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탈환 (4)
『감히…… 이 보잘것없는 것들이……!』
하지만 티탄들의 눈에는 그 모습들이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크로노스의 신력을 얻어 거대화를 이룬 이후, 언제나 자신들에 짓밟혀 죽어 가던 허섭스레기들이 아니었던가.
하데스가 퀴네에를 잃고 격을 상당수 유실한 이후, 디스 플루토의 전력도 덩달아 하락하면서 그들은 천계에 위용을 떨치던 명계의 군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었다.
그런 놈들이 간만에 돌아와 창날을 들이대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노라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전부…… 짓밟아 주마……!』
그래서 티탄들은 디스 플루토를 아예 짓뭉개 버릴 생각으로, 발을 높이 들어 놈들을 짓밟았다.
쿠우웅!
지면이 그대로 깎여 내려가면서 지반이 크게 흔들리고, 사방으로 땅거죽이 높게 치솟았다.
웬만한 신격이라도 그대로 피떡이 될 수밖에 없는 충격.
그런데.
쿠쿠쿠……!
티탄의 발은 지면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의 발아래, 디스 플루토가 일제히 타워 실드를 머리 위로 올린 채 방진(方陣)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무슨……?』
티탄은 발이 바들바들 떨리기만 할 뿐, 더 이상 힘을 주어도 꿈쩍도 않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발에 힘을 더하려는데.
파바밧!
그 순간, 외곽에 있던 디스 플루토들이 일제히 검은 삭풍(朔風)이 되어, 빠르게 녀석의 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창을 아래로 내려 티탄의 다리를 찍고 달렸다.
강렬한 마찰열에 검고 붉은 불길이 한껏 피어나 삽시간에 화마로 번졌다. 그런 화마가 전부 수십 줄기였다.
『이게 무슨…… 크아악……!』
티탄은 어떻게든 다리에 달라붙은 검은 삭풍을 떨쳐 내려 발버둥 쳤지만.
수십 줄기의 화마는 나선 모양을 그리면서 맹렬한 속도로 녀석의 종아리를 마구잡이로 할퀴어 댔고.
갈라진 상처를 따라 검은 신력이 핏물처럼 잔뜩 터져 나오면서 주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까맣게 죽어 있던 대지는 검은 신력의 홍수로 인해 이리저리 녹아내리기 바빴고, 검은 안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면서 밑 빠진 독처럼 신력이 빠른 속도로 녀석에게서 빠져나갔다.
그러다 화마는 종아리를 한껏 훑고 지나 무릎 위에서 한데 모이며 큰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아……!』
결국 난도질이 되다시피 하던 오른쪽 무릎 아래가 그대로 무참하게 뜯겨 나가고 말았다.
티탄은 난생처음 느끼는 끔찍한 고통에 괴성을 지르다, 균형을 잃은 채로 뒤로 넘어지고 말았고.
쿠우우웅!
「지금이다. 이제 놈의 멱을 딸 차례다!」
방어 대형을 갖추고 있던 디스 플루토는 람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타워 실드는 등에 걸고 창을 높이 세우면서 대지를 박찼다.
순간, 돌격을 시도하는 그들의 발아래로 유령마가 일제히 소환 되었고, 디스 플루토는 그 위에 올라타 기마 군단으로 병종(兵種)을 변경했다.
그리고 창을 세로로 눕힌 채, 마름모꼴 형태의 진형을 갖추고 집단 차징(Charging)을 걸었다.
두두두-
콰르르릉!
무릎을 박살 내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폭발들이 잇달아 티탄의 몸뚱이 위에 작렬했다.
오히려 덩치가 크면 클수록 과녁이 방대해지니 공격하기도 편하다는 듯이, 디스 플루토가 일으킨 검은 삭풍과 붉은 화마는 짧은 순간 동안 티탄의 전신을 쉴 새 없이 난도질했다.
『크아……! 크아……! 크아아아……!』
공격을 받는 내내,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저항하려 해도 계속 공세가 가해지며 그럴 틈을 주지 않으니, 무참하게 당하는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네놈들에게 당하기만 할 줄 알았나?」
탁!
그때, 고통에 몸부림치던 녀석의 미간 위로 람이 가볍게 착지했다.
