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또 다른 후예 (8)
연우는 칸, 판트와 모든 논의를 끝마친 뒤, 세샤와 가볍게 놀다가 밤중에야 마을을 천천히 나왔다.
물론, 부족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빌어먹을 녀석들이 눈치챈다면 또 대련을 하자면서 귀찮게 굴 게 뻔했으니까. 결계 때문에 외부로 즉각 연결되는 포탈 설치가 되지 않는 게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다.
연우는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자기도 모르게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에서 무언가 찝찝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암살 계획.’
페이스리스를 비롯한 놈들이 어딘가에서 획책하고 있다는 계획.
사실 생각해 보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아르티야에게 영역권이 낭떠러지까지 밀리고 밀린 나머지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는 꼬락서니가 아닌가.
아무리 많은 녀석들을 가져다 놓더라도, 무왕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만큼 무왕은 강했으니까.
천계를 아무리 뒤져도 그와 견줄 만한 존재는 거의 없을 거라고, 있더라도 몇 없을 거라고 연우는 장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까지 강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스승님을 얼마나 따라잡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니까.’
디디고 있는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무왕이 닿은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무왕에게 닿기 전에 외뿔부족이라도 뚫을 수 있으면 다행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창공 도서관에서 녀석들과 관련된 것을 봤을 때도, 도일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고했을 때에도 별 대수롭지 않게 치부했던 것이다.
다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찝찝한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페이스리스.
검무신의 영혼을 지니고 있는 녀석이 무왕이 얼마나 강한지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런 짓을 꾸민다는 게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있다고 해도, 무왕을 위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남아 있는 찝찝함은 대체 무엇인지.
“영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연우는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영매에게 물었다.
그녀는 한자리에 앉아 스테이지를 전부 내려다본다지 않는가. 그리고 그 눈은 미래시(未來視)까지 일부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모를 리가 없었다.
『당연하지. 우리 그이와 관련된 건데 내가 체크를 하지 않고 있으려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암살이라는 것은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에나 성공하는 것이지,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살펴보고 있다면 절대 질 리가 없었다.
연우는 그제야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마을을 떠날 수 있었다.
* * *
『역시 귀엽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자기 스승 걱정도 다 하고. 우리 사윗감으로 딱이야, 그렇지?』
무왕은 가부좌를 튼 채로 명상에 잠기다 말고, 갑자기 귓가를 파고든 영매의 목소리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귀엽긴, 개뿔! 제 스승의 낯짝을 언제 후려칠 수 있을지 고민부터 하는 놈을 두고.”
『그런 자세가 마음에 든 거 아니었어?』
무왕은 피식 웃었다. 따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영매는 그것이 긍정적 의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우를 만나기 전 두 명의 제자를 뒀고, 그 제자들을 모두 파문시킨 전적이 있던 그이지 않은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기대에 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연우는 아직까지 그냥 두고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니, 그것보다 훨씬 잘 따라오고 있었다.
오성, 투지, 열의, 갈망, 호승심, 복수심, 지배욕. 그리고…… 인성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구석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말해 주지 않아도 되겠어?』
“됐어. 할 일도 많은 놈인데, 무엇 하러 신경 쓰게 해. 점괘가 다 맞는 것도 아니고.”
-필(必), 멸(滅)
“반드시 죽는다라…….”
그 제자가 어디까지 다다를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방금 전 뽑은 점괘를 보면서.
쯧!
무왕은 가볍게 혀를 찼다.
* * *
언제부턴가 탑 내에는 해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칸과 판트가 각자 파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야는 사실 따지고 보면 기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클랜 마스터인 연우와 측근으로 구성된 소수 정예가 중심축을 이루고, 그 아래에 여러 개의 산하 조직들이 가지처럼 이어지는 형태였으니.
즉, 중심축이 가장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다른 거대 클랜들과 다르게, 이곳은 몇 명 되지 않은 이들이 다수를 다스리는 과두 체제를 띠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본 클랜에 소속된 인원 중 가장 외부 활동이 활발한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칸과 판트였다.
