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57화 (557/862)

7화. 크로노스 (7)

콰콰콰콰-

명왕의 신전을 중심으로 펼쳐진 티탄과 기가스의 충돌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마치 신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신들의 전쟁.

거신화를 이룬 티탄은 산을 집어 던지고, 거센 돌풍을 일으키는 등 타르타로스를 뒤집는 어마어마한 위세를 선보였고.

기가스는 침착하게 권능을 일으키면서 티탄의 공세를 착실하게 무력화시키는 한편, 우선 저들의 힘을 빼놓는 데 주력을 다 했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단연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들이 있었으니.

『내려라.』

콰르릉!

언령을 제 맘대로 다루면서 벼락을 잇달아 쏟아 내거나, 화마를 사방으로 퍼뜨리는 등, ‘신’으로서의 위세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자들이 있었다.

기가스 8대신.

페르세포네의 주관 아래, 대지모신의 축복을 받은 이들.

사라진 올림포스의 12대신을 대신해서 올림포스를 통치하도록 위임받은 이들이었다.

비록 여기에는 티폰과 시케우스가 없어 6명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기가스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이미 신전의 주인 자리를 빼앗겨 더 이상 그들의 성역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전에 못지않은 권능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그건 그만큼 대지모신이 드리운 그림자가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으니.

명왕의 신전은 금방이라도 기가스의 손에 다시 떨어질 듯이 위태롭게 굴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독보적인 존재는 바로 페르세포네였다.

촤촤촤-

페르세포네는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를 따라 휘도는 격의 돌풍이 다른 티탄의 접근을 불허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이쪽에서는 자유롭게 공격이 가능하다는 뜻이었으니.

그녀의 발치에 드리웠던 그림자에서 수십 개의 눈동자가 번쩍 눈을 뜨더니, 곧 지면을 따라 촉 수처럼 곳곳으로 뻗쳐 나갔다.

마치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각각의 눈동자들은 저마다 점찍은 장소를 향해 그림자를 단단히 일으켜 세웠다. 수십 수백 개로 이뤄진 검은 가시가 목표로 한 티탄의 거체를 사정없이 쑤셔 댔다.

『쿠어어……!』

티탄은 고통에 찬 비명을 마구 질러 댔다.

얼마나 소리가 거센지 하늘이 우르르 떨릴 정도였지만, 더 많은 검은 가시가 빈틈을 속속들이 파고들면서 그대로 녀석을 꿰뚫었고.

티탄은 가시들을 어떻게든 강제로 치워 보려 했으나, 신체로 파고드는 독극물에 저도 모르게 몸이 빳빳해지고 말았다.

『히드라의…… 맹독…… 이것을…… 어떻게……?』

한 방울로도 웬만한 하급 신 따윈 가볍게 죽일 수 있다고 알려진 맹독을 어떻게 이들이 취급할 수 있는 거지?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히드라는 원래 과거 티폰의 자식이었던 괴물. 그렇다면 티폰이 구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히드라가 아주 오래전에 헤라클래스에 의해 토벌되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가시에 발린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히드라의 맹독, 네메아 사자의 송곳니, 키메라의 화염 등 다양한 물질이 섞여 있었으니.

그리고 그것을 전부 하나로 융화시키고 있는 건, 대지모신의 신력이었다.

“위대한 어머니께 불가능한 건 없으니까요.”

페르세포네의 웃음과 함께.

파아아!

티탄은 삽시간에 신체 내부에서부터 확 하고 번진 갖가지 신력에 의해 완전히 산화했다.

『그렇군……. 대지모신이…… 끝내 세계수에 닿고 있……!』

녀석은 그 말과 함께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생각을 함부로 읽으려 들다니. 참으로 불쾌한 작자로군요. 그러니 당신들과 같은 불신자들이 죽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거늘. 쯧!”

페르세포네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죽은 티탄을 바라보다, 혀를 차면서 다음 목표를 향해 다시 그림자를 움직였다.

