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52화 (552/862)

2화. 크로노스 (2)

콰드득-

티폰을 이루고 있던 신의 인자들이 맹렬한 속도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아악! 말도 안 되는……! 이딴 우스꽝스러운 놀음에 내가 놀아날 것 같으냐!”

티폰은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어떻게든 연우와 하데스의 식령검을 떨쳐 내려 했다.

그는 천계의 올림포스에 오른 이래, 연우에게 식령을 당하는 여러 신과 악마들을 보면서 비웃음을 던지곤 했다.

특히 이번에 기어 다니는 혼돈의 성역에서 몰살당하다시피 했던 사절들을 가장 비웃었다.

오죽 못난 놈들이었으면 한낱 저런 함정에 빠지는 건지, 그리고 어찌 ‘식령’이라는 말도 안 되는 행위에 당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식령(食靈)이란 말 그대로, 영혼이 잡아먹힌다는 뜻.

그 존재가 초월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쌓았던 모든 업과 세월이 송두리째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과 악마로서는 그냥 단순한 소멸보다 더 치욕적인 죽음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자신이 그딴 꼴을 당하게 될 줄이야!

『헬리오스! 셀레네……! 대체!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티폰은 연우와 겨루기 시작한 이후로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된 티탄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곳으로 오라면서 강제로 채널링까지 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

『…….』

침묵이었다.

분명히 채널링은 연결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그의 부름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티폰이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 배신자들이 기어코……!』

티폰은 애당초 티탄을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타르타로스의 탈환 이후, 올림포스로 올라가는 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기가스는 올려보냈으면서도, 티탄들만큼은 이곳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명분은 에레보스로 도망친 올림포스의 대신들이 언제 되돌아올지 모르니, ‘본거지’인 타르타로스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티탄들을 올림포스로 데려갔을 경우, 그들이 신위를 차지한 뒤 어떻게 나설지 몰랐기 때문에 이를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타르타로스는 이미 그의 성역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 그곳에 티탄들을 몰아넣는다면, 녀석들이 설사 몰래 어떤 작당을 부린다고 해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사냥개로서의 쓰임이 다했으니, 만약 빈틈을 보인다면 일거에 쓸어버릴 계산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설마 먼저 뒤통수를 맞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티폰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실책을 범한 셈이었다.

『우리가 배신자라? 다 죽어 가는 우스운 꼴을 하고서도 여전히 헛소리만 지껄이는구나, 티폰.』

그때, 점차 흐려지는 티폰의 의식 속으로 테이아의 목소리가 채널링을 통해 귓가로 울려왔다.

비웃음으로 가득한 목소리.

『네놈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뛸 수 있었던 것은 대지모신의 가호 때문이었고, 하데스를 거꾸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왕이셨던 티탄의 ‘왕관’을 도중에 가로챘기 때문이 아니었더냐? 그 ‘왕관’은 원래대로라면 우리의 것. 그것을 훔친 도둑놈 주제에, 위세를 좀 부릴 수 있었다고 해서 네놈이 정말 왕이라도 되었던 줄 알았더냐?』

『내가 없었더라면 끝까지 비루하게 살았을 놈들이……!』

저들에게 힘을 나눠 주었던 티폰으로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여태껏 자신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고분고분하기만 하던 사냥개 주제에 이빨을 잔뜩 들이대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럴수록 테이아의 비웃음은 계속 커져 갔다.

저 멀리, 티탄들이 물러난 자리로, 테이아가 거신화를 이룬 에오스의 어깨 위에 올라탄 채 이쪽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비루하게 살았을 테지. 하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가 왔던 올림포스로 되돌아가 다시 지고(至高)의 왕관을 쓸 것이고, 너는.』

테이아의 한쪽 입술 끝이 크게 비틀렸다.

『여기서 갈가리 찢긴 채로, 병신처럼 하데스의 후인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 되고 말겠지. 꺄하하! 누가 더 비루한 신세인지 모르겠구나.』

테이아는 손을 가리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즐거워 죽겠다는 듯.

“테이아아아아!”

티폰은 머리 한편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하지만.

뚝!

테이아는 보라는 듯이 그와 연결되어 있던 채널링을 완전히 차단시키고 말았고, 뒤이어 다른 티탄들도 이에 질세라 티폰과의 연결을 속속 차단했다.

