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크로노스 (5)
“그건……?”
헤라클래스가 놀란 눈으로 연우가 든 꽃잎 방패를 보았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기스야.”
“……!”
헤라클래스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왜 너한테 간 거지?”
“나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겠어. 아테나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이기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막아 내는 신물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군신인 아테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이 이렇게까지 망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신격을 많이 상실했다는 뜻이겠지.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아이기스는 과거에 연우도 소유한 적이 있었던바.
아마 그때 남은 흔적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연우는 혹시 아이기스에 다른 흔적이 있나 싶어 면밀히 살폈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부!”
스르르-
연우의 부름에 따라, 그림자 위로 검은 안개가 생성되면서 부가 나타났다.
수 미터나 되는 아크 리치는 이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사위를 압도하는 거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명을. 받. 듭니다.」
뼈만 남은 손가락 끝이 아이기스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표면을 따라 마력장이 물결처럼 잘게 퍼져 나갔다.
「물체 잔흔 확인. 사념 물색. 기억 복원…….」
부는 한참 무언가를 되짚더니 천천히 턱관절을 움직이며 말했다.
「아테. 나는. 현재. 에레보스. 가. 아닌. 타르. 타로스에. 있. 습니다. 위험에. 처한. 듯. 합. 니다.」
“뭐?”
“그런……!”
좌중이 모두 경악성을 내뱉었다.
연우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위치는? 어딘지 알 수 있나?”
그 순간.
화아악!
아이기스가 다시 빛무리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부는 손을 거둬들이면서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고.
팟!
아이기스의 형체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상처 입은 올빼미가 되었다.
올빼미는 아테나의 눈이 되어 준다는 신조(神鳥).
푸드득-
녀석은 연우를 한 번 응시하더니, 날갯짓을 크게 하면서 단번에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저것이 가는 곳에 아테나가 있을 것이다.
연우는 하늘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곧장 올빼미의 뒤를 따랐다. 다른 일행들도 뒤질세라 곧장 올빼미를 쫓았다.
* * *
파밧, 팟-
『히드라의 독에 당했으니,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쫓아라!』
『다른 건 몰라도, 아테나는 반드시 생포하라는 페르세포네 님의 분부이시다. 절대 놓쳐서는 안 돼!』
타르타로스의 한쪽에 위치한 어느 산자락.
『잘도 귀찮게 하는군. 빌어먹을 계집년.』
기가스의 8대신 중 하나인 시케우스는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권속들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쯤 명왕의 신전에서 티탄들과 박 터지게 싸우고 있을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자신은 이렇게 패잔병이나 뒤쫓는 신세로 있으니 화가 날 수밖에.
하지만 위대한 어머니께서 내리신 명령은 신탁보다도 더 지엄한 것이었고.
‘아테나’라는 존재가 주는 가치는 기가스 진영에서도 아주 큰 것이었다.
『하지만 넘기기 전에 생채기가 조금 나는 정도로, 잠깐의 유희를 즐기는 것은 뭐라고 하시지 않겠지.』
시케우스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머리’로 낳은 딸이자, 새로운 세대의 리더라 할 수 있는 여인.
그 지혜는 과거 몇 번씩이나 그들을 위기로 몰아넣었었고, 위엄은 많은 기가스들의 전의를 꺾어 버리곤 했었다.
당시에 굴욕을 겪은 이들 중에는 그도 있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당시와 상황이 정반대였다. 그녀에게 남모를 음심을 품고 있던 시케우스는 드디어 그 고고함을 꺾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잔뜩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렇게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
『이곳에 신력을 쓴 흔적이 있습니다!』
권속 중 한 명이 저쪽에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디냐!』
시케우스는 혹여 겨우 찾은 아테나의 흔적을 놓칠까 싶어 다급히 그곳으로 움직였다.
넓게 퍼졌던 권속들도 그쪽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누이, 인기가 많아서 아주 좋겠는데?”
멀리서 기척을 최대한으로 죽인 채,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관망하던 한 남자가 조용히 나무 아래로 내려와 바위틈을 보면서 히죽거렸다.
그 속에는 옆구리에 난 상처를 겨우 손으로 지혈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테나가 있었다.
“그…… 시끄러운 입 좀 닥쳐 주지 않겠니, 아레스?”
짜증 섞인 욕설과 다르게, 아테나는 안색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다.
도주를 하던 중에 시케우스와 싸우다 옆구리에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녀석이 사용하던 칼날에 맹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히드라의 맹독’은 본래 신과 악마들도 두려워할 정도로 지독한 독성을 자랑하는바.
