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크로노스 (6)
연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중독이 심해져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아테나의 모습에서.
그리고 심장에 칼이 박힌 채 서서히 죽어 가는 아레스의 모습에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졌던 것이다.
가까이 있는 누군가가 떠나려는 모습은 너무 슬프기만 하고, 외롭고…… 짜증이 났다.
연우는 그것이 너무 싫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안도에 찬 눈이 되는 아테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넌…… 무엇이냐?』
그리고 연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저만치 뒤로 밀려나고만 시케우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를 상징하는 칼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크게 흔들리며 잔뜩 금이 가 있었다.
조금만 더 방어가 늦었으면 당하는 건 자신이었으리라.
때문에 시케우스가 던지는 질문은 아주 이상했다.
‘누구’냐가 아닌 ‘무엇’이냐.
그의 눈에 연우는 도저히 같은 신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악마로도 보이지 않았고, 방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으나 용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가깝다면 거인족이 있을 것이나…… 그렇다기엔 거인족 특유의 기질이 느껴지질 않았다.
주로 타르타로스에 머물면서 하계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터라, 시케우스는 연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동료들이 그에 대해 거론을 하더라도, 한낱 필멸자라며 크게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는 명백한 실수였으니.
시케우스는 연우가 아테나와 아레스를 돌보기만 할 뿐, 이쪽에는 별반 신경 쓰는 기색도 보이지 않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그래서 연우를 짓밟아 버릴 요량으로 신력을 잔뜩 끌어 올리는데.
연우가 갑자기 이쪽을 응시하더니 딱 한마디만 던졌다.
“거기, 가만히 있어.”
화아악!
그 순간, 시케우스는 갑자기 전신을 관통하는 찌릿한 느낌에 전신이 빳빳하게 굳고 말았다.
‘어, 어떻게 된…… 몸이……! 우, 우, 움직여지질 않아!’
그로서는 도저히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연우가 내뱉은 건 분명히 언령(言靈)이었다.
신력을 잔뜩 담아 세계의 법칙을 강제로 움직이는 힘. 때로는 그 한 마디로 상대를 구속하거나, 강제로 제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격이 한참이나 차이가 나는 상대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대신격을 이룬 자신에게는 절대 통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시케우스는 그런 언령에 강제로 손발이 묶이는 것을 느껴야만 했으니.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지금 저 앞에 있는 존재가.
신인지, 악마인지, 용종인지, 아니면 거인족인지도 모를 끔찍한 혼종이, 자신이 예상할 수 있는 정도를 이미 아득하게 벗어나고 있단 뜻이었다.
‘저놈은…… 대체?’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신적인 존재들에게 더 강하게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당연했다.
연우는 티폰을 잡고 나서도 여전히 마성과의 합일을 해제하지 않은 상태.
티폰마저도 베었던 그가 주신격도 되지 못한 대신격에게 꿀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
“부.”
「명을. 받듭니. 다.」
그림자가 열리면서 부가 나타났다.
부가 오른손을 옆으로 쭉 내뻗자, 그림자가 위로 쭉 올라오면서 아레스를 그대로 감싸 안았다. 그림자는 살갗을 타고 상처 안쪽으로 들어가 부서진 심장을 메우는 한편, 새어 나오는 신력을 도로 틀어막으면서 강제로 상처를 봉합했다.
왼손으로는 건반을 두들기듯이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림자는 물결처럼 퍼지면서 아테나의 체내로 침투, 빠른 속도로 히드라의 맹독을 먹어 치웠다.
제아무리 강한 독성을 지녔다고 해도, 이미 〈무채독〉을 가지고 있는 연우를 당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부는 연우에게로 연결되는 그림자를 이용해 맹독을 흡수하는 한편, 성화를 꽃피워 남아 있는 잔흔들을 모두 태웠다.
그러자 신력도 조금씩 복구되면서 아테나의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아테나는 놀란 눈이 되어 연우를 바라봤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몸이 회복되고 있었으니.
이 정도는 절대 단순한 응급 처치의 수준이 아니었다.
어떻게 안 보던 사이에 이만큼이나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테나는 그런 대견함이나 놀라움보다도 안쓰럽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만큼이나 성장하기 위해 그동안 대체 어떤 길을 걸었던 걸까. 온통 상처로만 가득했던 길이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잔뜩 아려 왔다.
그렇게 안타깝게 바라보는데.
“카하하! 역시! 내 사도가 될 그릇은 달라도 한참 다르단 말이지!”
아레스도 어느새 기력을 되찾았는지, 연우를 보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게 강한 소유욕이 잔뜩 묻어났다.
아테나는 그런 모습이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지만.
“……사도? 아직도 그 욕심을 못 버린 거였어?”
“당연하지! 저런 물건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천 년이 지나 봐, 저런 게 또 있나! 으흐흐. 대체 뭘로 꼬시지? 아니지. 젠장! 이딴 허약한 몰골을 보여서는 안 넘어오는 거 아냐? 그럼 안 되는데?”
아레스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엔 슬금슬금 저런 모습을 보이면 그녀가 먼저 차단해 버리곤 했지만, 이젠 욕망이 너무 큰 나머지 아테나의 눈치도 전혀 보지 않고 있었다.
아테나는 더 이상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척 보기에도 그보다 훨씬 위계가 높을 것 같은 연우를 어떻게 사도로 삼겠다는 건지.
