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탈환 (3)
‘니플헤임이라.’
연우에게 있어 니플헤임의 관심은 의외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렇다 할 접점도 없었던 데다가, 헬을 제외하면 니플헤임 소속의 악마 중에 유별나게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이도 없었으니까.
왕!
『사실 니플헤임 내에서는 여전히 너를 미심쩍어 하는 놈들도 많다는데? 실력은 이제 인정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라그나로크에 함께한다는 예언에 동의를 표하는 이는 아주 적노라고.』
왕왕!
『오로지 헬만 너를 계속 살피고 있는 것을, 이놈은 반신반의하고 있다가 그걸 확인하고자 직접 현신을 택했던 거였고. 그리고 그때 느낀 결과는…… 뭐, 그렇다는데. 흥. 같잖은 놈. 네가 그렇게 아부를 떤다고 해서 저놈이 내 것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 야! 이걸 놓지 못할까!』
아가레스는 펜리르의 말을 잘 통역해 주다 말고 도중에 다리를 덥석 물리고 말았다. 아가레스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어서 놓으라며 펜리르의 주둥이를 때렸고, 펜리르는 아가레스를 놓지 않겠다는 듯 머리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어린아이와 강아지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지만.
저들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연우로서는 그냥 징그럽게만 보일 뿐이었다.
진실을 꿰뚫는 화안금정이라도 뜬다면, 아마 수 미터쯤 될 늑대와 건장한 장정이 서로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그딴 꼬락서니는 더 보고 싶지 않은데.’
세상에는 모르는 게 약인 것도 많은 법이었다.
‘여하튼 라그나로크에 내가 함께 한다……? 저들이 말하는 종말이 칠흑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니플헤임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겠지.’
니플헤임만 해도 아주 큰 규모를 자랑하는 사회였으니.
무엇보다 연우는 이미 토르와 척을 지게 된 상태. 아스가르드와 좋은 관계를 맺긴 이미 글렀으니 적대 관계인 니플헤임과의 연대는 필수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번 전쟁에서 내가 니플헤임에다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는데.”
천교와 다르게, 니플헤임과는 별다르게 거래할 만한 요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가레스야 자기 멋대로 노는 놈이니 그가 챙겨 줄 필요가 없었다.
왕왕!
『으으…… 라그나로크가 벌어질 때 자신들의 편에만 서 준다면 괜찮다고 그러……! 근데 이제 좀 놓으라고! 이 개새끼가, 진짜!』
펜리르는 아가레스의 팔을 물고 있으면서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록 아가레스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지만.
“너희들이 말하는 라그나로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 내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이라면 얼마든지 니플헤임을 도와주도록 하지.”
왕!
[플레이어 ###와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 간에 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시간부로 동맹 관계에 대한 발표가 천계 내에 이뤄집니다.]
[다수의 신들이 당신들의 동맹에 대해 신중한 결정을 부탁합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당신들의 동맹에 대해 호기심을 보입니다.]
……
[동맹 관계에 따라,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당신에게 적대 관계를 표명했습니다!]
[성향이 ‘악’ 쪽으로 기웁니다.]
[성향이 ‘악’ 쪽으로 기웁니다.]
……
[악마의 사회, ‘절교’가 플레이어 ###와의 적대 관계에 대해 천교와의 동맹과 관련한 우려만 표시할 뿐, 중립을 선언합니다!]
……
[동맹 관계에 따라, 신의 사회, ‘천교’와 ‘아스가르드’ 간에 적대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동맹 관계에 따라,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과 신의 사회, ‘올림포스’ 간에 적대 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동맹 관계도가 완성되었습니다.]
[현재 동맹 관계도]
* 동맹군
###(플레이어)
천교(신) 니플헤임(악마)
* (임시)연합군
올림포스(신)
아스가르드(신)
* 중립 지대
말라흐(신)
르 인페르날(악마)
절교(악마)
[현재 다른 사회들은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채 주시 중에만 있습니다.]
[사회와 진영의 발표에 따라 동맹 관계도에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신들이 동맹 관계도를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봅니다.]
[대다수의 악마들이 동맹 관계도를 보면서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
[비마질다라가 앞으로 닥쳐올 전운을 느끼며 크게 기뻐합니다. 당신의 행보에 만족감을 느낍니다.]
[케르눈노스가 자신의 사도가 다칠 것에 대해 우려를 표시합니다.]
『뭐냐, 이 엉터리 같은 판도는!』
아가레스는 눈앞에 주르륵 떠오른 동맹 관계도를 보면서 고운 인상을 팍 하고 찡그렸다. 앙증맞은 손으로 펜리르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이 몸이 없잖아, 이 몸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맹군’ 진영에 ‘동마왕군’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래. 암, 이래야지. 그렇고말고』
아가레스는 원하는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연우를 비롯한 이들은 이제 헛웃음까지 치면서 아가레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시선들을 보면서 도리어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왜 그러지?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음…… 아닐세.”
“하하하!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었지, 역시 고고하기가 대단하군. 과연 동부의 공작다워!”
이랑진군은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나타태자는 오히려 주변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가레스의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던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수록 아가레스의 콧대는 저절로 높아졌지만.
물론, 그의 모습은 여전히 어린아이라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연우는 더 이상 아가레스를 신경 써서야 머리만 아플 것 같아,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고고한 동부의 대공작? 그냥 막무가내인 녀석을 두고 그렇게 평가하는 천계의 놈들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타르타로스에서 빨리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우선순위를 매겼다.
‘명왕의 신전을 탈환해서 순결의 돌도 되찾아야 하고, 에레보스로 가는 문도 열어야겠지만…… 역시나 가장 중요한 건, 현재 타르타로스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겠지?’
