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탈환 (2)
연우는 기가 차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저놈은 또 왜?’
아가레스야 원래 그렇다 치더라도, 펜리르는 굳이 올 필요가 없지 않나?
사실 연우로서는 펜리르가 왜 자신에게 저렇게 계속 호의를 베푸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그나 그가 소속된 니플헤임과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으니까.
“저들은 왜……?”
“자네가 불렀나?”
이랑진군과 나타태자도 왜 저들이 나타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연우를 돌아봤다.
특히 이랑진군은 불쾌한 기색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별다른 언질도 없이 다른 동맹을 맺었다는 건 자신들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로 인해 향후 사회의 활동 반경에 제약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아냐. 저들이 자기 멋대로 온 거지.”
하지만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오해를 갖고 갈 필요는 없으니까.
“흠.”
결국 이랑진군은 미심쩍게나마 고개를 끄덕였고.
나타태자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악마들과 손을 잡고, 신의 사회에 대적한다? 이미 진영의 구분 경계가 모호해진 지 오래이지만, 그래도 꼰대들이 알게 되면 꽤나 난리를 치겠구만!”
나타태자는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가뜩이나 천교가 올림포스와 대적하려는 것을 보고, 같은 진영 내에서 왜 같은 신의 사회들끼리 그래야 하냐면서 말이 나오고 있던 차였는데.
이렇게 아가레스와 펜리르까지 더해지면 참 커다란 파란이 일어나겠다 싶었던 것이다.
‘계시록 때의 일을 두고 아직도 이런저런 말이 무성하기도 하니. 이로써 올포원에 대적하기 위한 천계의 연합은 또 한동안 거의 물 건너간 셈인가?’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한낱 인간이 천계의 움직임에 이렇게 급 격한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라고.
애당초 불신이 팽배한 세계에다 기름을 끼얹은 것으로도 모자라 불까지 지피려 드니.
나타태자로서도 올포원에 대적할 천계 연합의 구성에 찬성하던 입장이었으니 저절로 화가 날 법도 하지만.
그보다는 군신(軍神)으로서의 호승심이 더 강하게 활활 타올랐다.
연우가 지핀 불이 참 이렇게까지 크구나 싶은 것과 동시에, 이 모양새가 어디까지 커질 수가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펜리르는 등에 아가레스를 태운 채, 앙증맞은 다리를 놀리면서 이곳으로 달려왔다. 뭘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퍽 귀여운 모습이었다.
진짜 정체는 같은 악마도 갈아 대는 스토커와 신도 잡아먹는 괴물 늑대지만.
왕!
펜리르는 연우를 보더니 가볍게 짖었다. 꼬리가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아가레스도 팔짱을 끼면서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이 몸이 네놈을 돕고자 직접 이 땅에 다시 한번 현신을 하였노라. 그리 기뻐하지 않아도 된다. 이 몸이 네게 특별히 내리는 은총이니.』
그 모습이 연우로서는 더 기가 찰 뿐이었지만.
그렇기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냉정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내가 너희들과 거래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리고 굳이 지금 당장 다른 동맹 사회를 찾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가레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말하지 않았던가? 이 몸은 너를 그냥 돕고자 내려온 것이라고. 이미 메시지로 보지 않았더냐? 이 몸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의 몸. 이 몸의 것을 지키기 위해 몸소 나선다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연우는 더 이상 아가레스와 이야기를 나눠 봤자 시간 낭비라는 것을 깨닫고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상 이성적으로 아가레스의 행동을 판단하려 해 봤자 도움 될 건 하나도 없었으니.
대신에 펜리르를 돌아봤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는 눈빛. 설마 이 녀석도 아가레스처럼 대책 없이 굴고 있지는 않을 테니.
왕!
펜리르가 가볍게 짖었다.
아가레스는 여전히 펜리르의 등에 올라탄 채로 녀석을 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놈이 말하는군. 니플헤임에서는 너와 손을 잡고 싶노라고.』
연우는 이제는 저 둘의 조합도 이해할 수 없었다.
