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권
1화. 크로노스 (1)
『……이건 볼 때마다 무시무시하군.』
헬리오스는 끝도 없이 높다랗게 서서, 저 멀리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산맥’을 보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리 봐도 스테이지의 지형을 구분 짓는 산등성이로밖에 보이지 않건만.
이런 걸 두고 누가 오랜 과거 티탄의 위대한 시절을 이끌던 신왕(神王), 크로노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라노스로 대변되던 프로토게노이의 시대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강제로 타천시키면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신으로 거듭났던 존재.
당시에는 천계의 많은 이들도 크로노스와 티탄을 아주 두려워하기만 했었으니.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도 크로노스와의 충돌을 꺼려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크로노스가 칠흑왕이라는 위대한 존재의 뜻을 대변하고, 그 의지를 집행하는 사도(使徒)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결국 그의 시대를 거부했던 제우스 형제들에게 당해 고꾸라지고 말았고.
끝내 ‘죽음’을 당한 채, 타르타로스의 한쪽 구석에 처박힌 채로 있어야 했다.
그것은 여러 신과 악마들에게도 아주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죽음을 다스린다는 존재가, 도리어 그 죽음에 잡아먹히고 말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어진 시대야말로 아무도 범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지만.
우라노스와 크로노스가 그러했듯이, 이제 제우스의 시대도 같이 저물고 말았다.
물론, 제우스는 다른 창조신이나 주신들처럼 천마증을 앓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황이라지만.
그가 다시 어떻게 일어난다고 해도, 지난날 함께 올림포스를 이끌었던 존재들이 전부 몰락하고서야,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들 이제는 티폰의 시대라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격변기 중에 있는 자잘한 진통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이지.’
헬리오스는 혀로 메마른 입술을 가볍게 축였다.
그리고 천천히 크로노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확하게는 크로노스의 ‘머리’가 있는 쪽.
‘티폰은 제우스에게 당하고 나서 상실한 격을 크로노스에게서 채취한 시정으로 메웠었지. 그러고 남은 찌꺼기를 우리 티탄들에게 선심 쓰듯이 나눠 주었고…….’
티폰은 신위를 회복하면서 이미 격까지 수복한 상태. 즉, 지금은 제우스와 싸우던 시기의 힘을 되찾은 것으로도 모자라, 크로노스의 힘까지 가지면서 전성기를 뛰어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찌꺼기만으로도 우리 티탄들은 역전을 꾀할 수 있을 정도로, 하데스를 몰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었으니…… 이는 시정을 제대로 가질 수만 있다면 무한한 힘을 발 휘할 수 있단 뜻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크로노스의 시정을 채취할 수 있는 방법을 티폰이 절대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크로노스의 힘을 사용한다는 건, 달리 말해 칠흑왕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과 똑같은 말.
하지만 칠흑왕의 후예로 채택된 것이 아니고서야, 칠흑왕의 힘을 탐낼 엄두를 내는 신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칠흑은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탐내는 자들은 모조리 먹어 치울 정도로 아주 탐욕스럽고 오만하니까.
그렇기에 뭣도 모르고 칠흑을 좇던 플레이어들이 줄줄이 사라졌던 것이다.
티탄은 그런 위험성을 알기에 크로노스를 어찌해 보려는 시도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티폰이 하라는 대로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목표였던 올림포스의 탈환이 이뤄진 뒤, 이제 사냥개로서 쓰임이 다했으니 버려지는 것밖에 남지 않았음을 안 티탄들은 빠르게 새로운 방도를 모색해야만 했다.
이때, 새로운 의견을 내놓은 것이 바로 테이아였다.
-만약 우리가 크로노스의 힘을 가질 수 없다면, 크로노스를 다시 깨우면 되는 것이 아닌가?
헬리오스를 비롯한 여러 티탄들은 이 의견을 아주 길게 고심해야만 했다.
윤회전생에 귀속되어 죽어서도 환생이 가능한 일반적인 필멸자들과 다르게, ‘초월’을 이루면서 윤회전생에서 벗어난 불멸자들은 한번 당한 ‘죽음’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조금 경우가 다르지. 그는 제우스 때문에 격이 붕괴되면서 제 신위에 잡아먹힌 형국이었으니. 따지자면 죽었지만, 소멸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크로노스의 상태는 정확하게 ‘죽음’이라는 자신의 신위에 먹혀 있는 형태. 즉, 강대한 신위를 버티지 못하고, 그것에 저주처럼 단단히 씐 형태였다.
크로노스의 신체(神體)가 죽어서도 썩거나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였다.
‘이때, 그가 갖고 있던 다른 신 위를 강제로 발동시킬 수 있다면?’
