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크로노스 (9)
크로노스의 사체가 있는 곳.
하늘에서부터 검고 붉은 벼락이 잇달아 쏟아졌다.
콰르르릉, 콰콰쾅!
『이게 어떻게 된……?』
『###…… 명왕이…… 나타났……! 알려야…… 하…… 는데……!』
헬리오스를 따라와, 그가 나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티탄들은 검뢰가 가슴팍을 가르고 지나가자 혼란에 빠졌다.
예상치 못한 습격이 이뤄진 탓이었다.
그들은 연우 일행이 이곳으로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데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명왕의 신전을 탈환하려 하거나, 에레보스로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페르세포네가 있는 기가스 쪽을 노리지 않을까 했었는데…… 설마 인원이 얼마 있지도 않은 이곳을 노릴 줄이야!
외곽에 있던 이들은 연우 일행의 습격을 테이아에게 알리기 위해 허겁지겁 채널링을 열려고 했지만.
푸화악-
“미안하지만, 우리도 최대한 조심히 움직이는 게 좋아서 말이야.”
무언가가 번쩍인다 싶더니, 그들의 거대한 머리통이 동시에 위로 떠올랐다.
나타태자와 이랑진군을 비롯해, 아가레스와 펜리르가 기습해서 녀석들을 빠르게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 속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통쾌하게 웃고 있는 헤라클래스도 있었다.
아테나는 그런 이들을 보면서 조금 놀란 눈이 되었다.
저들 하나하나가 주신격에 다다를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들. 연우는 대체 저런 이들과 어떻게 교분을 가지고,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걸까? 그게 너무 대단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탈각도 이루지 않은 것 같은데…… 티탄들을 압도하고 있어.’
시케우스를 무찌른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개한 검뢰는 그만큼 아테나의 눈에도 강렬하게 인식되었다.
파스스-
그렇게 그 자리에 있던 티탄들이 줄줄이 가루가 되어 봉신이 이뤄지는 가운데.
“움직이죠.”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비그리드를 아래로 내린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연우가 하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아테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우의 뒤를 따랐다. 비록 신좌는 박탈되었을지언정, 여전히 신력은 몸에 남아 있어 웬만한 하급 신격들보다는 훨씬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연우와 아테나가 착지한 장소는 크로노스의 얼굴 위였다.
이제는 너무 기나긴 세월이 지나, 갖가지 수풀로 뒤덮여 그저 거대한 산등성이로만 보이는 곳.
곳곳에 보이는 끝없이 협곡이나 동굴 입구가 이목구비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짐작게 해 줄 뿐이었다.
그리고.
우웅, 우우웅-
연우의 손발에 달려 있던 세 개의 형틀이 일제히 잘게 떨렸다.
아테나가 살짝 놀란 눈이 되었다.
“너……?”
“크로노스는 칠흑왕의 사도였었다고 하니,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연우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사실 처음 타르타로스에 들어왔을 때부터, 칠흑왕의 형틀은 줄곧 크로노스의 사체가 가까워질수록 강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아마 이 신물로서는 그게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한때, 원주인을 추종하던 존재가 이렇게 누워 있으니. 그 속에 원주인의 신력이 여전히 가득히 남아 있는데 공명(共鳴)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테지.
다만, 오늘은 평상시보다 더 가까워서 그런지, 세 형틀의 반응이 다른 때보다 훨씬 격렬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정말 혼자서 괜찮겠어? 같이 갈 수도 있……!”
아테나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 가는 게 훨씬 편합니다.”
아테나는 매몰차기만 한 연우의 반응이 내심 서운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지금의 자신이 따라 들어가 봤자 방해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래도 연우에게 고정된 시선에는 여전히 걱정이 자리했다.
티폰이 했던 말이 계속 귓가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크로노스에 접촉하게 되면, 그 존재도 똑같이 신위에 잡아먹혀 영원토록 ‘정지’하고 만다던 말.
‘태엽’을 감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건, 대지모신과 사도인 페르세포네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도 모른다고 했었지만.
연우는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직접 크로노스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당연히 아테나와 일행들로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지만.
연우는 그들의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켰다.