이따금 저렇게 현실성 없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철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만큼 자신감이 넘쳐서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평상시 아레스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 앞으로 나아가는 연우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테나의 시선이 강렬하게 빛났다.
* * *
「주인.」
“주변에 다른 놈들이 많다. 저 둘, 반드시 지켜.”
「그러지.」
명령을 받은 샤논은 조용히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연우는 여전히 언령에 속박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시케우스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손에서는 비그리드가 잘게 울리고 있었다.
우우웅, 우웅-
마치 연우의 생각이 아주 반갑다는 듯이.
티폰을 잡고 난 뒤에도, 연우는 아직 마성과의 합일을 해제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많은 신격들이 난무하는 타르타로스에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합일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도 있었지만.
마성도 따로 분리를 원하지 않았다.
아니, 녀석은 도리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더 바라고 있었다.
‘더 많은 신격들을 잡아라, 이거겠지.’
이번 합일에서도 마성이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다.
합일 동안에 잡은 신격들의 자아를 자신에게 양보할 것.
기어 다니는 혼돈 때와 똑같은 조건이었던 것이다.
연우로서는 녀석의 속내를 여전히 짐작할 수 없어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점만 받아들이면 자신의 의식과 자아를 바탕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니, 전혀 나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남은 신력들도 전부 자신의 차지인 만큼 전력도 강화시킬 수 있어, 여차하면 마성을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계산들이 전부 머릿속에서 잊힌 상태였다.
아테나가 다친 모습을 본 순간부터.
시케우스를 비롯해 기가스를 하루라도 빨리 타르타로스에서 내쫓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짙은 분노와 다르게 그의 눈빛만큼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움직임도 즉각적이었다.
팟!
연우가 한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신형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케우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건방진!』
시케우스는 비그리드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먹잇감으로 점찍어 뒀던 아테나가 연우에게 보였던 약한 모습이 본능을 충동질했다.
녀석의 격이 개방되면서 언령이 전부 사라지고.
콰르르릉!
엄청난 불길을 휘감은 칼날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쾅!
하지만 마력을 가득 머금은 비그리드는 녀석의 칼을 부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너머에 있던 오른팔까지 그대로 휩쓸었다.
촤아악-
『아아악! 내 팔이……!』
시케우스의 오른팔이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녀석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작 팔 하나 잘렸다고, 아프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 안 될 것 같은데.”
『뒈져 버렷!』
시케우스는 시끄럽다는 듯이 왼팔을 수평으로 그었다. 손끝에서 불길이 한데 집약되었다가 터지면서 큰 폭발을 일으켰다.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정확하게는 연우의 바로 발끝에서.
폭발은 시야를 가리고, 감각을 교란시키기 위한 연막이었을 뿐.
시케우스는 곧바로 뒤로 빠졌다. 그는 잔뜩 흥분한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머릿속으로는 아주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대로 연우와 부딪쳐 봤자 필패라는 것.
인간인지 뭔지 정체도 알 수 없는 혼종과 계속 싸워서는 위험했다.
이대로 아테나와 아레스를 눈앞에서 놓치는 것이 뼈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어디에 있는지 이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테니 금방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후퇴를 했다가, 페르세포네와 다시 전략을 논의하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연우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떤 놈인지 이번에는 반드시 귀담아들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딜 가려고?”
갑자기 뒤쪽 귓가에서 연우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리더니.
스걱!
『크아악!』
이번에는 왼쪽 무릎 아래가 잘려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고통을 호소할 시간 따윈 없었다.
비그리드는 그 뒤로도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쉬쉬쉭-
퍼퍼펑!
연우는 아주 빠른 속도로 시케우스의 남은 사지를 잘라 나갔다. 그럴 때마다 녀석이 어떻게든 발버둥 치기 위해서 갖가지 권능들을 뿌려 댔지만, 그것들도 비그리드가 일으키는 돌풍에 일일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결국 시케우스는 더더욱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퍼억!
비그리드가 복부를 가르고 지면에 고스란히 박혔을 때는, 이상하게 비명을 지르고 싶은 데도 아무 소리도 내뱉을 수 없었다.
비명과 절규는 그저 목 언저리만을 감돌 뿐.
비그리드에 맺혀 있던 검뢰가 그의 신력을 송두리째 태워 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본체에도 강한 타격을 입히고 만 것이다. 진언까지 막혔다는 건, 그만큼 그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었다.
『사……!』
시케우스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지 억지로 말을 쥐어짜려 했지만, 신력을 끌어 올리는 족족 계속 흩어지는 마당에 아무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연우는 녀석을 내려다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티폰이 먼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외롭진 않을 거야.”
『……!』
시케우스는 설마 티폰까지 당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크게 눈을 부릅뜨고 말았지만.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식령을 시도합니다!]
연우는 어느새 손을 활짝 펼치면서 그대로 녀석의 머리통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아아악!
시케우스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그대로 하데스의 식령검에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연우는 녀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비그리드를 지팡이 삼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케우스를 따르던 다른 권속들도 그사이에 샤논을 비롯한 권속들에게 모두 당했는지 주변은 잠잠했다.
그래서 이제 안전하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연우의 품으로 아테나가 와락 안겨 들었다.
연우는 얼결에 그런 그녀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살짝 엷은 미소를 띠면서 천천히 등을 다독여 주었다.
이제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