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크로노스 (8)
“이런 뇌가 근육으로 가득 차다 못해 오장육부로 내려간 놈이, 어디서 큰 소리야! 저놈은 내가 찜했다니까, 그래도?”
“어허! 신좌도 거북하다면서 떠났던 녀석이 뭘 책임진다고! 저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점찍은 아이이니, 차기 올림포스의 주신이 될 몸으로서 내가 보듬겠다는데 무슨 소리야!”
“하! 신격도 간당간당하던 놈이 무슨.”
“어허! 무엄하도다!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말을 시키더냐?”
“미안하지만, 너희 아버지랑 우리 아버지랑 같은데? 어?”
헤라클래스와 아레스가 서로를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리기 바빴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보는 듯한 모습. 방금 전까지 ‘반가우이, 형제여!’라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구릿빛 근육을 함께 꿈틀거리던 머슬 매니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부끄럽다면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아테나는 아예 자리를 떠 버렸다.
샤논만이 그들을 보다가 히죽거리면서 연우를 돌아봤다.
「주인, 아주 인기가 넘쳐흐르는데?」
“샤논.”
「응?」
“좀 닥쳐.”
「으흐흐!」
예전에는 조용히 하라고 하면 눈치껏 입을 다물기라도 했는데. 이제 샤논은 아예 대놓고 싱글벙글이었다. 연우는 살짝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잘났네, 네가 못났네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헤라클래스와 아레스를 보고 더 짜증이 나고 말았다.
‘그냥 날려 버릴까?’
연우는 한순간 비그리드를 이용하면 둘 다 같이 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충동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아테나처럼 그냥 저들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테나와 아레스의 구출 이후, 연우는 그들을 데리고 헤라클래스의 군영으로 돌아왔다.
간만에 이뤄진 두 사람의 복귀였기에 저항군과 디스 플루토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등, 반가운 해후를 한참 동안 나눌 수 있었지만.
유독 사이가 좋아 같이 티탄-기가스를 무찌르자며 의기투합을 하던 아레스와 헤라클래스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의견 충돌을 보이더니, 결국 서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연우를 누가 차지(?)하냐는 것.
헤라클래스는 당연히 자신이 점찍었다며 그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뻥뻥 쳐 댔고.
아레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연우는 자신의 사도가 될 사람이라며 따져 댔으니.
정작 당사자인 연우는 두 사람 전부에게 별다른 관심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서로가 갖겠다면서 머리채를 쥐어 잡고 싸우는 꼴이었다.
만약 이곳에 다른 사회의 신과 악마들이 없었더라면 벌써 대판 싸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끝까지! 내가 천계에서도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저것은 이 몸이 아주 오래전부터 점찍은 것이니 얼씬거릴 생각도 말라고! 정녕 벌주라도 마실 생각인가!』
왕! 왕왕!
아가레스와 펜리르도 똑같이 서로에게 지분이 있다면서 난입해 끼어드니.
아무리 봐도 그냥 쉽게 끝날 싸움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가면 갈수록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지는구만? 허허! 이거 나도 꼭 참가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나타태자가 그 모습을 보면서 껄껄 웃었다.
그럴수록 연우의 미간에 어린 골은 더 깊어져만 갔지만.
* * *
결국 연우는 끼어 봤자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을 넷은 빼놓고, 남은 이들끼리 새롭게 계획을 구상했다.
아테나는 단순한 군신이 아닌, 문명과 지혜를 담당하기도 한 존재. 그리고 얼마 전까지 티탄-기가스와 전투를 치르면서 저들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기도 하니, 앞으로 펼칠 작전에 대해 조언을 구한 것이다.
“에레보스로 가는 길을 바로 여는 건 반대야.”
아테나는 발언권을 얻자마자, 곧장 그런 말을 던졌다.
그러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놀란 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올림포스의 옛 주신격과 대신격들을 비롯해, 상당한 숫자의 신들이 에레보스로 도피했다는 말을 그녀에게서 들었던 터라, 지금 의견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연우도 마찬가지라,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질문을 던지면서도 연우의 시선은 아테나의 눈이 아닌, 소중한 보물처럼 그녀의 품에 폭 하고 안긴 아이기스에게 고정되었다.
아이기스는 연우가 미리 키클롭스 3형제들에게 부탁해 수리가 거의 끝난 상태. 그런데도 아테나는 그런 아이기스를 도로 아공간에 수납하지 않고, 직접 들고 있었으니. 손끝이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표면을 건드릴 때마다, 이상하게 그의 시선도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그걸 보며 샤논은 혹시 에도라가 없다고 한눈을 파는 거냐면서 낄낄거렸지만.