펜리르는 왜 굳이 진언을 쓰지 않고 짖기만 하고 있고, 아가레스는 왜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통역하고 있는 걸까?
“나와? 왜?”
왕왕!
『사적인 이유로는 자신의 막냇 동생인 헬이 너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 하고.』
헬은 죽음을 대변하는 악마. 때문에 연우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공적인 이유로는 네가 앉은뱅이 세 여신과 틀어졌기 때문이며. 큭!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참으로 속 시원했었어.』
16층에서 과거의 여신, 우르드와 척을 지게 된 것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중 미래를 점지한다는 여신, 스쿨드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군.』
“스쿨드의 예언?”
앉은뱅이 세 여신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있었나?
왕!
펜리르의 외침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아가레스의 두 눈이 깊게 착 가라앉았다.
『‘라그나로크가 그대와 함께하리라.’』
그 말에 연우도 도중에 다른 생각을 멈춰야만 했다.
라그나로크.
아스가르드와 니플헤임이 공존하는 신화에서 말하는, 세상의 종말에 있다는 대전쟁.
그것이 나와 함께한다?
연우는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세상의 종말.
그것은 곧 세상의 ‘죽음’이기도 하니, 칠흑과도 어떤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 뒤의 새로운 세기(世紀)에도 그대가 있으리라.’ 그렇게 말하는데?』
“……?”
하지만 이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새로움’이나 ‘시작’과 칠흑은 도무지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으니.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우르드가 처음 내게 집착했던 이유…… 앉은뱅이 세 여신이 모두 내게서 뭔가를 봤던 거야.’
그때는 아직 랭커 급의 힘도 온전히 갖추지 못했을 때인데도.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동안 머릿속에 잊고 있었던 일이 있었다.
처음 11층에서 라플라스를 만났을 때. 녀석은 어떤 악마의 전언을 전달한다며 말해 주었었다.
“그때 내게 우르드를 조심하라고 전언을 보냈던 악마가 너였나?”
왕왕!
펜리르가 해맑게 짖었다.
긍정의 뜻이었다.
* * *
대신전, ‘명왕의 신전’.
원래는 타르타로스를 통치하던 하데스를 기리는 중심 신전이었으나, 이제는 티폰을 기리는 곳이 된 그곳에.
화르륵!
세 개의 불길이 타오르면서 저마다 다른 형상을 갖췄다.
중앙에 위치한 상석에는 페르세포네가.
좌측에는 티폰이.
우측에는 크로노스가 죽은 이후로, 티탄을 대표하고 있는 테이아가 앉아 있었다. 한때, 드넓은 창공을 관장하던 여신. 하지만 지금은 아주 깊은 지하에 처박힌 신세일 뿐이었다.
분명히 이곳은 티폰의 성역이었지만, 페르세포네는 자신이 그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절대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위대한 어머니, 대지모신의 어여쁨을 받은 사도이자, 티탄과 기가스의 여왕이라 할 수 있는 몸.
지금도 대지모신을 대신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니, 이곳에 앉아 있는 게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반면에 가장 낮은 좌석에 앉은 테이아는 가슴 한편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굴욕과 수치심을 어떻게든 억눌러야만 했다.
사실 페르세포네와 티폰 모두 자신에 비하면 그동안 쌓은 신화도, 지내온 세월도 대단하다고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그들 둘의 한낱 시종에 불과했다.
물론, 페르세포네와 티폰은 그런 테이아의 생각을 알면서도 그냥 무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티탄이란 존재들은 그저 부려 먹기 좋은 시종, 프로토게노이처럼 이제는 사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옛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으니.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두 분께 굳이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페르세포네는 존대를 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 묵직하게 담긴 신력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티폰과 테이아의 영혼을 강하게 옥죄고 있었으니.
그것은 페르세포네의 진언이 대지모신의 신력을 담아 언령(言靈)으로 존재하며, 둘의 존재까지 단단히 구속시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티폰은 페르세포네를 보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그들을 몇 차례나 물 먹였던 연우가 자신의 성역을 침범하는 만용을 저질렀는데 어찌 모를까.
