아르티야는 사실 다른 거대 클랜에 비해 조금 특이한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이 랭커들이 주로 수뇌부를 구성하고 있는 거대 클랜들은 대개 70층대까지 어느 정도 진입이 자유로웠다. 그들이 한창 도전자로 활동하던 시절에 미리 개척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아르티야는 수뇌부가 가진 실력에 비해 개척한 층계가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소속원들 사이에는 ‘층계 장악=수뇌부의 층계 공략’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말은 클랜의 전력을 집중한다면 수뇌부의 층계 공략이 손쉬워지지만, 반대로 수뇌부가 공략하는 데에 차질이 생기면 층계 장악도 덩달아 멈춰 버린다는 뜻이었다.

현재가 딱 바로 그런 상태였다.

66층의 시련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폐도시 곳곳에 배치된 히든 피스들을 조합해 어떤 유용한 아티팩트를 완성시키는 것.

비교적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절대 쉽지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우선 ‘역병’으로 제국이 멸망했다는 내용처럼, 도시 내에는 갖가지 질병과 저주가 만연해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히든 피스를 얻는 과정에서 어떤 트랩이 발동할지도 몰랐고, 정도에 따라 서는 자잘한 퀘스트가 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전란’도 문제였다. 제국에 원한을 품은 이종족이 있다는 설명대로, 지성을 보유한 갖가지 상위 몬스터들이 곳곳을 활보하는 까닭에 녀석들과 다투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이따금 녀석들의 무리라도 맞닥뜨리면 물러서야 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히든 피스들을 모아도, ‘유용한’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갖가지 히든 피스들의 쓰임새를 파악할 줄 알아야만 하니, 그만큼 해박한 마법적 지식도 필요로 했다. 조합을 위해서는 공학적 지식도 추가로 필요했고.

그렇다고 해서 그저 그런 아티팩트를 만들 수도 없지 않은가.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 절대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이렇다 보니 66층은 60층대에서 공략에 가장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소로 꼽히는 편이었다.

물론, 그것도 사람에 따라서 달랐다.

사실 도일은 이미 66층의 시련을 전부 끝낸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칸 형과 판트 형이…… 복병이란 말이지.’

선술에 능해서 마도공학도 금세 통달할 줄 알았던 칸은 의외로 이런 분야에 취약했다. 선술은 무술에 바로바로 녹일 수 있지만, 마도공학은 그게 아니라나? 도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덕분에 칸은 한참 동안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머리를 쥐어 싸매는 중이었다.

그리고 판트는 그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다.

‘내 살다 살다 그런 빡대가리…… 아니지. 그래도 카인 형의 의제인데 그렇게 말하면 실례겠지?’

도일은 판트를 떠올리자마자 울컥하고 치밀어 오른 울화를 억지로 꾹 눌렀다.

사실 연우를 대신해 아르티야를 지휘하는 입장에서, 그동안 판트 때문에 고생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화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수뇌부의 지휘 따윈 전부 가볍게 씹어 먹고, 자신이 날뛰고 싶은 대로 날뛰다가 망친 작전이 몇 개고 계획이 또 몇 개던가.

강한 놈이 있으면 일단 싸워서 이겨야 하고, 성이 나면 풀릴 때까지 깽판을 쳐 대니.

덕분에 아르티야 내 많은 이들이 판트와 함께 이동하는 것을 꺼려 했다.

그나마 동생인 에도라는 낫긴 했지만…… 그녀는 연우에게 살가운 태도와 다르게, 다른 이들에게는 언제나 차갑고 도도했다. ‘마희(魔姬)’라는 별칭은 어디 가지 않는 것이다.

한때 튜토리얼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청람가 남매는 여기서도 여전했다.

여하튼 이후에 전부 다 좋은 결과가 나왔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내홍이 적잖게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던 차에 판트가 66층의 벽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물론, 도일의 혼잣말처럼 판도가 정말 멍청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만한 성취를 이루지도 못했을 테니.

문제는 편식이 너무 심하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인 무공을 제외하면 아예 까막눈이니, 마도공학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쑤셔 넣어도 성취가 전무할 수밖에.

더구나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때려 부수는 취미인 판트에게 너무 맞지 않기도 했다.

‘무엇보다…… 둘 다 사이가 너무 안 좋아.’

칸과 판트는 툭 하면 서로 마주칠 때마다 으르렁거리기 바쁘니.

칸은 튜토리얼 때부터 가지고 있던 라이벌 의식 때문에 판트를 경계하고, 판트는 그간 별 신경도 쓰지 않던 놈이 계속 날을 세우니 짜증이 나 으르렁대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도일로서는 한숨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둘을 여기 다 던져두고 가고 싶지만, 클랜 내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마 둘 다 지금쯤 저기 어딘가에서 삽질하며 헛고생이나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디 또 이상한 경쟁심이라도 붙은 건 아닐는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쿠쿠쿠!

“응?”

도일은 갑자기 스테이지를 뒤흔드는 거친 지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밖을 보니, 저 멀리서부터 수십 미터도 넘을 듯한 거대한 먼지 폭풍이 이쪽으로 불어닥치면서 폐도시를 먹어 치워 가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혹시 칸과 판트가 또 싸움이라도 한판 붙은 건가 싶었지만.

『아아악! 이건 또 뭐야!』

『내 퍼즐이! 일주일 동안 개고생해서 맞춘 내 퍼즐이……! 누구야! 썅! 누구냐고!』

둘과 연결된 클랜 페어링에서는 오히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질러 대는 비명만이 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정도’를 알아서 스테이지를 이렇게 망가뜨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도일은 자신과 연결된 채널링이 점차 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아악!

그러다 폐도시를 뒤덮다시피 했던 모래 해일이 라퓨타도 완전히 덮치고 지나갔을 때.