[테이아를 비롯힌 종족 ‘티탄’이 신의 사회, ‘올림포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새로운 신의 사회, ‘티탄’이 성립되었습니다.]

[‘티탄’의 목록]

최고신 테이아

주신 셀레네

주신 에오스

대신 히페리온

……

[신의 사회, ‘티탄’이 ‘올림포스’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티탄’과 ‘올림포스’와의 적대 관계가 성립하였습니다.]

[동맹 관계도에 큰 변화가 더해집니다.]

[신의 사회, ‘티탄’이 대신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히든 스테이지, ‘타르타로스’의 주인이 테이아로 변경되었습니다. ‘타르타로스’가 ‘티탄’의 성역으로 선포됩니다!]

“으아아아아!”

티폰으로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머지 가만히 있어도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설마 대신전에 남아 있던 티탄들까지 움직여서 탈취를 해 버릴 줄이야!

더구나 선전 포고를 하고,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은 아예 자신들과 갈라서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테이아와 티탄들은 이미 대규모 포탈을 열어 속속 전장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중이었고.

그에게 처박힌 하데스의 식령검은 더 맹렬한 기세로 그의 신력을 송두리째 탐닉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티폰은 이리저리 발버둥을 쳤다. 날개가 부서지고, 꼬리가 조각 나고 있었다. 격은 이미 바닥까지 곤두박질치며 그가 여태껏 쌓아 온 모든 업이 강탈당하고 있었다.

[티폰이 거세게 저항합니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오만의 성질을 드러내며 티폰의 저항을 무력화시킵니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식탐의 성질을 드러내며 더 게걸스럽게 신력을 흡수합니다.]

[죄악석(오만·식탐)이 흡수 중인 신력에 아주 만족해합니다.]

연우는 녀석에게로 더 깊게 하데스의 식령검을 밀어 넣으면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티탄과 기가스 간에 주도권을 둔 자잘한 신경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수장이 위기에 처한 와중에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통수를 칠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 이 정도면 거의 뒤통수가 아니라 앞 통수 수준이었다.

「우리 인성왕께서 감탄할 정도라니. 티탄들도 제법인데? 주인, 좀 더 분발해야겠어. 그러다 지금 자리를 저놈들에게 빼앗길 수도 있겠……!」

‘좀 닥쳐.’

연우는 깐족대기 바쁜 샤논에게 한마디를 던지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티탄과 기가스가 완전히 갈라섰다면, 그로서는 아주 잘된 일이었다.

가뜩이나 올림포스와 타르타로스를 한꺼번에 물리칠 정도로 대단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저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알아서 전력이 쪼개지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이간계로 반목을 더 크게 끌어내어 저들끼리 전력을 갉아먹게 할 수도 있을 테니. 어부지리를 노리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이 너무 순조롭게 풀린 셈이었다.

그러던 그때.

“거래! 거래를 하자! ###!”

티폰이 다급한 목소리로 연우에게 소리를 질렀다. 식령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중심핵까지 위협을 당하자 안달이 난 것이다.

녀석의 얼굴은 많이 파리해진 상태였다. 톡 하고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와르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거래?”

“그래! 거래! 손을 잡자!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대신에 휴전을 하자!”

연우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한때, 제우스와도 견줄 정도로 강했고, 하데스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신들의 우두머리가 이렇게 형편없이 몰락하게 될 줄이야.

처음 타르타로스에 들어왔을 때, 달처럼 거대한 눈을 뜨며 위압감을 뽐내던 그 장본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런 말을 내뱉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는 걸까?

하지만 티폰으로서는 그 나름대로 이 위기를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티탄들에 대한 원한도 원한이지만, 그는 결코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란 그에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으니까.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을 갑자기 받아들이기엔 삶에 대한 그의 집착이 너무 강렬했다.

어떻게 차지한 자리던가!

빛 한 점 제대로 들지 않는 감옥에 갇힌 채, 비루한 꼴로 보낸 세월만 수천 년이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이를 악물면서 기회를 엿보았고, 드디어 세상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제야 겨우 빛을 보게 된 셈인데…… 아직 제대로 위세를 부려 보기도 전에 몰락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로서는 더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고, 연우가 무엇을 원하든 간에 그 조건들을 다 들어 줄 마음이 있었다.

“그 말은 내가 원하는 건 전부 들어주겠단 뜻인가?

“그래!”