『어머님께서는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칠흑의 후예를 손에 넣고 싶어 하세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여러 사회들을 ‘소화’하시느라 정신이 없어 좀처럼 움직이기가 어려운 상태이시고요. 그리고 그분의 말로써 움직이는 저 역시 시선을 분산시키기가 어려운 상황이죠.』
대지모신은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연계가 끊어진 이후, 본격적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천계 내에서도 아주 깊디깊은 이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으니.
『두 분 다 좋은 결과를 보여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특히 티폰,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가장 커요. 사왕좌, 도로 되찾아야지요?』
순간, 티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기서 자신의 수치를 지적할 줄은 몰랐으니.
사왕좌.
원래 예정대로라면 하데스가 앉았던 신위는 자신이 빼앗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죽음과 관련된 막대한 권능뿐만 아니라, 명계(冥界) 타르타로스와 관련된 모든 권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그가 현재 갖고 있는 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어요.』
스르르-
페르세포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명왕의 신전을 가득 메우던 대지모신의 신력도 덩달아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티폰과 테이아는 자리를 한참 동안 떠나지 않았다.
특히 티폰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어렸다.
그러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은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었으니.
‘어머니는 움직이지 못하신다. 하지만…… 차라리 잘되었어. 쥐새끼 같은 그놈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
티폰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상, 이번에는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물씬 풍겼다.
설사 그가 지휘하고 있는 티탄과 기가스를 모두 버리는 패로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차피 여기서 소멸을 맞는다 하여도, 언젠가 어머니에게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테니.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은 우리와 완전히 비껴 나간 것이다.’
그래서 티폰은 싸늘한 목소리로 테이아를 돌아보았다.
“저항군은? 어떻게 되었지?”
“토벌은 거의 끝나 갑니다.”
티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분명히 미리 모두 정리를 해 두라 일렀었는데 그동안 뭘 했던 거지?”
티폰은 그동안 천계로 올라가 페르세포네를 도와 대지모신의 부활을 도와주고 있었던바.
그래서 그는 그동안 이곳을 테이아를 비롯한 티탄들에게 맡겨 둔 상태였다. 타르타로스에서 올림포스의 신들을 몰아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저항군이 남아서 그들을 귀찮게 하는 터라 뒷정리를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덜 끝났다니!
저항군은 하데스의 후예를 자처하는 연우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었다.
혹은 에레보스로 도망친 올림포스 신들을 다시 위로 끌어올릴 계기가 될 수도 있었고.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들의 수장으로 올라온 자가 워낙에 만만치 않았던 터라…… 죄송합니다.”
“멍청한 년.”
티폰은 짜증 섞인 얼굴로 테이아를 노려보면서 자리에서 일어 났다.
“저항군이 있는 곳이 어디냐?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티폰은 연우 일행이 저항군과 접촉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치워 버릴 속셈이었다. 어차피 연우 등은 당분간 성역의 저주로 인해 제대로 된 운신이 어려울 테니.
스르륵!
티폰은 테이아에게서 모든 위치를 전해 듣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는 내내 그는 테이아에 대한 경멸감을 숨기지 않았다. 늙고 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천박한 놈들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티폰마저 사라진 뒤.
으드득!
테이아는 으스러져라 이를 갈았다. 꽉 쥔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헬리오스.”
“예. 어머니.”
나지막한 부름에 그의 옆으로 적발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나타났다.
그녀가 오래전, 남편 히페리온과의 사이에서 낳은 옛 태양의 신. 지금은 그녀와 함께 몇 안 남은 티탄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수장이기도 했다.
순간, 테이아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그녀는 이렇게 자식들을 볼 때면 언제나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곤 했다.
“준비하던 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테이아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사실 티폰에게 보고를 올린 것과 다르게, 그동안 저항군을 토벌하지 못한 것은 저들의 수장이 강한 것도 있지만, 사실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번 일, 얼마나 만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당연합니다, 어머니.”
“그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렴. 그래야 우리 티탄 족도 저 버러지 같은 기가스 놈들을 물리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테니.”
테이아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크로노스를 반드시 부활시켜야만 한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