그녀는 이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후방에서 그림자 가시를 숱하게 움직여 댔고, 기가스가 티탄을 사냥하기 용이하도록 적극 엄호했다.

이미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전황을 뒤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다른 8대신들과의 채널링도 관리하면서, 기가스의 진영이 승기를 잡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

하지만 미미하게 찌푸려진 페르세포네의 미간은 영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전투는 압도적인 물량을 바탕으로 기가스에게 유리하게 이뤄지고 있다지만.

정작 명왕의 신전을 함락하는 일에는 도저히 진전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이 명왕의 신전을 끼고서 수비에만 집중을 해 대니, 대결계를 돌파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역시 중심지를 빼앗긴 것이 너무 타격이 커. 결국 전황을 뒤집기 위해서는…… 아테나, 그 아이밖엔 없나.’

과거, 대지모신은 개념신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개념’이라는 것은 법칙을 구성하는 힘이니, 그 자체로 진리라 할 수 있어 모든 초월적인 존재들이 바라 마지않는 자리라 할 수 있었지만.

사실 대지모신에게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족쇄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스스로 모든 세상을 ‘잉태’했다고 생각하는 그녀로서는, 계속 그대로 이면에만 갇혀 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동안 들인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상응하는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그만큼의 몫을 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몫’이라는 것은 전 차원과 우주였으니.

어느 한 명의 절대적인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던 여러 신과 악마들에 의해 토벌을 당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지모신은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자신이 패배를 겪은 근본적인 이유가 ‘개념신’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개념적인 존재이다 보니, 물리적인 힘을 드러낼 수 있는 데 한계가 있고, 모든 사고와 판단 체계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지모신은 오랜 고민 끝에 두 가지 특단의 대책을 내렸다.

하나는 개념적인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사고와 판단의 한계를 넘을 것.

인위적으로 자아를 가짐으로써, 명확했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사고 체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대지모신은 오랜 탐색 끝에 자신과 상성이 가장 잘 맞을 듯한 비에라 듄을 선택했고.

비에라 듄이 영혼석으로 침범해 오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면서 도리어 융화를 선택했다.

자아를 원하는 대지모신과 더 높은 곳을 바라는 비에라 듄 간의 계약이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지모신-비에라 듄은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정리된 사고 체계를 바탕으로, 보다 또렷한 ‘의지’를 지닐 수 있게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나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부터였다.

페르세포네를 강화시키고, 올림포스를 함락했다. 그리고 ‘올포원을 거꾸러뜨리자’는 명분을 제시하면서 다른 신의 사회들과도 조금씩 교류를 가지기 시작했다.

또한, 더 많은 전력을 보유하기 위해 최초의 맹약마저 어기면서 기어 다니는 혼돈과도 손을 잡으려다 불발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아주 순조롭게 이뤄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두 번째 대책이었다.

완전한 강림을 위해 ‘그릇’을 손에 넣는 것.

온전한 육체마저 지니고 있어야 제대로 된 통치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자아를 가졌다고 한들, 계속 개념신으로만 남아 있어서는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유.

대지모신은 법칙의 구속과 인과율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를 원했다.

그래서 튼튼한 그릇을 만들려 노력했다.

처음에 시도했던 것이 세샤였지만,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도를 하려던 마군에 의해 계속 방해를 받다가 연우에 의해 실패했다.

두 번째는 유일하게 남은 반인반룡, 아난타였지만…… 이 역시 연우가 발푸르기스의 밤을 무너뜨리고, 그녀를 구출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릇이 안 된다면 만들어 보자는 뜻에서 클랜 엘로힘을 인신 공양의 제물로 만들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하셨지.’

연우.

그가 바로 문제였다.

뭔가를 시도하려 할 때마다 사사건건 훼방을 놓질 않나, 계속 적의만 드러내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지모신은 비에라 듄의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비에라 듄으로서의 정체성은 없었다. 그만큼 높은 격을 가지면서 많은 변화를 겪은 것이다. 필멸자 때의 기억 따윈, 그저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의 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런데도 연우는 당시의 일을 가지고 계속 꼬투리를 잡아 덤비니 적잖게 거슬렸다.