크로노스가 칠흑왕의 사도였듯, 자신도 칠흑왕의 후예이니. 자격 여부만 따진다면 동등한 입장이나 마찬가지라, 절대 ‘정지’가 발현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리고 여차하면 공허와 쇠사슬을 이용해 밖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을 테니, 걱정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연우의 강한 고집 아래, 일행들은 그가 나올 때까지 주변을 경계하기로 했다.
지금쯤이면 티탄과 기가스가 한창 박 터지게 싸우고 있을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대비책을 마련해 둬야 했다.
“말씀드렸듯이 제가 만약 약속 시간까지 나오지 않거나 한다면, 이 쇠사슬을 끝까지 잡아당겨 주십시오. 그런다면 크로노스의 안쪽 구조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연우는 구속이 풀린 쇠사슬의 끝부분을 아테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크로노스 안쪽이 자칫 미로처럼 복잡할 수 있으니, 미궁에 들어갈 때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아리아드네의 실을 이용한 영웅 테세우스의 전승을 따라 하려는 것이다.
나올 때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그리고 만약 ‘정지’한다면 자신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도록 끄집어내 달라고 아테나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다면 ‘정지’한 자신에게서 사념을 읽어내어 크로노스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 아테나 등으로서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알았어.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
“예.”
연우는 야속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크로노스의 입으로 예상되는 협곡 속으로 몸을 던졌다.
“……부디 무사하길.”
아테나는 연우가 빨려 들어간 어둠 속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기도를 올렸다.
* * *
‘깊어.’
연우는 어둠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끝을 모를 정도로 계속 추락한다.
아니, 이제는 정말 추락하고 있는지도, 별반 느낌이 오질 않았다. 의식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닫힌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지’된 것이라 봐야겠지.
‘의식이야 그래도 어느 정도 격이 있으니 곧바로 ‘정지’하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결국 멈추는 건 시간문제겠지.’
초월적인 존재들에게 있어 감각이란, 단순히 필멸자들이 생각하는 보고, 듣고, 맛을 보는 등의 단순한 오감(五感) 영역이 아니었다.
섭리를 엿보고 세상을 관조하는 느낌. 시공간의 흐름을 느끼며, 그곳을 구성하는 여러 인과들을 감지하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이었다.
온 우주를 굽어보는 절대적인 인식 체계를 가진 채로 있다가, 갑자기 이런 곳에 떨어져 모든 것이 정지되고 만다?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금세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정신력을 지녔다고 해도, 많은 것을 가진 채 유구한 시간을 살아오던 자가 갑작스레 그것을 모두 잃어버렸을 때의 공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
모르긴 몰라도, 저들에게는 이곳이 나락으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달랐다.
이미 이와 비슷했던 고행의 산을 최고 난이도까지 극복했던 경험도 있었고, 시차 괴리를 통해 남들은 절대 겪어 보지 못할 아주 긴 사유 시간을 가져 본 경험도 많았다.
경험의 차이가 있으니 무너질 이유가 없었다.
‘심연과도 얼추 비슷한 것 같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심연 속을, 체감 시간으로 수년이나 겪기도 했던 그에게는 오히려 익숙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장소가 절대 좋은 건 아니었다.
그라고 해서 답답한 것이 좋을까.
결국, 여기서 ‘정지’한 인식 세계를 어떻게든 되찾을 방도가 필요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칠흑왕의 형틀에 기대었겠지만.
‘그 전에…… 이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연우는 심연 속에서 길을 찾았던 것과 같은 방식을 써 볼 생각이었다.
[의념 통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특정한 한 점(點)에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투영한다는 생각으로 의념을 온통 불어 넣었다.
그리고.
의념이 단단히 뭉쳤을 점을 강제로 뒤틀어 버린다는 생각으로, 마음속에 그려 낸 이미지를 구현했을 때.
[심상 개변]
연우는 여태 ‘정지’하고 있던 감각이 강제로 깨어나는 듯한 느낌과 함께.
화아악!
주변이 확 하고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무슨……?”
연우는 큰 충격에 빠져 인상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세상이 정말 밝아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주변은 온통 칠흑처럼 새카맣기만 했으니까.
다만, 그런 칠흑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들이 문제였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왕좌를 차지하고 말겠노라고. 저 미친 작자를 끄집어 내려…….
또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이!