도일은 소매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해 댔다. 폭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 뒤였다. 마법으로 뿌연 먼지를 치우고 나니, 연우가 서 있었다.

“콜록콜록! 역시…… 형이네요.”

“음? 내가 온다고 말했던가?”

연우는 별반 놀라지 않고 인사하는 도일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도일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있는 자리에는 항상 남아나는 게 없잖아요?”

“…….”

연우는 순간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좋은 의미인 걸까, 아니면 나쁜 의미인 걸까.

굳이 알아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아, 연우는 짐짓 모른 척 헛기침을 하면서 화제를 재빨리 돌렸다.

“흠흠! 그보다 전에 부탁했던 건?”

“시의 바다,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도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형의 지시대로 총력을 기울여서 찾고는 있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나오질 않아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 꼭꼭 숨어 있는 건지. 일부를 밝혀내도 대개 점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뿌리까지 파내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어요.”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쉽게 종적이 밝혀질 것 같았으면, 그동안 탑 내에서 그런 위상을 갖추지는 못했겠지.

무엇보다 수장으로 용종이 앉아 있다.

아르티야 이전에 레드 드래곤이 가졌던 영향력을 떠올려 본다면, 시의 바다도 그에 못지않거나 훨씬 강한 저력을 품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들 중 일부가 우리 클랜에 잠입해 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 중에?”

“네. 다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꽤 깊숙하게 들어온 것 같아요.”

“의심 가는 자는?”

“확인 중에 있어요.”

“그렇단 말이지?”

연우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저 말인즉, 시의 바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주시해 왔단 뜻이 아닌가.

‘달의 아이…… 그 녀석도 나를 진즉에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고.’

“그런데 시의 바다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찾으세요?”

“아무래도 우리가 탑을 차지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네?”

기존의 8대 클랜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는 아르티야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도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연우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몸을 돌렸다.

‘브라함을 만나야겠어.’

휙-

연우는 탑 외 지역으로 향하는 포탈을 재차 열며 그쪽으로 이동했다.

* * *

연우가 사라지고, 잠시 후.

“카인! 카인, 이 새끼 어딨어! 이제야 겨우 완성되려던 거, 먼지가 들어가서 엉망이 되고 말았잖아! 이거 어떻게 할 거냐고오!”

칸이 씩씩거리면서 라퓨타에 등장했다.

풉.

도일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오고 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쓴 칸의 모습이 영락없이 먼지 구덩이에 빠진 생쥐 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콰앙!

하늘에서부터 무언가가 라퓨타를 통째로 부술 기세로 뚝 떨어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아아악! 이런 빌어먹을 형님이, 진짜! 어디 있어! 나오쇼, 당장!”

판트도 칸에 못지않게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 역시 꾀죄죄한 걸 보니 연우가 일으킨 모래 해일 때문에 적잖게 피해를 본 모양이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도중에 마주쳤다.

“뭘 꼬나 봐?”

“내가 먼저 왔다만, 곰탱아.”

“흥! 너무 하찮아서 보여야 말이지.”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서 눈깔 신경에 이상이라도 생겼나 보네. 괜찮은 의사라도 소개시켜 줘?”

“뭐, 새꺄?”

칸과 판트는 서로를 보면서 으르렁거리기 바빴다.

쿠쿠쿠-

파직, 파지직!

둘의 기세도 같이 끓어오르면서 허공에서 연달아 부딪쳤다.

이대로 둔다면 라퓨타가 저들의 싸움에 휘말릴 것 같아, 도일이 재빨리 소리쳤다.

“카인 형 찾는 거라면, 브라함에게 간다고 했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팟!

파밧-

칸과 판트는 꾀죄죄한 몰골 그대로 포탈을 타고 사라졌다.

“둘 다 언제 철들려고. 에휴.”

도일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뒤통수~ 뒤통수~ 신나는 노래~♪”

세샤는 아난타가 누워 있는 침상에 등을 기댄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도화지에다 그림을 그렸다. 집과 정원과 해가 함께 그려진 그림. 그 속에는 자신과 브라함, 아난타와 연우가 같이 웃고 있었다.

브라함은 맞은편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조용히 책을 보고 있다 말고, 처음 들어 보는 멜로디에 책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그것참 괴이한 노래구나. 그 노래는 또 어디서 배운 것이냐?”

“샤논 삼촌한테서요!”

“샤논?”

일전에 연우가 잠깐 마을에 찾아왔을 때, 영괴들을 보여 달라는 세샤의 요청에 어쩔 수 없이 권속들을 보여 준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때 샤논과 어울리면서 배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필 배워도 저런 노래를…….’

브라함은 나중에 샤논을 만나거든 크게 한 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책자 쪽으로 눈을 가져가려 했다.

그 순간.

쿠쿠쿠!

“정말이야? 진짜지?”

“그렇다니까!”

“순서 놓치면 안 돼! 조금이라도 늦으면 엿 된다고! 서둘러!”

“가자아아!”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외뿔부족 마을은 정해진 구역을 제외하면 대개 조용한 편이기 때문에, 브라함은 무슨 일인가 싶어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능선 위로, 폭음과 함께 거친 모래 기둥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자잘한 여진도 뒤따랐다.

어느새 세샤도 창가로 쪼르르 달려가 가만히 바깥을 살피더니 갑자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삼촌! 삼촌이 왔나 봐요! 외뿔부족 아저씨들이 막 막 그쪽으로 달려가요!”

부족원들에게 연우는 언젠가 한 번쯤 대련을 하고픈 인기 많은 맛집이었다.

그리고 연우가 있는 곳엔 항상 큰 난리가 벌어진다는 걸, 세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 그거참.”

이걸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고.

브라함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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