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42화 (542/862)

17화. 또 다른 후예 (7)

브라함은 맞은편에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앉은 연우를 보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나? 표정이 너무 안 좋군.”

사실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연우의 표정이라, 골리려 그런 거지.

연우도 그런 브라함의 생각을 읽고 눈살을 좁혔지만, 여기서 따져 봤자 뭐 하겠냐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른 화 때문에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진지하게 외뿔부족이라는 족속들을 다 회 쳐 버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허허, 참!”

브라함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왠지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연우가 마을에 간만에 등장했다는 소문이 돈 이후, 부족원들은 너도나도 하던 일을 전부 내팽개치고 연우에게로 달려들었다.

딱 한 판만 겨뤄 보자고.

그동안 무왕이 계속 연우를 독차지했으니, 이번에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다짜고짜 선공부터 취했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 족히 기백 명은 된다는 점이었다.

그냥 브라함을 만나러 왔던 연우로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무시할 수만도 없는 것이, 도전장을 던진 이들이 하나같이 제법 실력이 뛰어난 놈들뿐이라 허투루 상대해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하나씩 두들겨 패서 내쫓으려 들면.

-으하하! 그래! 이거지, 이거고 말고!

왠지 몰라도, 녀석들은 이상하게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더 때려 줘, 더! 더!

-하악! 하악! 날 좀 더 가혹하게 대해 줘! 그래, 그거야!

죽도록 다시 달려들었다. 내쫓으면 내쫓을수록 정도가 심해져 나중에는 변태처럼 입가에 침까지 줄줄 흘려 댈 정도였으니. 그 광기가 너무 오싹한 나머지 연우는 공포마저 느낄 정도였다.

결국 연우는 꼬박 하루를 부족원들과 씨름하는 데에 써야만 했고.

-험험! 우리도 있는데 말이야.

-늙은이들과도 어울려 주지 않겠나?

그 뒤에는 분명히 은퇴했다던 장로며 원로들까지 헛기침을 하면서 찾아와, 연우는 눈동자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꺼멓게 죽은 연우의 눈 밑엔 피로가 가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과 악마들을 멋대로 희롱하고, 심연까지 깊게 파고들었을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지닌 그였지만.

어쩐지 외뿔부족 마을에 올 때면 이상하게 힘이 쭉쭉 빨리는 기분이었다.

하!

연우는 깊게 탄식을 흘리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상한 곳에서 발목이 붙잡히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여기에 찾아온 이유는 브라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인데. 어서 말해 보게.”

“아난타와 관련된 것입니다.”

딱!

순간, 브라함이 손가락을 튕겨 자신들이 있는 공간을 재빨리 외부와 유리시켰다.

온전히 둘만 있을 수 있도록 세샤마저 잠시 밖에서 놀게 했다지만, 그래도 만전을 기해 완전히 그들이 있는 공간을 독립시킨 것이다.

브라함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아난타는 갑자기 왜?”

“페어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지만, 직접 대면해서 여쭙는 게 좋겠다 싶어서 온 겁니다.”

“대체 뭐길래 그러는가? 질질 끌지 말고 말해 보게!”

브라함의 언성은 평소와 다르게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아난타의 어머니가 누군지 알 수 있겠습니까?”

브라함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녀는 갑자기 왜?”

“정말 중요한 사안입니다.”

연우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몇 년에 걸쳐 심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으나, 달의 아이 때문에 가로막혀야만 했던 일.

“자네는 그 달의 아이란 존재가, 아난타의 어미라고 보는가?”

“그 가능성을 확인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녀와 내가 만난 것이 용살대전 이후인 건 맞네. 그녀가 이스메니오스와 함께 최후로 남은 용이었던 것도 사실이고.”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다는 건, 여름여왕의 쌍둥이가 브라함의 처였단 뜻이지 않은가?

“자기 자매와 다르게 외부로 나서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오랫동안 존재를 숨겼던 것도 사실이지. 지배를 추구했던 이스메니오스와 다르게, 그녀는 탐구를 좇았으니까. 세상사에 무관심해지던 나와 손을 잡은 것도 그때였어.”

