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크로노스 (3)
세상을 전부 채울 듯 엄청난 크기로 모습을 드러낸 대지모신은, 자신에 비하면 먼지 크기밖에 되지 않을 연우를 보면서 분노를 토해 냈다.
하지만.
연우는 왠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도 타르타로스를 탈출할 때에는 너무 크게 보였었는데…… 아니야.’
티폰과 맞닥뜨렸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그 존재감이 숨 막힐 듯 컸던 녀석이 지금은 오히려 가소롭게 보였듯이, 대지모신도 그전만큼 거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대지모신이 가진 격은 여전히 큰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마성과 합일을 이루는 동안에는 절대 작지는 않았으니.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기어 다니는 혼돈.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
딱 그 정도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이대로 부딪쳐도 해볼 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서 연우는 그런 자신감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대지모신은 그런 연우의 기색을 느꼈는지 인상을 더 크게 일그러뜨렸다. 그녀에게서 풍긴 기세가 더 살벌하게 불어닥치면서 그림자가 쭉 올라와 연우를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
하지만.
화아아-
연우는 자신의 격도 숨기지 않고 개방했다.
모든 것을 태울 것 같은 뜨거운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대지모신의 압박을 날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 기세가 마찰하며 스파크가 크게 튀어 올랐다.
둘이 가진 격이 워낙에 방대하다 보니, 스파크도 웬만한 불기둥보다 훨씬 컸으니.
최악!
그중 일부가 대지모신의 뺨 위를 훑고 지나갔다.
대지모신은 아주 잠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것처럼, 거대한 손을 천천히 들어 뺨을 가볍게 매만졌다. 그리고 손끝에 신력이 핏물처럼 묻어나는 것을 보고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또 지랄 발광을 해 대겠군.’
연우는 비그리드를 세게 쥐었다. 이제 녀석과 본격적으로 부딪치리라 예상한 것이다. 거의 바닥을 보이려던 드래곤 하트도 초재생력을 바탕으로 다시 마력이 차올라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대지모신이 어떻게 나서기 직전, 그녀 앞으로 벼락이 하나 내리꽂히더니 그런 대지모신을 달래기 시작했다. 페르세포네였다.
대지모신은 그런 자신의 사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조용히 고개를 연우 쪽으로 돌렸다. 여전히 강렬하게 빛나는 눈동자에서는 그에 대한 탐욕이 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쿠쿠쿠-
대지모신은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곧 어둠이 몰려와 그 모습을 삼켜 버렸다.
연우는 굳이 그런 대지모신을 쫓지 않았다. 아주 잠깐 여기서라도 녀석과 결착을 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
연우는 여기서 싸워 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은 티폰에게 남아 있던 대지모신의 신력이 아주 잠깐 동안 빚어낸 의식 세계.
싸워 봤자 쓸데없이 힘만 소진할 뿐이었다. 그저 대지모신은 티폰이 죽은 데 놀라 연우가 가진 힘을 확인하려 모습을 잠깐 비친 것일 테지. 아마 본체는 이곳이 아닌 천계에 있을 게 분명했다.
대신에 그 자리에는 페르세포네가 남아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드님,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리도 크게 장성하셨군요.”
이번에는 연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들?
“무슨 개 같은 소리지?”
“그이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으니, 따지자면 당신은 저희 부부의 양자나 다름없……!”
촤악!
“쓸데없는 소리를 더 지껄이면 그냥 그 주둥이부터 찢어 주지.”
연우는 가차 없이 휘둘렀던 비그리드를 아래로 내리면서 으르렁거렸다. 황금빛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나자, 주변의 대기도 똑같이 우르르 떨렸다.
페르세포네는 목 언저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웃는 낯 그대로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런. 농담이 통하질 않는 분이시네요. 하여간 사왕좌라는 자리가 원래 그런 걸까요? 우리 그이도 유머 감각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당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니 말이죠.”