사실 연우가 아테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이성으로서의 감정보다는…… 뭐랄까, 계속해서 저도 모르게 신경이 쓰이는 동료애에 가까웠다.
동생이 겪은 일에 대해 가장 많은 감정 표현을 해 주고, 탑에 들어온 이후 줄곧 어머니처럼 자신을 돌봐주었던 존재이니 어쩌면 당연히 품을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아테나는 그런 연우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곧 떠오르는 에레보스에서의 상황에 쓴웃음이 걸리고 말았다.
“지금은 에레보스를 열 수가 없기 때문이야. 어떻게 연다고 해도, 준비 없이 그랬다간 도리어 저쪽에 있는 이들이 위험해지고.”
“그게 무슨……?”
“에레보스의 문을 열었던 건, 헤르메스였어. 타천(陀天)을 각오한 무리한 시도였고, 결국…… 강한 신병(神病)을 얻어서 지금은 소멸할 위기야.”
“……!”
“……!”
“……!”
연우를 비롯해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모두가 인상이 굳고 말았다.
헤르메스의 타천. 그리고 신병.
그건 절대 그냥 넘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특히 연우가 받은 충격이 가장 컸다.
그와 가장 먼저 인연을 맺었던 신이었으며.
포세이돈 세대의 올림포스 신들이 한창 그를 경계하고 방해할 때, 가장 전면에서 그를 보호하고 대변해 주었던 고마운 이였으니.
헤르메스는 여행과 전령이라는 신위를 두고 있어 유일하게 인과율의 억제에서 크게 벗어난 존재였으니, 에레보스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좌를 박탈당한 상황에서 억지로 신위를 전개했으니 신력의 상실이 아주 컸을 것이고, 그 반발로 타천과 신병을 얻고 만 것이겠지.
“내가 타르타로스로 돌아온 건, 티탄-기가스와 싸우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헤르메스의 신병을 치유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야.”
순간, 연우의 눈이 빛났다.
“방법이, 있습니까?”
아테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있어. 분명히.”
“그게 무엇입니까?”
“너도 알고 있을 거야.”
“……?”
“크로노스의 시정(屍精).”
“……!”
연우는 티탄들의 거신화를 이루어 내고, 티폰의 신력 중 상당수를 차지하던 크로노스의 기운을 떠올렸다.
“크로노스의 신력만 있다면, 충분히 신병을 치료할 수 있어. 그리고 신좌를 박탈당하면서 상실한 격도 다시 그만큼 채울 수 있고.”
티탄과 기가스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도 같은 방식으로 힘을 복구하겠다는 의미가 틀림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직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이지만.”
아테나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연우는 재빨리 권능을 발현했다.
[권능, ‘연옥로’가 발현됩니다!]
화르륵!
연우 앞으로 뜨거운 불길이 치솟으면서, 그곳에 갇힌 두 개의 영혼이 나타났다.
티폰과 시케우스의 망령이었다.
「아아악! 그만! 제발 그만해! 무엇이든…… 무엇이든 말할 테니, 제발……!」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 크으윽! 어머니께서, 어머니께서 돌아오신다면 너희는 한 줌의 먹이로…… 크아아악!」
연옥로에 갇힌 지 제법 오래된 티폰은 계속되는 고통에 제발 그만두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고,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시케우스는 저주를 퍼부어 댔지만 역시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차피 마성에게 주기로 한 것은 이들의 자아이지, 영혼은 아니기 때문에 자아가 붕괴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하게 고문을 해 사념을 뜯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시케우스는 아직 항복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는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저렇게 당당해도 머지않아 약해질 것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주신격쯤 되는 티폰도 견디지 못하는 걸, 시케우스 같은 망종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지금보다 연옥로의 화력을 조금만 더 더해도 충분할 것이다.
“이, 이건……?”
아테나는 연우가 꺼낸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시케우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티폰까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
그녀는 새삼 연우의 발전 속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연우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연옥로의 불길이 더 거세게 활활 타올랐다.
「아아아악!」
「크윽……! 이 빌어먹……. 카아악!」
“크로노스의 시정을 채취하는 방법, 말해. 그럼 그놈은 지옥불을 꺼 주지.”
시케우스의 망령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연우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런다고 해서, 우리들이 눈썹 하나 까딱할 것 같……!」
「크로노스는 알려진 것과 다르게 죽은 게 아니다! ‘시간’이 멈춰 있는 거지!」
하지만 시케우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티폰이 나서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만해 달라면서.