브라함의 목소리는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어. 그 빌어먹을 올포원이 남긴 저주 때문에! 그런데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 하는가!”

아난타와 그 어미에게 한평생 죄책감을 지니고 살았던 브라함에게 있어, 그녀와 관련된 것을 건드리는 건 금기나 다름없었다.

지금 연우가 하는 말은 아난타의 생모가 자식을 버린 파렴치한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였으니. 자식과 손녀가 위기에 빠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것을 방관하면서 다른 일을 했단 뜻이 아닌가!

비록 처음엔 그녀와 지적인 유희를 위해 만났다지만, 그것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히 감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이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연우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난타의 생모가 돌아가신 걸 직접 보신 건 아니잖습니까?”

“자네 끝까지……!”

브라함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우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털썩-

브라함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굳은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자네…… 이미 그걸 진실처럼 생각하고 있군.”

“시험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혹시 그분이 남긴 유품 같은 것, 있습니까?”

사자 소환 스킬을 사용하자는 의미였다.

브라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에겐 없네. 아난타는 뭔가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어디에 숨겼는지 모르고.”

연우가 잠깐 고민에 잠기려는데.

브라함이 뒤늦게 뭔가를 떠올렸다.

“아. 그녀가 묻힌 곳은 알고 있어. 생전에 레어이자 던전으로 쓰던 곳이라 확실해.”

“일단 그곳으로 가보죠.”

“자네……. 알겠네. 그러지.”

브라함은 이렇게 된 이상, 연우에게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연우의 권능을 사용해서라도, 오래전에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그녀와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두 사람은 포탈을 타고, 어느 이름 모를 던전에 입장했다.

[이곳은 히든 스테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던전’입니다.]

[주의! 초월적인 존재의 숨결이 묻어 있는 장소입니다. 어떤 저주와 함정이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여길세.”

그곳은 수천 명도 족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 공동을 따라, 여러 책자와 실험 도구들이 가득한 어느 실험실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작은 묘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소식을 알려 준 이는 천계에 몇 남지 않은 내 친구 중 한 명일세. 그가 거짓을 말해 주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아.”

연우는 잠시 턱을 짚으면서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다가, 책자 하나를 뽑으면서 권능을 발동시켰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그분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르모니아일세.”

연우가 힘 있게 말했다.

“하르모니아.”

그 순간.

[소환하신 대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뭐……?”

브라함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

하지만 연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곧장 마장대검을 뽑아 무덤 쪽으로 세게 휘둘렀다.

쾅!

거친 폭음과 함께 무덤이 날아갔다.

그 안쪽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석실이었다.

“역시 없군요.”

“……!”

“하르모니아가 달의 아이라는 것, 모르고 계셨습니까?”

“어떻게…… 이런……?”

브라함은 배신감에 크게 몸을 떨었다.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연우는 사실 그게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시의 바다는 뻐꾸기처럼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의 둥지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다른 새끼들을 전부 내치고 그 둥지를 독차지하는 녀석들이다. 그런 곳의 수장이 자기 주변이라고 해서 정체를 밝히고 다녔을까.

“……그녀를 찾는 것, 혹시 내게 맡겨 주겠나?”

기나긴 침묵 끝에.

브라함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두 눈은 배신감에 젖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짚이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건…… 그건 내가 직접 찾아보고 말해 주지. 부탁함세.”

누구보다 달의 아이의 소재를 찾고 싶은 건 연우였다.

하지만 연우는 브라함의 눈을 보고 있노라니 차마 같이하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가 받은 충격은 얼마나 클 것인가.

결국 연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고맙네. 세샤에게는 비밀로 해 주고.”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브라함은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전성기 시절은 아니더라도, 자네 덕에 격을 되찾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 브라흐마가 어째서 ‘데바’를 다스리는 3주신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는지, 내게서 기원한 수많은 아바타라들이 어떻게 그 많은 구원의 업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지.”

* * *

연우는 홀로 다시 마을로 돌아와야만 했다. 브라함이 곧장 다른 어딘가로 이동해 버린 탓이었다.