연우의 눈살이 더 크게 찌푸려졌다. 비그리드를 쥐는 손길에 힘이 바짝 실리는 것을 보자, 페르세포네도 한 발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알았어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말고, 용건이나 이야기하라는 것이겠지요? 정말로 재미있어요. 중간에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도중에 되감기긴 했다지만…… 그래도 그사이에 이만한 발전이라니. 정말이지 탈각과 초월까지 이룬다면 어떨는지.”
페르세포네는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는 듯이 살짝 소름이 돋은 자신의 팔뚝을 매만지면서 싱긋 웃었다.
“어쩌면 올포원, 그가 그리도 간절히 바라던 것을 당신이 이루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연우는 페르세포네가 지껄이는 말이 무엇이든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로서는 하데스의 사랑을 배신으로 갚고, 올림포스를 몰락으로 이끈 그녀에게 호의를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
다만, 그가 지금 이 자리에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순전히 하데스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다.
그러다.
페르세포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요.”
제안.
티폰이 던졌던 것과 똑같은 말.
“티탄들이 통수를 치고 나니, 뒤가 많이 간질간질한가 보지?”
연우는 한쪽 입술 끝을 크게 비틀었다.
페르세포네는 약간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극이라도 하는 듯한 톤이었다.
“아니라고 해 봤자 그저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겠죠? 맞아요. 우리는 지금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한 상태에요.”
“졸지에 타르타로스를 빼앗겨 버렸으니까.”
“맞아요.”
으득!
여태껏 여유롭기만 하던 페르세포네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하긴 이가 갈릴 수밖에 없겠지. 가만히 있다가 겨우 차지했던 소중한 타르타로스를 눈앞에서 홀라당 뺏기고 만 셈이니.
“그래서…… 저희는 지금부터 티탄들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가할 생각이에요. 그러니.”
“그동안에는 서로 손을 잡든, 휴전을 하든,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말자?”
페르세포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역시 당신과는 이야기가 잘 통해서 좋아요. 때에 따라서는 아주 유연하게 굴 줄 아니까.”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개판이로군.’
우스워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설마 페르세포네와 대지모신에게서 먼저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만큼 타르타로스를 잃은 것에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단순히 배반자인 티탄에 대한 감정적 보복인 걸까?
이대로 티탄에 뒤통수를 맞은 채로 가만히 있는다면, 다른 사회들에게 얕보일 수 있으니 본보기 삼아 응징을 가하려는 차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왠지 모르게 그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단순히 타르타로스를 유실해서 저런 건 아닐 것이다. 천계로 올라간 이상, 저들에게 타르타로스는 그저 쓸모없는 불모지에 불과할 테니. 도리어 게릴라들만 넘쳐 나고, 언제 올림포스의 대신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머리 아픈 전장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계속 욕심을 부리는 이유.
타르타로스에 절대 그들이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럴 만한 건, 딱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크로노스.’
티폰이 유용하게 사용하고…… 티탄-기가스가 하데스와 디스 플루토를 무너뜨릴 때 유용하게 사용했던 크로노스의 시정에 여전히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라면, 저들이 저러는 것도 말이 되었다.
여기서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사실 페르세포네와 굳이 손을 잡지 않아도 된다. 그저 암묵적으로 불가침 협정만 맺어 놓고, 양면 전술을 펼쳐 티탄을 에워싸 무너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동시에 두 적을 맞닥뜨린 티탄은 패배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그 뒤에 기가스를 상대하는 것이, 어차피 연우로서는 아주 좋았다. 그 와중에 저들끼리 전력도 상당히 손실될 테니.
그러니.
이득을 따진다면, 페르세포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옳았다.
‘하지만.’
연우는 눈을 살짝 감았다.
지금도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타르타로스를 탈출할 당시를.
압도적인 무력으로 타르타로스를 집어삼키려던 대지모신. 차갑게 웃고 있던 페르세포네. 최후를 직감하던 하데스와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후왕(後王)이라며 어떻게든 살라고 말하던 포세이돈. 아테나. 헤르메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등.