그녀가 원래의 신격을 유지하고 있었어도 겨우 진정시키는 게 고작이었을 터, 지금은 에레보스에서 격까지 상당히 유실해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이렇게 버티는 것조차도 용할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겨우 남은 신력으로 독을 억제하고 있다지만.
이마저도 전부 소모하고 난다면…… 정말 끝장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아레스의 깐족거림에 한마디를 쏘아붙이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트랩을 이용해서 추적자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간파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지.
그러니 그러기 전에 최대한 빨리 수를 찾아야만 했다.
‘시스템으로 아이기스의 소유권 이전을 하긴 했지만…… 쉽진 않겠지.’
연우에게 무사히 아이기스가 도착이나 했을까.
그가 자신처럼 타르타로스에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아마 도중에 유실될 가능성이 컸다. 시스템을 이용했다지만, 이곳은 티폰의 영역이니 허가받지 않은 물품이 밖으로 나가는 데도 한계가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만약 아이기스가 무사히 도착한다면.
부디 연우가 자신을 대신해서 잘 사용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결국 이게 고작이구나.’
아테나는 연우를 떠올리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제 떠올려도 항상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존재.
사실 아이기스를 보낸 건 구원 요청이 아니었다. 지난날에 있었던 미안한 마음에 자신의 유품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 뿐.
사실 아테나는 자신의 한계를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다.
에레보스로 이동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의욕이 꺾이고 만 포세이돈 등, 어른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싶어서 그런 것일 뿐.
원래 그녀는 끝까지 타르타로스에 남아 항전을 하고, 적극적으로 올림포스를 탈환할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주전파였다.
그래서 에레보스에서 다시 뛰어 나온 것이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보기 위해서.
‘크로노스…… 크로노스에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비장의 무기가 있어. 하지만 이대로는 근처까지 가기도 힘들겠지.’
문제는 도중에 기가스에 그녀의 행방이 노출되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추적자로 나선 시케우스는 페르세포네와 함께 올림포스의 대신들을 몰락시키는 데 일조한 기가스 8대신 중 하나.
녀석이 가진 힘은 웬만한 신들도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고.
올림포스를 빼앗기고, 천계에서 도망쳐 에레보스로 내쫓기면서 신격과 신위를 박탈당한 아테나로서는 상대하기가 여간 버거운 정도가 아니었다.
더구나 녀석은 과거에 그녀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어, 당시의 원한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저 집요함은 아테나로서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른 기가스들은 나서질 않는다는 거야. 티탄들도 보이지 않고.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테나는 그렇게 머리를 굴리다가 쓰게 웃고 말았다.
신세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적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리도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도 어지간하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진 모르겠지만, 가는 길이 쓸쓸하진 않겠어.’
아테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여전히 바깥의 동향을 살피는 아레스를 올려다봤다.
피를 나눈 피붙이면서도, 평상시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녀석. 안하무인에 제 욕심만 챙기는 녀석이라, 툭 하면 으르렁대던 기억밖에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다른 수많은 제우스의 자식들처럼 아테나 역시 ‘바깥’에서 태어난 자식인 반면에, 아레스는 헤라에게서 태어난 정실 소생이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차이가 있었고.
아레스의 입장에선 학문이면 학문, 무술이면 무술, 인덕이면 인덕 등,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장녀’에게 질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사건건 충돌할 일이 많았고, 언제부턴가 두 사람은 서로 간에 마주치는 것을 꺼려 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이렇게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간만에 항전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아서 같이 나선 것일 뿐.
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불편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왜 굳이 그렇게 날을 세워야 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테나는 여태 아레스의 흉포한 성격이 저질이다 하여 무시를 했다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함께하면서 느낀 점은 ‘이 녀석도 괜찮은 구석이 있었구나’였다.
흉포하다 여겼던 점은 그저 호승심일 뿐이었고, 무식하다 싶었던 것은 결단력이 남들보다 더 빠르다는 뜻이었으니.
이따금 자화자찬이 너무 심해서 질리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녀석의 타고난 성정이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의리도 제법 있는 편이었고.
“몸은 좀 어때? 움직일 수 있겠어?”
아레스는 시케우스 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아테나에게 물었다.
아테나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지금 상태로 움직였다간 더 위험해져. 그러니.”
순간, 아테나의 얼굴에 비장한 기색이 어리더니, 옆에 두었던 창을 지팡이 삼아 천천히 일어났다.
“시케우스, 저 머저리의 머리는 갖고 가야겠어.”
아테나는 절대 자신이 받은 치욕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숙부인 포세이돈과 충돌해서 승리했던 사건은 아직도 올림포스를 비롯해 천계에서도 회자가 되고 있을 정도였으니. 저딴 말을 잘도 지껄여 대는 시케우스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갈 때 가더라도, 응징은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이 미끼가 된다면, 그사이 아레스도 크로노스의 사체에 접근할 수 있겠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레스가 굳은 얼굴로 갑자기 아테나의 창을 빼앗고 강제로 바닥에다 앉혔다.