왜. 모습이. 런이렇게 된. 망엉.
수많은 활자들이 물고기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활자들은 이리저리 조합되었다가 분리되면서, 어떤 것은 일기처럼 하나의 글을 이루고, 또 어떤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되기도 했다.
연우에게는 낯이 익은 환경이었다.
“정우의 회중시계 속과 비슷하잖아……?”
회중시계 안에 있던 일기장도 이랬었다.
물론, 그곳은 온통 새하얀 세계였고, 이곳은 칠흑으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온통 활자로만 가득한 세계라는 점이 똑같았다. 동생의 사념체는 바로 그곳에 깊게 잠든 채로 계속 반복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크로노스의 ‘안’이 어떻게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연우는 한순간 가슴 한편에서부터 무언가가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 아주 큰 조각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게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 가는 바가 없다는 점이었다. 무언가 잊은 게 분명한데, 뭔지를 알 수 없으니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연우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활자들을 속독하다 보면, 무언가 찾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레아는 아주 아름다웠다. 그리고 증오스러웠다.
제우스! 그 원망스러운 이름이여!
하지만 연우는 이내 의미 있는 활자들이 전부 크로노스가 과거에 쌓았던 신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우라노스를 꺾어 올림포스의 왕좌에 앉고, 그러다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똑같이 자식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고뇌에 잠긴 내용들. 그리고 제우스와 포세이돈, 하데스에 의해 몰락해 저 시커먼 타르타로스에 갇히기까지.
연우가 올림포스의 보고에서도 본 적이 있었던 성화를 글로 풀어낸다면, 크로노스의 시점에서 말할 수 있다면 딱 저러할 터였다.
그 애절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얼마나 잔뜩 묻어나는지, 연우는 아주 잠깐이나마 자신이 크로노스가 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강한 위화감이 들었으니.
데자뷔(Deja-vu)였다.
크로노스의 시점에서 풀어낸 신화. 그것은 달리 본다면, 크로노스의 ‘일기’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순간.
촤르륵-
갑자기 여러 문장들을 이루고 있던 활자들이 음소 단위로 분리되더니, 마치 레고 조각처럼 새롭게 조립되면서 어떤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전부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었’던 것들.
수천수만 년의 세월 동안, 크로노스의 뱃속에 들어와 ‘정지’하고 말았던 존재들이, 활자의 형태를 빌려 모습을 갖춘 것이다.
그렇게 나타난 존재들만 수백 명이었다.
그것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너는 누구냐.
육성 따위가 나올 수 없으니, 그들의 소리는 모두 문장이 되었다가 다시 부서졌다.
어찌 왕께서 계신 곳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가.
왕을 알현하려는 자, 당연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 예를 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왕의 일부가 될지어다.
하지만 이상하도다.
어째서 그대는 우리의 왕과 같은 힘을 품고 있는가?
분명히 인간일 텐데.
어떻게 우리의 왕과 닮은 힘과.
연신 쏟아지던 활자들이 도중에 뚝 그치더니.
겨우 마지막 한 문장을 갖췄다.
닮은 얼굴을 가질 수 있는가?
“……!”
연우를 위협하던 위화감이 이제는 전신으로 퍼지면서 목을 바짝 조여 오던 그때.
수백의 존재들 너머로, 활자가 다시 조립되면서 족히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 아주 커다란 옥좌를 만들어 냈다. 왕처럼 지고한 신분만이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화려한 장식이 유달리 인상적이었다.
그 위로, 다시 다른 활자들이 뭉치면서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아주 따분하다는 듯이,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채로 앉아 있는 사람.
머리에는 붉은 왕관을 쓰고, 몸에는 검은 제복을 두르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연우를 꽉 조이던 위화감은 이제 턱밑을 지나 영혼까지 비틀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와 반대로, 머릿속에서는 여태껏 놓치고 있던 조각이 점차 모습을 갖추었다. ‘설마?’ 했던 마음이 이제 말도 안 된다며 경악을 내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그리고.
옥좌에 앉은 존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우와 눈이 마주쳤을 때.
눈두덩이 사이로 붉은빛이 감돌았을 때, 연우는 영혼을 짓누르는 위화감을 억지로 떨쳐 내듯이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그것은 절규였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