둘 모두 아르티야가 탑의 지배권을 공고히 할 수 있게끔 맹활약을 보인 까닭이었다.
당연히 그런 두 사람에게 선을 대어 보고자 하는 산하 조직이나 플레이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칸은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고, 판트는 약자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갖고 있어, 그동안 이렇다 할 파벌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칸은 외부 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내부적으로 여러 인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산하 조직의 클랜장들을 사적으로 만나 친분을 다지고, 여러 랭커들과 자주 어울리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칸을 중심으로 서서히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하나의 파벌이 저절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안에는 주로 여러 방면의 유력자들이 많았다.
반면에 판트는 여러 부대를 이끌고 각 층계의 주요 던전들을 함께 돌면서 그들과 조금씩 교류를 가졌다.
남을 깔보는 오만한 태도는 여전했지만, 오히려 그런 마초적인 모습에 열광하는 추종자들이 많아져 그를 주군처럼 따랐다.
그러니.
점차 아르티야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칸과 가까운 이들에게는 ‘매 파’, 패도적인 성향의 판트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범 파’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임의적인 구분일 뿐, 실제로 자로 딱 잰 듯이 나눠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칸과 판트의 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화이트 드래곤에 대한 토벌 안건을 논의하던 중, 둘의 의견이 좀처럼 맞질 않아 끝내 칼부림까지 일어나고 만 것이다.
다행히 도일이 나서서 싸움은 크게 번지지 않았지만.
둘은 더 이상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면서 등을 돌리고 말았다.
가뜩이나 성정이 맞질 않던 두 사람인지라, 언제 다툴지 몰라 우려를 표시하던 이들로서는 화약이 터진 것처럼 보였다.
이렇다 보니.
파벌 간의 신경전도 덩달아 커져 경계선이 또렷해지고 말았다.
* * *
언제부턴가.
칸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측근들이 있을 때, 속내를 털어놓는 척하면서 아르티야에 대한 불만을 간간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판트야말로 안하무인에 개새끼겠죠. 사실 따지고 보면, 세상 물정 모르고 제 아비의 위세만 등에 업은 채로 날뛰는 천둥벌거숭이가 아닙니까?”
“클랜 마스터는 언제부턴가 아예 보이지도 않고…… 이건 좀 너무한 것 같기도 하오.”
“지금의 아르티야는 좀 과하게 비대하긴 해. 어중이떠중이들이 너무 많이 몰려 있으니까. 적당히 솎아 낼 필요도 있고, 정리할 필요가 있어.”
“마스터의 인성? 두말하면 뭐 하겠나. 더럽지.”
처음에는 누가 들을까 싶어 기겁해 하던 사람들도, 계속 칸의 불만 어린 모습을 보다 보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우가 주는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나,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 * *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무렵부터.
물밑으로 칸에게 이상한 제의가 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시지요.”
다양한 뇌물부터.
“이번 층계의 이권에 대해 논의를…….”
사소한 청탁까지.
그리고.
그중에는…… 아르티야의 기밀에 해당하는 것들도 있었으니.
칸은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뒤로는 조금씩 정보를 흘렸다. 개중에는 저항 세력의 토벌과 관련된 계획들도 있어, 이따금 토벌 작전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클랜원들 중 다수는 언제부턴가 칸이 변했다면서 위험한 게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워낙에 그가 가진 입지가 굳건해 차마 강하게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또한.
은밀한 제안도 불쑥 찾아왔다.
“음?”
칸은 야밤에 홀로 집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불현듯 찾아온 느낌에 재빨리 블러디 소드를 뽑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턱 밑으로 그림자 칼날이 다가왔다.
여차하면 바로 싸우겠다는 표시.
‘강자!’
칸은 상대가 경시 못 할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굳혔다.
“뭐냐, 넌?”
단순히 암살을 하러 온 것이라면 여기서 공격을 그치지 않았겠지.
『역시 듣던 대로 생각이 깊은 분이시군요. 판트가 아닌 당신을 찾아온 게 정답인 모양입니다.』
그림자 칼날의 주인은 무기를 거두면서 고개를 숙였다.