크로노스가 가진 신위는 바로 ‘죽음’과 ‘시간’.
그건 크로노스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전승이 ‘시간에 따른 죽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테이아와 다른 티탄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죽음이 이뤄진 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농작물도 가을에 수확되어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씨를 뿌려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듯이, 크로노스도 이제 죽음을 대변하는 겨울이 지났으니 부활을 상징하는 봄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 할 수 있는 관념이었지만.
‘애당초 신이란 존재가 그런 관념을 상징하는 존재들이니.’
그래서 테이아와 티탄들은 그런 크로노스의 ‘시간’이라는 태엽을 아주 빠르게 감아서, 죽음을 물리치고 그가 일어날 수 있게 만들고자 했다.
물론, 여태껏 거의 정지하다시피 한 태엽을 감기란 쉽지 않을 터.
하지만 헬리오스는 이 또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크로노스의 신화…… 그것을 재현하면 된다.’
헬리오스는 크로노스가 제우스와 형제들에게 했던 패륜을 떠올렸다.
크로노스는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식에게 똑같이 왕위를 찬탈당할 것이란 예언을 받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계속 먹어 치운 전적이 있었다.
그러다 아내였던 레아가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막내아들이었던 제우스를 빼돌리면서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어 버렸지만.
헬리오스는 바로 그때의 신화를 재현할 생각이었다.
‘나를 제물로 바쳐…… 크로노스의 신화를 강제로 깨운다.’
신화가 깨어나면 신위가 바르게 서고, 신력이 바로 그 뒤를 따른다.
헬리오스는 그 생각만 가지고서 천천히 크로노스의 얼굴로 다가 갔다. 다행히 ‘입’으로 예상되는 협곡은 아주 크게 서 있어 들어서기가 쉬웠다.
꿀꺽-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동족들을 위해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도, 막상 그 앞에 서게 되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헬리오스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어머니 테이아의 시대를 위해. 이대로라면 스러질 것이 분명한 동족들을 부흥시키기 위해. 누이인 셀레네와 에오스가 편하게 살 아갈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는 천천히 크로노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화아악!
헬리오스는 언제부턴가 컴컴한 어둠이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느꼈다.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맡을 수도 없었다. ‘나’를 규정짓는 외형적인 요소도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사고라도 하지 않으면 자아마저 아무 흔적 없이 묻힐 것 같은 느낌.
칠흑이 분명했다.
‘티폰…… 이놈은 이런 곳에서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뭐라도 느껴져야 시정을 채취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티폰이 무슨 수를 쓴 건지 그는 아직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더구나 다른 문제도 있었다. 감지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크로노스의 신위를 깨울 방법도 없다는 점이었다.
아까 전부터 계속 신력을 외부로 팽창시키고 있지만……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헬리오스의 등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그마저도 막연하게 그가 상상으로 그려 내는 이미지일 뿐, 실상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막막했다.
‘이, 일단 되돌아가야……!’
헬리오스가 가장 두려운 건 아무 소득도 없이 그냥 희생되고 마는 것이었고,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너무 컸다.
그러자 여태껏 외면하려 했던 공포가 조금씩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동족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칠흑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여기서 탈출하고픈 두려움.
모든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그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헬리오스는 왔던 길로, 아니, 왔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진짜 뛰는 건지 뛰지 않는 건지는 느껴지는 게 전혀 없으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속 뛰고자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탈출해서 동족들에게 이곳의 위험성을 말하기 위해.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도 처음에 든 생각이었을 뿐.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계속 칠흑만 이어지자, 조급한 마음이 계속 커지면서 두려움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기나긴 타르타로스의 역사 동안, 크로노스를 깨우기 위해 이런 시도를 해 봤던 존재가 과연 자신들뿐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그들 전부가 이 칠흑 속에 잠겨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그리고.
‘크로노스를 잡아먹은 ‘죽음’이라는 게 이 칠흑인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지막에는 이런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사, 살려 줘!’
공포가, 완전히 대가리를 치켜들고 말았다.
‘아아아아악!’
헬리오스는 결국 완전히 겁에 질린 채, 이성을 잃고 뛰고 또 뛰었다.
아무것도 없는 칠흑 속을, 존재가 완전히 먹혀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칠흑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계속 고요했다.
* * *
촤르륵, 촤륵-
꽈아악!
연우는 티폰을 칭칭 감은 쇠사슬에서 절대 손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연우를 구속하려는 티폰의 손아귀도 절대 풀리지 않았다.
이대로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통이 뒤따랐지만.