「몰랐겠지. 너희들이 이런 꼬락서니로 전락하게 될 거라고는. 그렇지? 너희가 우리를 어떻게 해 보려 크로노스에게 손을 댔듯이, 우리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너희들을 연구하는 건 아주 당연한 건데도 말이야.」
람은 자신보다도 훨씬 큰 녀석의 눈동자를 보면서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동공이 잘게 떨리고 있는 녀석의 눈동자에는 한 가지 감정만이 담겨 있었다.
두려움.
「그 덕분에 딱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지.」
람은 그런 녀석을 보면서 가볍게 폭소를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더러 보잘것없느니 뭐니 하면서 비웃어 대던 놈이 이런 꼬락서니라니. 참으로 우스웠던 것이다.
「네놈들이 거대화를 이루면서 물리적인 힘과 격은 상승했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반대로 권능은 그만큼 약해진다는 것.」
람은 이제 먼 과거가 되다시피 했던 때를 떠올렸다.
하데스의 죽음과 함께 타르타로스를 떠나야만 했던 순간.
대지모신을 등에 업고 티탄과 기가스가 명왕의 신전을 더럽히던 당시, 그 속에 고립된 채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동아줄을 간절히 바라던 때를.
하늘과 땅을 잇던 검고 붉은 날개가 아직까지도 자신의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그녀는 막연하게나마 상상했었다.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면.
저 날개를 어떻게든 품고 말겠노라고.
『안……!』
녀석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던지, 살려 달라고 애원하려 했지만.
「몸만 비대해졌을 뿐이지, 속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면. 업을 그만큼 쌓아 내실을 다진 게 아니라면. 너희들은 우리들의 신께 상대가 되지 못해.」
깊게 눌러 쓰고 있는 투구 아래로 그녀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남과 동시에 거칠게 창날이 휘둘러졌다.
촤아악!
창날에서 샘솟은 검붉은 불길이 단번에 녀석의 거대한 머리통을 잘라 버렸다.
『쿠어어어……!』
구슬픈 비명이 울려 퍼지면서 타르타로스를 가득 채우고.
촤르륵, 촤륵!
바닥을 따라 번졌던 그림자 늪에서부터 수십 개의 쇠사슬이 치솟아 분리된 몸뚱이와 머리통을 단숨에 묶더니, 그대로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신격에게는 웬만해서는 ‘죽음’이 따르질 않는다. 그러니 그림자 속에다 처박아 통째로 양분으로 삼아 버릴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끝내 녀석이 완전히 그림자 늪에 잠겼을 때.
……!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티탄과 그들의 권속들은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처음 연우가 그들을 상대로 신살을 이뤘을 때에 받았던 충격도 컸지만, 이렇게 디스 플루토가 그들을 제거하고 통째로 집어삼킨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던 터라, 티탄들의 충격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디스 플루토는 이미 소싯적, 전성기 때의 힘을 전부 되찾았노라고!
비록 올림포스의 하위 조직이지만, 명성만큼은 올림포스와 비등해 ‘타르타로스’의 이름만 나와도 천계의 수많은 사회들이 덜덜 떨던 그 시절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이미…… 하데스에 다다랐……!』
티탄 중 하나가 연우를 보면서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티폰이라고 해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을까 싶은 사왕좌의 자리를, 신들 내에서도 대신격만이 감당할 수 있을 신위를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하지만.
“이미 늦었어.”
연우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로 검은 실선 두 개가 그어지면서 활활 타오르는 부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나타나더니.
「죽음이여, 오라!」
부의 명령에 따라,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샤논과 한령, 레베카 등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하늘에 거대한 마법진들이 수십 개나 맺히면서 지상을 향해 포격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 지지 않겠다는 듯.
나타태자와 이랑진군의 움직임도 빠르게 이어지면서 불벼락과 해일이 잇달아 티탄들의 수족을 차례로 잘라 나갔다.
크어어엉!
한쪽에서는 수십 미터나 되는 늑대로 성장한 펜리르가 티탄의 한쪽 팔을 무참하게 뜯으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 * *
“음! 생각보다 싱거운데.”
