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탈환 (7)
비그리드를 따라 흐르는 검뢰는 그냥 척 보기에도 절대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티폰은 본능적으로 폭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참선방에서 탈출을 시도했고, 그가 몸을 던지기 무섭게 참선방은 그대로 붕괴되고 말았다.
“크윽……!”
문제는 그렇게 탈출을 하고도, 무너진 공간 너머에서 전해지는 충격파가 너무 커서 전부 피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그는 팔 하나가 송두리째 타 버리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티탄-기가스가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공간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고통보다 티폰을 더 화가 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참선방의 붕괴였다.
저곳은 그의 권능과 신권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 현재 타르타로스 내에 흐르는 모든 신력을 제어하는 통제실이었다.
더구나 아직까지 온전히 수습하지 못한 크로노스의 유해를 완전히 ‘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장소이기도 했으니.
그런 곳이 날아가고 말았다는 사실은 티폰으로 하여금 울화를 치밀어오르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연우라는 존재는 매번 그가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계획들을 훼방 놓는 데 도가 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연우는 그런 티폰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티폰이 빠져나온 공간의 균열을 따라 같이 튀어나오면서 검뢰팔극을 잇달아 풀어냈다.
이극에서부터 사극까지. 연거푸 몇 배로 증폭된 검뢰가 잇달아 쏟아지니, 티폰은 어떻게 권능을 사용하려 하기도 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하하하! 쥐처럼 숨어 있더니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구나, 티폰!”
지상에서는 헤라클래스가 그런 그를 보며 웃어 젖히더니 다시 한번 더 몽둥이를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생성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강풍이 단번에 티폰의 후방을 휩쓸었다.
앞과 뒤, 각각 연우와 헤라클래스가 있어 졸지에 중간에 끼이게 된 티폰은 갑자기 위험에 처하자 인상이 팍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감히 내가 너희들 따위의 사냥감으로 보이는 것이냐!』
한때 제우스와 겨루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위용을 자랑하던 그로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화가 치밀어 오를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연우를 자신들이 잡겠노라며 큰소리를 뺑뺑 쳐 대던 아스가르드 놈들이 생각나 이가 갈렸다.
콰르릉-
결국 티폰은 자신이 여태 잠가 뒀던 격을 전부 개방했다. 화가 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상태로 연우와 헤라클래스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였다.
티폰은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머나먼 태초에 있었던 기간토마키아에서 수많은 기가스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던 헤라클래스의 위용과.
지난번에 거인족들을 부활시키고, 그들의 신으로 우뚝 올라서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을 쓰러뜨리던 연우의 모습을.
애당초 저들은 절대 자신보다 아래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패를 보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빛이 번쩍였다.
티폰의 신형이 위아래로 무한하게 확장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타 르타로스를 전부 뒤덮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자랐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티탄들도 그에 빗대면 작아 보일 정도로 엄청난 크기였다.
뱀처럼 길게 이어지는 꼬리는 저 머나먼 지평선에 다다랐고, 수십 쌍의 날개는 하늘을 뒤덮었다. 인간의 형체라기보다는 괴물이라고 하는 게 옳은 모습.
그것이 바로 티폰이 여태껏 숨겨 두고 있던 본체였다.
동시에,
녀석을 따라 풍겨 나온 격은 연우의 격과 헤라클래스의 강풍을 전부 물리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르타로스를 이루고 있던 모든 대지와 하늘을 우르르 떨리게 만들었다.
그 속에는 지난날 연우가 느꼈던 티폰의 기운도 있었지만, 다른 신들의 손길도 묻어 있었으니.
“대지모신과…… 크로노스의 신력까지 사용하는 건가?”
연우는 하늘 날개로 크게 홰를 치며 균형을 가까스로 잡고, 녀석을 구성하고 있는 신력의 성분들을 빠르게 분석하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래도 올림포스를 완전히 장악한 뒤, 타르타로스를 성역으로 삼으면서 모종의 변화를 이룬 것 같았다.
특히 크로노스의 시체에서 뽑았을 게 분명한 시정(屍精)은 거대화를 이루는 게 전부인 티탄들보다도 훨씬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야겠지만…… 자신의 성역이니 법칙을 바꾸어서 사용하는 건가?’
『전부! 죽여 주마!』
그때, 티폰은 잔뜩 노한 음성으로 다시 한번 더 격을 방출했다.
그러자 타르타로스 전체가 모조리 뒤틀리는 듯한 끔찍한 소리와 함께 온갖 자연재해들이 연우와 헤라클래스, 그리고 전장 위로 쏟아졌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라, 망자 거인과 아스가르드가 부딪치고 있는 곳을 포함해, 타르타로스 전역에 갖가지 재해들이 불어닥쳤다.