연우와 티폰은 절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가 자신들이 죽는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팽팽한 힘겨루기는 도저히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하데스 영감의 후계자가 제법이라더니, 정말이로군.’
헤라클래스는 그 무지막지한 광경을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신에 온통 피와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껄껄 웃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걸 신경 쓰는 투가 아니었다.
도리어 앞뒤가 꽉 막힌 듯이 답답하기만 한 상황에서 한 줄기 동아줄이라도 쥔 듯한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아버지! 아무래도 당신께서 어떻게 돌아오신다고 해도, 발 디딜 구석 따윈 어디에도 없을 것 같습니다그려. 하하하!’
헤라클래스는 원래 뛰어난 투신으로서, 올림포스 내에 높은 신좌가 따로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고서 층계를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던 존재였다.
속박을 피하기 위해 천계로 이어지는 채널링도 전부 차단해 놓아 그동안 올림포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우연찮게 타로타로스의 상황을 알게 되어 찾아왔던 차였다.
원래대로라면, 지난날 그가 올림포스로부터 받은 수많은 해코지를 생각해서 그들이 어떻게 되건 말건 간에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상대가 기가스라고 하니, 소싯적에 그들과 전쟁을 치르던 것이 떠올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헤라클래스에게 있어 하데스는 올림포스 신들 중 인상이 좋았던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으니, 원한을 갚아 줄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타르타로스에 찾아와 보니, 전황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타르타로스를 지켜야 할 디스 플루토는 어디로 사라져 보이지도 않고, 올림포스의 신들도 티탄-기가스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에레보스까지 후퇴하고 말았으니.
그로서는 도저히 혼자서 전황을 역전시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산발적이게나마 곳곳에 저항군들이 남아 있고, 잔류를 선택한 올림포스 신들도 있다고 하니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헤라클래스는 흩어진 패잔병들을 하나둘씩 모아 군을 형성하는 한편, 어딘가에서 다른 저항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신들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그러다 계속 듣게 된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카인’이었다.
진짜 이름은 드러내지 않았으나, 하데스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차기 명계를 이끌 왕으로 내정되었다는 자.
저항군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언젠가 카인이 되돌아와 타르타로스를 탈환하고, 옛 성세를 재건하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분명히 그동안 따로 갈라져 교류도 없었을 게 분명한 저항군들이 전부 똑같이 하는 말이었으니.
그들은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고, 희망을 놓지 않은 채로 굳게 쥐고서 적들에 맞서 싸웠다.
그래서 헤라클래스는 항상 카인이 누군지 궁금했다.
정체도 불명이라는 그가 대체 누구이기에, 어떤 종적을 남겼기에, 다들 이리도 굳건한 신뢰를 갖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그리도 깐깐하던 하데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다 이렇게 만나게 된 이때.
“왕께서…… 왕께서 돌아오셨다!”
“티탄과 기가스 놈들을 물리치러, 타르타로스를 재건하러 오셨어!”
“왕을 따라라!”
“왕을 도와 티탄과 기가스 놈들을 물리쳐라!”
연우를 보며 열광적으로 사기를 드높이는 병사들을 보면서, 헤라클래스는 자신도 똑같이 전투심이 고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헤라클래스는 아무도 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네메아의 사자와 히드라들을 꺾었을 때처럼.
젊은 시절의 혈기를 다시 떠올리면서, 숨을 크게 고르고 천천히 근육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콰드득, 콰득-
계속된 전투의 긴장감으로 인해 바짝 조였던 근육이 조금씩 이완되었다. 그러자 피부 위로 새하얀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여태 알게 모르게 축적되었던 피로가 조금씩 날아갔다.
그러다 다시 근육이 바짝 조이자, 헤라클래스의 덩치가 두 배는 가까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두 눈가로 타오르는 광망도 아주 뜨거워, 옆에 있던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라클래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옆에 있던 놈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창.”
“……예?”
“창!”
“예, 옙! 여기 있습니다!”
헤라클래스는 병사가 허겁지겁 내미는 창을 받아 가볍게 무게를 가늠했다.
“흠! 마음에 드는 수준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없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
헤라클래스는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고는 투창 자세를 갖추고, 그대로 티폰에게로 냅다 던졌다. 가뜩이나 웬만한 나무줄기보다도 훨씬 두꺼운 팔뚝이 저대로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잔뜩 부푼 터라, 창의 속도는 도저히 육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맹렬하고 빨랐다.
그리고.
콰아아앙!