문제는 연우가 칠흑왕의 후예이기도 한 이상, 계속 무시할 수만도 없다는 것.

‘어머니는 여전히 헤븐윙에 대한 집착을 갖고 계신다. 그에 파생해 명왕에 대해서도 똑같이…… 그건 아마 칠흑왕의 단서가 저들에게 있기 때문이겠지.’

대지모신은 유독 칠흑왕에 대한 탐욕이 대단하니 말이다.

여하튼.

대지모신은 여전히 그릇에 대한 욕망을 떨치지 않았고, 그렇게 세 번째로 점지한 것이 바로 아테나였다.

그래서 페르세포네는 아테나가 타르타로스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즉시, 시케우스로 하여금 그녀를 생포해 오도록 지시했다.

아테나에 대한 시케우스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테나, 그것만 있다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툭!

페르세포네는 갑자기 자신에게로 연결된 여러 개의 채널링 중 가장 굵직한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시케우스의 것이었다.

시케우스가 아테나에게 당했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페르세포네는 공세를 퍼붓던 것을 중단하고, 재빨리 시케우스가 남긴 잔재 사념을 읽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케우스의 고통으로 몰아간 연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케우스의 마지막 기억 속에서, 연우는 이쪽을 보며 비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페르세포네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겨냥한 것 같아 모멸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 그건 분명히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확실했다.

그가 이걸 모를 리 없을 테니.

페르세포네는 분을 이기지 못해 몸을 잘게 떨었다.

부들부들.

‘###……! 카인! 또 너로구나! 또!’

페르세포네로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또 이 녀석이었다.

대지모신과 자신이 꾸몄던 여러 일들을 훼방 놓고, 티폰마저 앗아가더니 또 일을 그르치고 만 것이다!

페르세포네의 머릿속에 협상을 하자는 자신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한 연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받았던 모멸감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네놈만큼은……!’

페르세포네는 연우에 대한 분노를 다시 불살랐다.

하지만 전황은 도저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페르세포네가 다른 대책을 내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쿠쿠쿠……!

갑자기 명왕의 신전을 비롯한 일대 전역이 위아래로 거세게 요동쳤다.

권능으로 인해 빚어진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페르세포네를 비롯해, 전장에 있는 모든 신격들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리고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주변을 빠르게 경계했다.

기가스들은 처음으로 당황을, 티탄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신격을 넘어 주신격에 다다를 만큼 거대한 존재들이 강림을 일으키려 할 때에 나타나는 영압이었다.

그 순간.

콰르르릉-

갑자기 명왕의 신전 앞으로, 지반이 붕괴되면서 거대한 산등성이 같은 것이 불쑥 올라왔다.

그것은 아주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00여 개에 달하는 손과 50여 개에 달하는 머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괴신(怪神).

“브리아레오스!”

페르세포네는 태초에 우라노스와 가이아가 잉태했다는 괴물, 헤카톤케이레스 중 가장 강하다는 괴신을 보고 경악성을 질렀다.

반란을 일으킨 제우스의 편을 들어 그를 승리로 이끌고, 나중에는 티탄을 감시하는 보초역을 맡았다고 알려진 존재들이…… 하지만 그 뒤로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던 이들이 왜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문제는 브리아레오스의 가장 큰 머리 위에 테이아가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이쪽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보내면서.

페르세포네는 그제야 티탄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리아레오스를 비롯한 헤카톤케이레스가 티탄 쪽의 편을 든다면 전황은 팽팽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

어째서 신화 상으로는 원수나 다를 바가 없는 헤카톤케이레스가 티탄의 편을 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결코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명왕의 신전을 탈환하지 못하고, 피해만 잔뜩 입은 채 후퇴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때, 테이아가 이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페르세포네도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림자 가시가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일어나 놈들에게로 쏟아졌다.

콰아아앙!

두 여신의 충돌과 함께 막강한 격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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