나타태자는 화첨창을 거칠게 내질러 바로 눈앞에서 알짱거리던 티탄의 눈구멍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불줄기가 거대한 눈을 박살 내고, 반대쪽 뒤통수를 뚫고 튀어나오는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나타태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티탄의 절규가 시끄럽다는 듯, 왼손에 감겨 있던 혼천릉을 풀어 그대로 채찍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채찍이 녹으면서 생성된 푸른 벼락이 그대로 티탄의 왼팔을 가차 없이 잘라 내고, 주변을 아무렇게나 유영하고 있던 여러 개의 원반들, 건곤권이 단숨에 확장되어 남은 사지를 송두리째 잘라 버렸다.
‘움직이는 병기’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릴 정도로, 그는 수많은 병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티탄을 무참히 쓸어 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무위를 보일수록, 나타태자는 의문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이따위 놈들밖에 보내지 않는다고?
올림포스는 천계 내에서도 비교할 수 있는 사회가 몇 개 되지 않는 대형 사회. 그리고 티탄과 기가스는 그런 올림포스를 탈환한 놈들이었다.
제아무리 등에 대지모신을 업었다고 하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티탄과 기가스가 보유한 전력은 천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뜻일 텐데.
자신들을 위협하려는 연우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놈들을 보냈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되질 않았다.
심지어 이곳에는 아가레스나 펜리르와 같은 대악마 급의 인사들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이곳이 티탄에 유리한 전장이라고 해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큰 전력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타태자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음양검으로 티탄의 목을 날리면서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다르게 노리는 바가 있나?’
바로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쿠쿠쿠-
하늘이 다시 한번 더 떨리기 시작하더니.
콰르르릉!
여태까지 나타나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벼락이,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번개가 나타태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흡!”
나타태자는 순간적으로 화첨창과 음양검을 교차시키면서 황금색 벼락을 막아 냈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격이 얼마나 강렬한지, 나타태자는 팔 근육이 모조리 끊어지는 끔찍한 격통과 함께 그대로 떠밀려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쾅!
“나타!”
이랑진군이 뒤늦게 그쪽으로 몸을 돌리려다 말고, 황금색 벼락이 이번에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수십 마리의 수룡을 끌어 올려 막고자 했다.
하지만 황금색 벼락은 이번에도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수룡을 무참하게 잡아 뜯더니, 그대로 이랑진군과 충돌했다.
차아앙!
이랑진군은 쌍검을 교차시키면서 가까스로 벼락을 막아 냈다. 그의 몸이 깊은 고랑을 잔뜩 남기면서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파직, 파지직-
파지지직!
황금색 뇌기는 당장이라도 이랑진군을 잡아 뜯으려는 듯, 위협적이게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막대한 양의 인과율을 소비하여 가호를 내립니다!]
[토르가 뇌신왕(雷神王)으로서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
『한낱 필멸자 따위에게 잘 보이려 그렇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더니, 끝내 정말 개가 되기로 마음먹었나? 옥황이 알게 되면 참으로 가슴 아파하겠어!』
토르는 황금색 뇌기를 한껏 더 크게 끌어 올리면서 자신의 대신물, 묠니르를 크게 내리쳤다. 아스가르드의 가호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동안 그의 위용은 이미 평상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된 상태였다.
더구나.
[성역 내 티폰의 신력이 토르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의 뜻이 토르와 함께합니다.]
티폰을 비롯한 올림포스의 축복까지 더해지면서, 위력만 따진다면 이미 초월신격인 ‘황’ 급에 거의 다다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콰르르르릉-
결국 이랑진군은 정면에서 부딪쳐서는 위험하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묠니르를 옆으로 흘리면서 단숨에 공간을 접어 거리를 크게 띄웠다.
물론, 그것을 놓칠 토르가 아니었다.
그는 지난번에 기어 다니는 혼돈의 성역에서 받았던 수치와 모멸감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았고.
신격이나 되어 플레이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진영을 등진 천교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뒤쫓으려 다시 권능인 〈뇌신보(雷神步)〉를 밟으려는데.
크아아앙!
갑자기 공간을 찢으면서 펜리르가 나타나 그의 머리통을 부수려 흉악한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아가레스가 흘리던 마기 폭풍이 한데 압축되어 송곳처럼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거친 연쇄 공격이었지만.
『한낱 사냥개들 따위가!』
토르는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손에 쥐고 있던 몰니르로 지면을 거세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태풍처럼 번져 나간 황금색 뇌기가 단번에 펜리르와 마기 폭풍을 수백 미터 바깥으로 튕겨 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