연우가 시케우스에게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까딱하는데?”
「……티폰! 이게 무슨 짓……!」
「입 닥쳐! 네놈이……! 네놈이 이 고통을 제대로 알기나 하느냐! 나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고통에서 해방되어야겠어! 대지모신을 배신하라면 할 테니, 제발 나 좀 풀어 줘!」
티폰은 아주 다급했다. 꼬리를 흔들면 흔들고, 핥으라면 핥겠다는 듯한 투. 시케우스는 강하게 충격을 받은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피식!
그럴수록 연우는 둘의 하는 모양새가 너무 우습기만 했다.
그토록 잘난 척 굴던 놈들이 이렇게 망가지는 꼴이라니. 어디에도 근엄한 모습은 없었다. 역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은 다 부질없는 허상에 불과했던 걸까.
“자세히 말해. ‘시간’이란 게 뭐지?”
연우는 티폰의 불길을 꺼 주었고, 녀석은 다시 불이 붙을까 싶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 그 전에 약속해다오! 제대로 답변을 하, 한다면 이걸 끝내 주겠……!」
화르륵!
「아아악! 아니다! 그냥 말할 테니까, 제발……!」
다시 연옥로의 불길이 꺼졌다.
티폰의 망령은 계속된 저급 대우에 강한 모멸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것을 가릴 겨를이 전혀 없었다.
「크로노스의 ‘시계태엽’을 이야기한다!」
“시계태엽?”
「그래! 크로노스는 죽음 외에도 시간을 신위로 두고 있다. 시간은 거의 전능에 가까운 영역이니, 살아생전에는 그만큼 뛰어난 권능을 자랑할 수 있었지! 천계의 다른 사회들이 당시 올림포스를 경계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티폰의 말은 계속 쏟아졌다.
「하지만 그러다 끝내 너무 방대해진 신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눌려 정지되고 만 것이다! 계속 움직여야 할 ‘태엽’이 멈추고 말았으니까! 그 자체로 죽음을 맞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럼 그 태엽이란 게, 너희의 갑작스러운 각성과 관련이 있었나?”
「그래! 위대한 어머니…… 아니, 대지모신은 ‘태엽’을 감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 나는 거기서 파생되는 신력을 채취하는 것이었고!」
연우의 눈이 반짝였다.
‘태엽’을 감는 법.
거기에 신격을 상실한 아테나 등과 헤르메스의 신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아테나의 시선도 티폰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럼 그 방법이 뭐지?”
「그, 그게…….」
순간, 티폰은 말꼬리를 흐렸고.
화르륵!
연우는 녀석이 다시 거래를 제안한다고 생각해 불길을 지피려 했다.
그러자 티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아냐! 숨기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태엽’을 찾는 방법을 대지모신과 페르세포네밖에 몰라서 그런 거다!」
불길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야! 믿어 줘! 여기까지 말해 놓고서, 내가 이런 걸 왜 숨기겠나! 크로노스는 그 자체가 정지된 장소이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대려고 하면, 존재도 같이 정지하고 만다! 그곳에서 무작정 ‘태엽’을 찾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고……!」
화르르륵!
「지, 진짜……! 아아아악! 아아 악! 제발! 제발 믿어 줘……!」
티폰의 망령은 다시 불길 위를 구르면서 몇 번이고 호소했다. 자신은 진실을 이야기했노라고, 한 치의 거짓도 없노라고.
하지만 연우는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연옥로를 도로 아공간 속에 밀어 넣었다. 저주에 찬 티폰의 절규도 그 속에 묻혀 완전히 사라졌다.
“…….”
“…….”
아테나를 비롯한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며 연우를 바라봤다.
공포의 대명사나 다름없던 티폰이 저렇게 망가진 것도 놀라울 일이지만,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연우도 놀랍기만 했다.
그들과 같은 신격들로서는 애당초 저런 일 자체를 크게 생각지 못했으니.
하지만 연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우선은 크로노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서 자세한 걸 파악해야겠습니다. ‘태엽’이란 게 뭔지도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 같고.”
“으, 응. 알았어!”
아테나는 금세 신색을 회복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디스 플루토와 저항군들도 재빨리 움직일 차비를 하기 시작했다. 크로노스의 사체가 있는 곳이야 워낙에 유명하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면서.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티폰이 말했던 ‘시계태엽’이라는 것.
그 말을 들었을 때, 동생이 남겼던 회중시계가 떠올랐던 건, 그냥 단순한 우연이었을 뿐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