아테나가 이게 무슨 짓이냐며 화를 내려는데.
“그딴 몰골로 뭘 하겠단 거야? 그냥 거기 앉아 있어. 누이는 손 더럽히지 마. 저놈의 주둥이는 내가 찢어 버리려니까.”
“……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
아테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아레스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감히 천것이 주제도 모르고, 내 누이에게 그딴 마음을 품어? 그냥 죽여서는 모자라지. 그러니 거기 있으라고. 놈의 이목은 내가 어떻게든 끌 테니, 그동안 몸 치료할 방도나 찾아서 크로노스 쪽으로 가.”
“네가 왜? 몸이 안 좋은 내가 할……!”
“재수 없긴 하지만, 누이가 나보다 훨 똑똑하잖아? 사실 에레보스에서 뭘 어떻게 하면 된다고 떠들어 대던 거, 나는 하나도 이해 못 하겠더라고. 그냥 저 새끼들 면상에다 한 방 먹일 수 있다고 하니까 온 거지.”
아레스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나는 누이와 다르게 근육파라서. 근육파면 근육파답게 할 일을 해야지. 그리고 지금 그딴 몸으로 미끼질을 하면 뭐 얼마나 할 수 있다고 욕심부려?”
“안……!”
아레스는 창을 들고 시케우스 등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려 했다. 아테나가 다급하게 뒤쫓아서 안 된다고 소리치려는 순간.
퍽!
갑자기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아레스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등을 타고 커다란 칼날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나를 뭐, 어떻게 한다고?』
대체 언제 나타난 걸까. 시케우스가 아레스의 앞에서 비릿한 비웃음을 던지면서 서 있었다. 아테나의 움직임도 뚝 그치고 말았다.
주르륵!
아레스는 심장을 관통한 칼을 내려다보면서 입가로 피를 게워 냈다. 아테나와 똑같이 히드라의 맹독이 빠른 속도로 전신으로 퍼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동자에서는 분노가 짙게 피어올랐다.
“너, 이 새……!”
『네 누이가 그러지 않던가? 그 입 좀 닥치라고 말이야.』
시케우스는 칼을 뽑으면서 단박에 아레스의 목을 칠 듯이 휘둘렀다.
그 순간, 아테나는 이대로 안 되겠다 싶어 남아 있던 격을 전부 개방했다.
화아악-
콰아아앙!
아테나를 중심으로 강렬한 회오리가 퍼져 나가면서 스테이지를 뒤흔들었다.
제아무리 격을 상실했다고 해도, 그녀는 올림포스의 주신들과도 견줄 정도로 강하던 전사였고.
거기서 퍼지는 파장은 시케우스를 단번에 밀쳐 내기엔 충분했다.
쿠쿠쿠……!
『하하하! 이제야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내는군. 그래. 이거지. 아테나! 나의 아테나여! 그대는 그렇게 고고할 때가 가장 아름다우니! 계속 그렇게 있어 다오. 그래야 내가 꺾을 때의 짜릿함도 크지 않겠는가!』
“미친 새끼가, 감히!”
아테나를 따라 퍼져 나가는 격이 계속 커지고 커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동안 억제하고 있던 중독도 금세 심해져 하얀 팔뚝을 따라 시퍼런 혈관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잔뜩 부풀었다.
하지만 광기에 잔뜩 젖은 시케우스의 눈에는 그런 아테나의 모습마저 너무 황홀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더 미친 듯이 웃으면서 칼을 거세게 휘둘렀다.
콰앙!
칼끝에서 폭사한 기세가 단숨에 아테나의 격을 가르고 지나갔다.
아테나도 똑같이 신력을 끌어모아 터뜨리려 했지만.
울컥!
히드라의 맹독이 어느새 심장까지 다다랐는지, 순간 몸이 잔뜩 경직되고 말았다. 마력 기관도 기능이 정지하면서 신력이 도중에 끊기고 말았으니.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하필이면 이럴 때……!’
아테나는 어느새 눈앞까지 다다른 칼날을 보면서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것은.
가면을 벗은 채로,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연우였다.
그리고.
콰아앙!
갑자기 거친 폭발 소리가 일었다. 뜨거운 열풍이 그녀의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아테나가 뭔가 싶어 눈을 크게 떴을 때.
눈앞에는 방금 전 눈가에 아른거리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한 연우가, 하늘 날개를 활짝 펼친 채로 서 있었다.
“괜찮습니까, 아테나?”
“……응.”
돌아와 줬구나, 정말로.
아테나는 가슴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