하늘에서는 불덩이에 휘감긴 유성들이 수도 없이 쏟아지고, 대지는 크게 갈라지면서 용암이 쉴 새 없이 치솟았다. 갖가지 벼락을 동반한 폭풍우가 지면 위를 휩쓸며, 중력은 한없이 높아져 몸뚱이가 그대로 짜부라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그야말로 타르타로스를 아예 초토화시키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공세.
지상에 있던 여러 티탄들마저도 버텨 내기 버거워할 정도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쿠르르릉-
촤아악!
연우가 오극(五極)에 다다른 검뢰를 토해 내자, 검붉은 빛살이 여러 가지 법칙들을 통째로 무시하면서 그대로 오른쪽 날개들을 대거 잘라 버렸다.
『크아아!』
녀석의 고통스러운 절규와 함께 검은 신력이 핏물처럼 튀었다. 잘린 날갯죽지며 깃털들이 한 움큼 지상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연우는 ‘핑’하고 도는 현기증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검뢰팔극을 다시 이어 나가려 했다.
오극은 원래 합일 없이는 사용할 수도 없었고, 미후왕의 허물도 전개하기 버거워하던 수준. 그런 와중에 육극(六極)을 사용할 수 있다면…… 티폰을 단번에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육극은 미후왕의 허물이 경고했던 대로, 신체에 걸리는 과부화가 장난이 아니었다. 기존 검뢰의 64배에 해당하는 위력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그만큼 육체에도 큰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준비 과정이 약간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사이 부서진 날갯죽지와 깃털들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던 검은 신력과 함께 뒤엉키더니, 삽시간에 갖가지 마물로 변하면서 연우에게로 와락 쏟아졌다.
키아아아-
키킥! 키키킥!
연우는 육극을 뽑아내려던 것을 취소하고, 대신에 비그리드에 검뢰만 잔뜩 두른 채로 빠르게 휘둘렀다.
촤촤촤-
마치 세상을 쪼개려는 듯, 빛살들이 저마다 다른 각도로 이리저 리 꺾이면서 마물들을 차례로 베어 나갔다.
그러다.
파지지직!
다시 한번 더 일극에서부터 오극까지 검뢰가 잇달아 전개되면서 마물들을 깡그리 밀어 버리고, 티폰의 본체에다 폭격을 날렸다.
쾅! 콰쾅!
콰콰쾅!
티폰의 거대한 몸뚱이가 충격파와 함께 연거푸 뒤로 쭉쭉 밀려 나더니.
촤르르륵!
허공에 맺힌 수십 수백 개의 공허를 따라 쇠사슬이 잔뜩 쏟아져 나와 손발과 꼬리, 그리고 날개를 비롯해 목까지 쉴 새 없이 칭칭 감겼다.
연우는 칠흑왕의 절망에서부터 연결된 쇠사슬을 단단히 붙잡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콰드득~
쇠사슬이 저절로 빳빳해지면서 날개와 꼬리를 모조리 뜯어 놓았다.
『이 빌어먹을 놈이!』
티폰의 강렬한 안광이 연우를 직시했다.
그러자 타르타로스를 구성하던 모든 법칙이 ‘연우를 거부하는’ 형태로 변하면서 그에게 갖가지 저주를 씌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주가 당신에게 더해집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주가 당신에게 더해집니다!]
……
[상태 이상, ‘저주 중독’에 빠졌습니다!]
[상태 이상, ‘신력 거부’에 빠졌습니다!]
[상태 이상, ‘신위 무시’에 빠졌습니다!]
……
[경고! 이곳은 위험지대입니다. 빠르게 탈출하지 않을 시, 신력 생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자칫 신위가 망가질 우려가 있습니다. 탈출을 권고합니다.]
[경고! 여러 개의 상태 이상이 중첩되어 현재 ‘상태 이상 중독’ 상태입니다.]
[경고! 현재…….]
……
동시에 티폰이 거대한 손을 억지로 내뻗으면서 연우를 강제로 옥죄었다. 저절로 생성된 보호막을 그대로 연거푸 부서뜨려 나가다, 끝내 연우를 한 손에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쇠사슬을 잡아당기는 연우의 힘도 더 거세졌다.
꽈아악!
하데스의 원한을 갚는 것.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연우와 티폰은 서로를 확실히 죽이기 위해 팽팽한 힘겨루기에 몰두했다.
쿠쿠쿠……!
* * *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 아하하!”
헬리오스는 오로지 서로를 죽이기 위해 팽팽한 힘겨루기를 벌이는 연우와 티폰을 보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헤라클래스와 저항군들을 제거하기 위해 티폰을 뒤따라 움직인 이 자리.