연우는 그를 조용히 쫓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브라함이 너무 절실해 보이는 나머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한때 천계를 통치하던 브라흐마. 비록 당시에 비해 쇠락했을지언정, 그 존재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달의 아이라 하더라도 브라함이 진지하게 나선다면 쉽진 않을 테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브라함은 브라함대로 달의 아이를 쫓고, 자신은 자신대로 달의 아이를 쫓을 필요가 있었다.

다만, 세샤에게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어 잠깐 고심에 잠기는데.

“음?”

연우는 브라함의 집으로 돌아온 순간, 조명이 전부 꺼진 어둠 속에서 자신을 서늘하게 노려보는 칸과 판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둘이 왜 같이 있는 거지? 못 보던 사이에 갑자기 사이가 좋아지기라도 했나?

그렇게 의문이 든 순간.

“이 개새끼!”

“형님의 자리, 내가 다시 가져가야겠수다!”

별안간 칸과 판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들었다.

칸은 블러디 소드를 뽑으면서 갖가지 선술을 뿌리고, 판트는 혈뢰를 잔뜩 일으키면서 연우를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

연우는 이것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지만.

‘반란은 봐줄 수 없는 중죄지.’

그래서 주먹을 들었다.

퍽!

퍽!

* * *

“……젠장!”

“……끔찍한 양반 같으니. 거기서 어떻게 더 강해질 수가 있는 거지?”

칸과 판트는 나란히 앉아서 계란으로 눈두덩이를 문대며 불만에 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연우의 눈에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지만.

자기들 퀘스트를 깨는 데 방해를 했다고 클랜장에게 반기를 들어?

‘어떻게 된 게 내 주변에는 이런 놈들만 계속 꼬이는 건지.’

연우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어 자꾸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자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잘되었어. 마침 둘에게 부탁할 게 있었는데.”

“또 뭐?”

“언제는 층계 공략에 집중하라고 하지 않았수?”

연우는 비딱한 자세를 보이는 두 사람에게 말없이 주먹을 들어 보였다.

“험험! 우리 클랜장께서 직접 내리시는 지시 사항인데 당연히 따라야지. 뭘 할깝쇼? 하명만 하십시오.”

“이 판트야말로, 우리 형님의 든든한 오른팔 아니겠수? 뭐든 시켜만 주시오. 내 몇 놈의 대가리라도 뜯어다가 바칠 테니. 하하!”

연우는 아주 뻔뻔하게 태세를 변환하는 두 사람을 기가 차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둘은 전혀 거리낄 것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 원래 이런 놈들이었지. 이제는 헛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연우의 말도 결코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반란을 일으켜.”

“……응?”

“그게 무슨 소리유? 뭐 그새 잘못 자셨어?”

당연히 그게 무슨 생뚱맞은 말이냐는 질문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클랜 내에 세작들이 있는 것 같다. 놈들을 솎아 낼 생각이야.”

연우는 아르티야 내에 잠입해 있다는 시의 바다를 축출하기 위한 계획을 설명했다.

“확실히 그런 거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재미도 있겠고. 사실 그동안 어중이떠중이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한번 걸러 내야겠다 싶었어.”

“하지만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려면 명분이 필요한데. 그만한 게 있겠수? 형님과 우리 사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판트의 말에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튜토리얼 때부터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이미 탑 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물론, 연우가 그만한 걸 생각해 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내게 불만이 있는 것으로 비쳐야지.”

“과연.”

“그리고 주먹질만큼 확실한 불만 거리도 없을 테고.”

“응?”

“……음?”

칸과 판트는 옳다며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도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그러다 사악하게 웃으며 다시 주먹을 말아 쥐는 연우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

“어허! 문명인이면 문명인답게 말로 합시다! 왜 꼭 주먹이어야……!”

“내 맘이야.”

이건 적들을 낚기 위한 연기일 뿐. 절대 자신에게 반기를 든 것에 아직도 꽁해 있어서 아니었다.

절대!

콰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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