“무엇이라도?”

“그렇다!

[티폰이 신의 언령으로 계약을 제안하였습니다!]

언령으로 한 약속은 지키지 않을 경우, 그동안 쌓은 신화가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독주였다.

그런데도 먼저 나서서 그런 독주를 마셨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위급하단 뜻이겠지.

실제로 그는 중심핵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노이즈가 낀 것처럼 영체도 크게 흔들렸다.

티폰의 말이 저절로 빨라졌다.

“무엇을 원하지? 타르타로스? 하데스의 유물? 그도 아니면…… 아! 너는 칠흑왕의 후계자일 테니, 그의 사도인 크로노스의 사체라도 필요한가? 그렇다면 거기서 시정을 채취하는 법도 같이 가르쳐 주마!”

연우는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느끼는 거지만.

제아무리 잘난 척을 해 대도, 결국 살고자 하는 의지는 필멸자이건 초월자이건 간에 다를 바가 없었다. 정말 대단한 존재들은 그런 죽음에서 초연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가령, 하데스 같은.’

연우는 은인을 다시 한번 더 떠올리면서 크게 웃었다.

피식!

“저, 정했나……?”

티폰도 억지웃음을 지었다. 연우가 마음을 먹었다고 여긴 것이다.

“어.”

“그럼……!”

“네 목숨.”

환하게 웃으려던 티폰의 얼굴이 순간 연우가 던진 조롱에 딱딱하게 굳었다.

연우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목숨, 내놓으라니까.”

“###!”

티폰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지만.

[신의 언령이 작동하였습니다.]

시스템이 돌아가면서 겨우 남아 있던 중심핵까지 송두리째 하데스의 식령검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 돼애애애앳!”

티폰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나마 형체라도 유지하던 영혼마저 그대로 하데스의 식령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식령에 성공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의 최고신 티폰을 식령하였습니다. 그가 이룬 모든 신화가 전이됩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5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정화가 시작됩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의 상황이 천계에 널리 알려집니다!]

[동맹군, ‘니플헤임’이 크게 환호합니다.]

[동맹군, ‘천교’가 당신이 이룬 위대한 승리에 찬사를 보냅니다.]

[동맹군, ‘동마왕군’이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입니다.]

[연합군, ‘아스가르드’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후퇴에 대한 논의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연합군, ‘올림포스’가 최고신의 패배에 공황 상태에 잠깁니다. 새로운 최고신에 대한 논의를 나누는 한편, 독립을 선언한 ‘티탄’에 강한 적의를 표시합니다.]

……

[중립, ‘데바’가 침묵합니다.]

[중립, ‘절교’가 침묵합니다.]

……

[신의 사회, ‘말라흐’가 당신의 승리에 찬사를 보냅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막바지에 접어든 전장을 보며 아주 즐거워합니다.]

[비마질다라가 당신의 승리에 크게 만족해합니다. 위대한 전사에 좀 더 가까워졌다며 축전을 보냅니다.]

[케르눈노스가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다수의 신들이 당신의 승리에 침묵합니다.]

[다수의 악마들이 당신의 성장 속도에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사회들의 반응도 아주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연우가 처음 계시록을 얻고 났을 때처럼 크게 충격받은 모습을 보였다. 제 아무리 헤라클래스가 도와줬다고 해도, 최고신의 죽음은 기어 다니는 혼돈의 죽음보다도 더 크게 와 닿을 수밖에 없을 테니.

그리고.

연우는 정화가 이뤄지는 와중에 티폰의 신력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특징이 너무 달라, 과연 한꺼번에 수용이 가능할까 싶은 것들.

하나는 거신화를 이룬 티탄들에게서도 흔히 느낄 수 있던 것. 크로노스의 신력이었다.

지이이잉-

크로노스의 신력은 예전에도 비슷한 현상을 보였던 것처럼 전부 칠흑왕의 형틀 쪽으로 흡수되었고.

남은 하나는.

‘대지모신.’

티폰이 신으로 모시던 이의 것이었으니.

그것을 건드린 순간, 연우는 의식이 한순간 저 멀리 있는 어떤 의식 세계와 강제로 접촉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화아악!

자신을 둘러싸던 세상이 전부 바뀌었다.

그리고 바로 정면에는.

내. 것.

네. 가. 또. 가. 져. 갔.

대지모신이 그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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