『크아아악! 헤라…… 클래스! 이 잡종이…… 감히!』
티폰은 고통에 차 비명을 질렀다. 방금 전에 헤라클래스가 던진 창 하나로 왼쪽에 있던 날개 여러 개가 통째로 꿰뚫리고 만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창날은 맹렬한 속도로 크게 회전하고 있어서 넓은 범위에 걸쳐 막대한 원심력을 미쳤으니, 거기에 노출된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뜯겨 나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고, 병사들은 하나 같이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으면서도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저것이 별다른 스킬이나 마법, 권능이 없이 순수한 ‘힘’만으로 이뤄진 광경이라고 한다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주둥이가 아직 멀쩡한 걸 보니, 아직 더 버틸 수 있겠는데 그래?”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런 시선이 익숙했던 헤라클래스는 별다른 감흥 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도리어 자신의 창에 정통으로 맞고도 소리 지를 힘이 남아 있는 티폰에 오기가 생겼는지, 다른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창!”
그렇게 헤라클래스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그에게 창을 가져다 주려 바쁘게 뛰어다녔다. 언제부턴가 이상하게 티탄들의 공세도 멈춰서 그의 명령에 집중할 수 있었다.
쾅! 쾅! 콰앙!
콰아아앙!
헤라클래스는 손에 창이 잡히는 족족 계속 던져 댔다. 그럴 때마다 저대로 팔이 빠지는 건 아닐까, 근육이 상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콰콰쾅! 콰쾅!
“그나저나 이거 너무 편한데? 꽁꽁 묶여 있는 데다가, 덩치도 크니까 던지는 족족 너무 잘 맞잖아. 으하하하!”
헤라클래스의 광기 젖은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티폰의 거체에도 계속 크게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럴 때마다 밑 빠진 독처럼 검은 신력이 줄줄 새어 나왔다. 육체가 계속 무너지니 연우를 붙잡는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쇠사슬도 더 바짝 옥죄어 오면서 서서히 그의 숨통을 졸랐다.
티폰은 저 빌어먹을 놈의 창이라도 막기 위해 모든 권능을 헤라클래스에 집중했지만.
“으랏차차!”
모든 걸 ‘힘’으로 극복해 내는 헤라클래스에게 여러 저주는 별 다른 효용이 없었다. 그나마 움직임을 더디게 하는 중력 중첩도 그에게는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콰콰쾅!
콰쾅! 쾅! 콰콰쾅!
『안…… 돼! 이대로는……!』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게 되자, 티폰은 정말 이대로 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져야만 했다.
연우도 헤라클래스도, 한꺼번에 상대하려 한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무엇보다. 헤라클래스의 발목이라도 묶어 줘야 할 티탄들이 갑자기 뒤로 빠지면서 졸지에 전장 한가운데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꼴이 되고 말았으니.
티폰은 티탄들의 배신에 치를 떨면서도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응징은 그 뒤에 이뤄져도 무방했다.
콰르르릉!
결국 티폰의 의지에 따라, 타르타로스 내 신력이 다시 작동하면서 하늘에서부터 커다란 〈신벌〉이 연우에게로 작렬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연우가 흠칫거리면서 잠시 쇠사슬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빼고 비그리드를 위로 쳐올리는 동안.
화아악!
티폰은 본체로의 현신을 중단하고, 다시 인간 크기의 화신체로 되돌아왔다. 우선 쇠사슬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병신 새끼.”
갑자기 연우의 비웃음이 귓속말처럼 바로 옆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퍼억!
“……컥!”
비그리드가 뒤쪽에서부터 그의 오른쪽 등판을 부수고, 가슴을 헤집으면서 튀어나왔다.
고개를 억지로 돌려 보니, 연우가 그를 보며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티폰은 깨달았다.
지금 바로 이 상황이 연우가 노리던 순간이란 것을.
“언제나 대지모신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를 해서 그런지, 위기에 빠졌을 때에 대한 대비책은 너무 형편없는 것 같은데?”
티폰은 부상을 입은 상태로 다시 텔레포트를 시도하려 했지만, 그사이 쇠사슬이 사방에서 달려들면서 단숨에 그를 묶고 말았다. 마치 번데기가 되어 버린 누에고치처럼.
그렇게 되자, 발동하려던 그의 신력은 쇠사슬에 의해 강제로 정지되고 말았고.
연우는 녀석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바로 그 틈을 노려 손을 활짝 펼치면서 단숨에 녀석의 안면을 움켜쥐었다.
기나긴 시간을 지나 드디어 하데스의 원수를 낚아채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 안 돼……!”
티폰은 연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직감적으로 깨닫고 비명을 내질렀지만.
“삼켜라.”
연우는 녀석을 비웃던 그대로 하데스의 식령검을 발동시켰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티폰’에 대한 식령(食靈)을 시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