연우는 티탄과 기가스가 올림포스의 주도권을 잡은 이 상황에서도, 타르타로스의 한쪽에서는 저항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한창 하데스가 활동하고 있던 시절에도 티탄과 기가스가 날뛰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녀석들이 주도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이라면 통치 체재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점을 공략해야만 했다.
다만, 문제라면.
‘저항군이 있다면 어디에 그들이 있는지를 알아야 할 텐데. 통일된 지휘 체계 없이 산발적으로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고.’
연우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음?”
“호오. 손님이라도 오는 건가?”
『자살이라도 하러 오는 모양이군. 하! 감히 주제도 모르고.』
왕왕!
일행들은 대기를 울리는 격진(激震)을 느끼고, 다 같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르르, 쿠쿠쿠!
『감히…… 누가 우리의 대지를…… 더럽히려 드는가!』
하늘이 떨리면서 검은 벼락이 내리꽂힌 자리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티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등장한 티탄의 수가 도합 수십.
그들을 따라, 웬만한 신격쯤은 가볍게 으깰 수 있을 것 같은 권속들도 여럿 나타나 사방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압력이 일행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허락 없이 성역을 침범한 침입자들에게 가하는 디버프였다.
[‘저주:블라인드’가 가해집니다!]
[‘저주:마력 잠금’이 가해집니다!]
[‘저주:신력 충돌’이 가해집니다!]
……
[광대역 디버프가 더해져 전체적인 스탯 수치가 하락합니다.]
[광대역 디버프에 따라, 모든 저항 수치가 일정 폭 이하로 하락합니다.]
……
일행들은 육체가 바짝 밀려 좁아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아야만 했다. 세상이 온통 그들을 거부하는 느낌.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성역을 점거했을 때 사절들이 느꼈을 압박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할 신력들이 구속되고 있었다.
더구나 수 킬로미터를 자랑하는 거신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데야, 누가 봐도 퇴로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위험한 형국이었지만.
일행들 중에 불안한 모습을 내비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가레스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감히 이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티폰, 그 작자가 직접 나서도 모자랄 판국에 네까짓 것들이 이 몸의 앞을 막으려 드는 것이냐!』
아가레스는 산자락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호통과 함께 자신의 격을 가감 없이 개방했다.
그 순간.
콰르르릉-
거대한 마기가 회오리를 그리면서 무한하게 확장했다. 공격을 시도하려던 권속들이 일제히 마기 폭풍에 갈가리 찢겨 나가고, 티탄 중에서도 몇몇이 그대로 하체가 잘려 나가는 등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성역에서도 드러낸 적이 없었던 그의 격은 사실 천계에서도 비교할 수 있는 자가 아주 극히 드문바.
마기 폭풍은 성역이 주는 디버프 따윈 전부 무시하겠다는 듯, 계속 퍼져 나가면서 거친 해일까지 일으켰다.
“이렇게 마음 놓고 싸워 본 것이…… 그래. 루시엘, 그놈이 한창 소란을 피운 후 처음인가?”
나타태자는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화첨창을 손에 쥐면서 발목에 설치된 풍화륜을 움직여 단숨에 드높은 상공으로 떠올랐다. 그가 지나간 자리로,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치솟은 불기둥이 티탄만큼 커지면서 사방을 지옥도로 만들었고.
“하! 짜증 나는군.”
이랑진군은 이런 조무래기 따위와의 싸움은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 버리겠다는 듯, 여태 뒤쪽 허리춤에 매달아 두기만 했던 가느다란 쌍검을 뽑아 대지를 박았다.
그는 본래 치수(治水)를 담당하던 수신. 그가 디딘 자리를 따라 수증기가 모이더니 커다란 수룡(水龍)을 형성해 눈앞에 있던 티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런 수룡이 도합 수십 마리였다.
콰콰콰콰!
그렇게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고.
연우는 현자의 돌과 드래곤 하트를 공명시키면서 외쳤다.
“영역 선포.”
대지를 따라 그림자가 먹물처럼 확 번져 나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죽음의 군단, 디스 플루토가 천천히 일어났다.
하나같이 검은 갑주를 입은 채, 눈가로 푸른 불꽃을 뿌려 대는 이들.
그들이 내뿜는 투기가 사방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힘이 부족한 나머지 등져야만 했던 고향에 되돌아왔으니. 피땀 흘려 일궈 왔던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든 적들에게 날카로운 살의를 드러낸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사왕좌의 축복 아래, 이전보다 전력이 더 증강한 상태였으니.
칠흑색으로 빛나는 창날이 예리하게 빛났다.
“람.”
「……하명하십시오.」
한때, 하데스의 사도였으나 지금은 디스 플루토의 수장이 된 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는 그 속에 짙게 깔린 적의를 놓치지 않았다.
“너희들이, 그리고 내가 가장 기다리던 순간이다. 다치면 바로 영괴로 떨어뜨릴 줄 알아.”
람은 놀란 눈으로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살짝 웃고 있는 연우를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패배 따윈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는 오만한 말투.
하지만 그녀에게는 연우의 그런 모습이 이제는 아주 당연하게 보였고, 그것이 새로운 명왕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라 여겨졌다.
「명!」
람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반대로 홱 하고 돌리면서 다른 병사들에게 외쳤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우리의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니 싸우자.」
람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우리의 신께 승리를 가져다 바치자!」
쿵!
쿵!
가장 선두에 있던 조장들이 일제히 창으로 대지를 두들겼다. 그 박자에 맞춰서 다른 디스 플루토도 일제히 똑같이 창대로 지면을 때렸다. 그것이 군가가 되어, 분명히 없을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전군-!」
처처척!
「돌격!」
신호와 함께 디스 플루토는 일제히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군단이 포효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