『저는 크란치아 상맹(商盟)이란 곳에서 온 나크라고 합니다.』
“상맹이라고?”
칸은 코웃음을 쳤다.
야밤에 불쑥 찾아오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녀석이 상인이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지 않을 소리였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가 상맹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좋아. 상인 나부랭이면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 왔을 텐데. 뭘 거래하고 싶은 거지?”
『혈검님으로부터 정보를 사고 싶습니다.』
“정보?”
『예. 아르티야의 마스터, 영왕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합니다.』
칸이 인상을 굳혔다.
“그 성깔 더러운 놈의 정보는 왜? 바깥 활동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성깔 더러운 놈. 클랜 마스터에 대한 표현치고는 너무 신랄하다. 그 말에 복면인은 의외라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역시 소문대로 영왕에 대한 칸의 불만이 꽤 많은 걸까.
『그래서 더더욱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분의 움직임에 따라 향후 정세가 바뀔 것이니, 분명히 은둔하고 계시는 동안 무언가를 준비 중일 것이라 저희는 예측하고 있습니다. 해서 저희 상맹은 아주 조금이나마 영왕의 움직임을 알고자 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안 되겠는데.”
『후! 역시나 저희를 경계하시는군요. 그럼…….』
“아니. 나도 그러고 싶어.”
『음?』
복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무슨 소린가?
“그런데 그 성깔 더러운 놈이 이걸 다 보고 있어서 말이지.”
그 순간, 복면인이 흠칫 놀라 품에 있던 포탈 스크롤을 찢으려 했지만.
『컥!』
별안간 자신의 그림자가 송곳처럼 솟구치더니 등뼈를 부수고 가슴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보면서 칸이 웃고 있었다.
복면인은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이게 전부 무언가를 꾸미려는 칸의 연기라는 것을.
푸확!
하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림자가 재차 움직이면서 머리를 날린 것이다.
그리고 그림자 위로 연우가 나타나며 막 육신을 벗어나려는 복면인의 영혼을 도중에 가로챘다.
끼아아!
「아악! 아아악!」
연우는 권능 연옥로를 점화하여 복면인의 영혼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녀석이 고통에 이리저리 몸부림치면서 갖가지 사념들을 뱉어 내다, 끝내 한낱 망령으로 전락해 소울 컬렉션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어때?”
칸의 질문에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칸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번에도 맹탕인가. 쩝!”
기실 연우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반란 계획은, 사실 칸과 판트가 내분을 일으키는 척하면서 시의 바다가 그들에게 접근하도록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들이라면 이권보다 연우에 대한 관심이 많을 테니, 이런 식으로 걸려드는 놈들을 열심히 족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시의 바다는 좀처럼 대가리를 치켜드는 경우가 없었다.
오히려 뜻하지 않은 소득이라면, 간간이 아르티야의 종주권에 불만을 가지거나, 아르티야를 등에 업고 되도 않는 짓거리를 저지르는 이들이 걸러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중에는 아르티야의 정보망을 피한 채 만들어진 결사 조직도 더러 섞여 있었다.
이미 그들의 명단은 도일이 따로 블랙리스트에 올려 둔 채, 때가 되면 한꺼번에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해야 할 일이 많은 연우로서는 시간을 크게 잡아먹는 일이라,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 칸.”
“응?”
“성깔 더러운 놈이라고?”
“에이. 그거야 저놈을 속이려고 그런 거지.”
칸은 그렇게 말하면서 기다렸다는 듯 포탈 스크롤을 사용해 자리를 훌쩍 벗어났다.
자리에 홀로 남은 연우만이 살짝 미간을 찌푸릴 따름이었다.
* * *
‘일단은 더 지켜봐야겠지.’
시의 바다는 아주 깊숙하게 잠겨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놈을 단시간에 잡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연우는 마음이 조급하더라도 차분하게 일은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타르타로스 탈환.’
저 밑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올림포스의 신들을 구하러 가야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