그들의 모습들이 이리도 절절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촤아악!
연우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비그리드를 아래에서 위로, 수직으로 쳐올렸다.
그러자 페르세포네의 몸뚱이 위로 비스듬하게 붉은 혈선이 쭉 그어지더니.
퍼엉!
단층을 따라 좌우가 미끄러지면서 작은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 나 터져 나갔다.
츠츠츠-
조각조각 난 살점들 위로 그림자가 올라오면서 다시 페르세포네의 화신체가 나타났다. 방금 전에 멀쩡한 화신체를 잃은 것에 고통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매몰찬 연우의 대답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연우에게 강한 격노를 보였다.
“감히……!”
“헛소리 지껄일 생각 마라.”
연우는 페르세포네의 말허리를 끊으면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었다.
“티탄이나 너희나 내 눈에는 똑같긴 마찬가지야. 대지모신까지, 무덤이나 제대로 마련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잊고 있었군요. 당신은 유연한 것 같으면서도, 또 때로는 머저리들처럼 아주 뻣뻣하다는 것을요.”
“그만큼 줏대가 강하다고 해 두지.”
페르세포네는 기도 차지 않는 연우의 말에 인상을 더 크게 일그러뜨리다, 끝내 길게 숨을 고르면서 평정을 되찾았다.
후!
그리고 다시 화사하게 웃는 낯으로 돌아와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서시니, 저희도 그 기대에 상응할 만큼 나서는 수밖에요.”
고상한 척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 너희도 티탄처럼 똑같이 짓밟아 주겠다는 선전 포고인 셈이었다.
“기대하지. 아 참, 그리고 주는 사람의 성의도 있으니 선물은 잘 받아가겠어.”
“무슨……!”
페르세포네는 또 연우가 무슨 꿍꿍이수작을 부리려는지 몰라, 웃는 낯이 다시 흐트러지려는데.
쿠쿠쿠!
갑자기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의식 세계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의 작용에 따라, 심상 세계에 대한 침탈(侵奪)을 시도합니다!]
페르세포네는 그제야 연우가 뭘 하려는지 깨닫고, 인상을 완전히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더 이상 여유 따윈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 임시 세계마저 먹어 치운다?
그건 단순히 이곳을 형성하던 대지모신의 신력뿐만 아니라, 이곳에 투시하던 대지모신과 페르세포네의 의념 일부까지 강제로 뜯어 먹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의념이 도중에 끊어져서야, 제아무리 대신격인 그녀라 해도 상당한 타격일 수밖에 없는바. 재빨리 의념을 거둬들이려 했지만,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이미 이곳은 연우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처음에 연우가 감정적으로 첫 화신체를 베어 냈던 것이 사실은 함정이었단 것을. 두 번째 화신체를 드러낼 때는 더 많은 의념을 투시할 수밖에 없을 테니, 일부러 그런 상황을 유도해 낸 것이다.
설마하니 이딴 식으로 앞 통수를 맞게 될 줄이야.
결국 페르세포네는 처음으로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고.
“이 개 같은 작자가!”
“펜리르가 그 말을 들으면 아주 좋아하겠어.”
연우는 짐짓 여유롭게 웃으면서 의식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세계가 통째로 휘면서 연우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침탈에 성공했습니다!]
“꺄아아악!”
페르세포네는 의식의 일부가 강제로 뜯기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천계 쪽으로 튕겨 나고 말았고.
남은 의식은 신력으로 치환되어 고스란히 하데스의 식령검에 먹혀들었다.
와장창창!
의식 세계가 완전히 부서지면서 다시 현실이 찾아왔다.
거기엔 여차하면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지, 샤논이 어느새 그 림자에서 나타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투구 아래, 시퍼런 눈동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기도 안 찬다는 듯한 눈빛.
연우가 왜 그러냐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뭘 그렇게 존경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지?”
「……아냐. 아무것도.」
샤논은 이제 아예 대놓고 뻔뻔하게 나오는 연우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