어머니 테이아는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당시에는 그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기회라니?
티폰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연우가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 준다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연우가 강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번번이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켜 대지모신마저 상당히 화가 나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동안 헬리오스는 그뿐이라 여기고 있었다.
타르타로스는 이미 티폰의 성역이니, 연우가 제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티폰의 손바닥 위일 것이라고.
더구나 아스가르드마저 참전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당연히 연우의 패배를 점칠 수밖에 없었는데.
‘어쩌면…… 티폰이 질 수도.’
아니, 헬리오스의 눈에는 이미 티폰의 패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스테이지의 법칙이 연우를 거부하며 갖가지 상태 이상을 먹이고 있다지만.
쇠사슬에 칭칭 감긴 티폰은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무력화가 이뤄지고 있는 중이었다.
웅, 우웅, 우우웅-
‘칠흑왕의 유산…… 저것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가?’
헬리오스는 티폰의 육신을 강하게 죄어 들어가면서 날개와 꼬리 등을 부수고 있는 쇠사슬을, 그리고 연우의 팔다리에 착용된 형틀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칠흑왕은 타계의 신뿐만 아니라, 올림포스에게도 아주 큰 의미를 주는 존재. 당연히 그런 존재를 유폐시킨 쇠사슬은 아주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것이 있어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니……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었다.
『셀레네. 에오스.』
헬리오스는 입술을 달싹여 티탄 병력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누이들에게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응. 말해, 오빠.』
『지금 시작하려는 거야?』
『보다시피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을 듯하다. 나는 곧장 크로노스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겠다. 너희들도 적당히 조금씩 병력을 뒤로 빼도록 해.』
『오빠는 티폰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구나? 알았어.』
헬리오스는 티탄의 병력이 빠르게 뒤로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간절히 바랐다.
연우가 아주 길게 티폰의 발을 묶어 주기를.
* * *
“나를 불렀다고 들었소만, 무왕?”
헤노바는 대장간에서 검을 두들기다 말고, 자신을 찾는다는 무왕의 전언을 듣고 외뿔부족의 마을을 찾았다.
무왕은 팔자 좋게 호숫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며 햇볕을 즐기고 있던 중이었다.
“오랜만이오, 헤노바. 우리가 이렇게 일대일로 마주한 게 언제였더라?”
후웁, 하-
헤노바는 곰방대를 한껏 들이켰다가 연기를 뱉으면서 피식 웃었다.
“대략 십 년은 넘지 않았을까 싶소만? 당신이 직접 신마도를 의뢰하러 왔을 때 이후로 처음이니. 오다가다 이따금 마주치긴 했지만, 길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으니.”
“하긴 그도 그렇군.”
무왕도 따라서 웃었다.
신마도.
지금은 탑 내에서 ‘마희’를 상징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 오랫동안 부족 내에 전설로만 내려오던 〈양도(陽刀)〉를 완성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신물이었다.
당연히 그것을 온전히 제작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고, 외뿔부족은 오랜 연구 끝에 그것이 가능한 이는 헤노바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대만족이었지. 콧대 높은 우리 꼰대들이 죄다 탄성을 터뜨렸을 정도였으니.’
같은 부족원 외에는 사람 취급도 않는 외뿔부족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헤노바의 작품은 그야말로 걸작이나 다름없었다. 에도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신마도를 아끼면서 사용하는 것이고.
“뭐, 하여간 갑자기 회포나 풀자고 나를 부른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용건으로 찾으셨소?”
헤노바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무왕을 바라보았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음? 무슨 제작이라도 의뢰하려는 거요?”
“비슷하오.”
밀짚모자를 눌러 쓴 무왕이 헤노바를 보며 익살맞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헤노바도 알다시피 나야말로 외뿔부족이 지난 역사 동안 낳은 최고의 지도자이자 최강의 전사이지 않소? 부족에는 안타깝게도, 아마 앞으로도 영원토록 나 같은 왕은 나타나질 않겠지.”
무왕은 제 입으로 자화자찬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헤노바는 고개를 더더욱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왕이 자기 잘난 맛에 산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으니.
다만, 뭘 부탁하려고 저렇게 구구절절 판을 까는 건가 싶은 것이다.
“해서, 부족이 앞으로도 계속 나를 기리라는 뜻에서, 걸출한 동상을 하나 만들어 주었으면 하오. 물론, 모델은 나로 해서.”
순간, 헤노바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냥 말만 들으면 자신을 우상화하기 위한 동상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처럼 비쳐졌지만.
그 안에는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 숨어 있었다.
기리는 뜻에서?
“그 말은……?”
무왕이 익살맞게 웃은 그대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더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