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61화 (561/862)

11화. 자격 시험 (2)

우라노스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복도는 아주 길었다.

‘올림포스가 이런 형태였나?’

대리석의 기둥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정밀한 세공이 들어가 우아함과 화려함을 겸비하고 있었지만.

사실 연우의 눈에는 그리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전부터 이 너머에서부터 감지되는 무언가에 피부가 따끔거렸기 때문이었다.

연우는 금세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우라노스.

하늘을 다스리며 올림포스를 개창(開創)했다는 초대 주신.

신화상으로는 크로노스에 의해 왕좌에서부터 끄집어 내려지긴 했지만, 그전까지는 온 세상의 하늘을 다스리면서 지상의 모든 존재들을 굽어보았다는 존재.

‘이 정도라면…… 기어 다니는 혼돈보다도 우위인가? 대지모신과도 다퉜다고 하더니.’

연우는 창조신을 비롯한 개념신이나 태초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격을 지녔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대개 자아가 형성되질 않아 존재를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는 다른 태초신들과 달리, 우라노스는 스스로 존재를 갖춰 의사를 내보였다고 하니 개인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우가 우라노스를 보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크로노스와 관련된 수많은 신화들 중에서도 유독 이곳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중심에 우라노스가 깊은 연관이 있을 테고.’

‘태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크로노스라는 존재를 규정짓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라는 것은 확실했다.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미 그는 복잡했던 생각을 크게 한 차례 정리한 상태였다.

크로노스가 아버지와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모른다. 만약 동일 인물이라면 그에 따르는 의문점도 아주 많았지만, 연우는 그것들을 전부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대신에 지금 당장 눈앞에 주어진 현실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태엽’을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내어 가질 생각이었다.

그리한다면 한때 천계의 여러 사회들을 압도했다던 힘을 온전히 자신이 가질 수 있으리라. 더불어 그가 품고 있던 칠흑왕과 관련된 힘도 전부 얻을 수 있겠지.

‘크로노스가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 힘만큼은 어떻게든 가져야겠어.’

이번 사안의 목적을, 처음으로 다시 되돌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라노스가 어떤 존재인지부터 파악해야 해.’

그렇게 재차 생각을 정리할 무렵.

연우는 어느덧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대리석을 깎아 세운 문은 고개를 들어야 겨우 그 끝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높았다. 벽면을 따라 새겨진 것은 우라노스의 신화를 기리는 성화인 듯했다. 대체로 하늘 위에서 우둔한 필멸자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숭배를 받는 내용들이었다.

저렇게 하면서까지 스스로를 띄우고 싶은 걸까. 제아무리 숭배와 신앙이 신격을 떠받치는 중요한 토대라지만, 어쩐지 저걸 빼면 참 보잘것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냉소가 나왔다.

연우는 그대로 문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두둥!

끼이익-

그러자 손끝이 닿기도 전에 대리석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 너머로, 신전 안에 있을 리 없을 것 같은 푸르른 하늘이 나타났다.

푸르면서도 짙은 남색으로 빛나는 어두운 하늘을 따라 수많은 별들이 총총하게 박혀 있었다. 연우로서는 처음 보는 별자리들이 무수히 많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그 아래에는 턱을 따라 새하얀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서 있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별자리를 매만지면서도 아무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지, 이리저리 휘두르는 손길에는 전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어떤 별자리는 모양을 갖추다 말고 잘게 부서지면서 성운이 되고, 또 어떤 것은 아주 크고 화려한 별이 되어 수많은 행성들을 담았다.

연우는 그것을 보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고 말았다.

중년인이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리고 그 결과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만들어질 우주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부수기만 했지, 직접 ‘창조’를 하겠다는 생각 따윈 해 본 적도 없기에.

그럴 엄두조차 내 본 적이 없기에, 연우는 창조가 주는 아름다움에 잠깐이나마 황홀에 젖을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왠지 모르게 한편으로는 그것이 아주 많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여태껏 그가 접했던 ‘칠흑’이라는 것이 창조와 거리가 아주 멀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창조란 곧 질서이니, 최초의 빛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있었다던 칠흑이 질서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부른 지가 언젠데 이제야 온 것이냐?”

그러나 연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건 말건. 중년인, 우라노스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여전히 하던 일에 몰두한 상태로 무심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 순간, 연우는 살짝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이곳은 크로노스의 신화 속. 즉, 크로노스의 무의식이 빚어 낸 가상 세계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여기서 원래 크로노스가 가졌던 성격과 다른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될까? 원래 크로노스가 보였던 행동과 다른 행동을 벌여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원래 없었던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이 가상 세계가 그냥 붕괴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이어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가?

만약 붕괴된다면 ‘태엽’도 같이 묻혀 사라지고 마는 걸까? 그때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될까? 사라지는 건가? 아니면 다시 신화가 재생되나?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그건 ‘태엽’을 찾는 데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크로노스는 자신이 못 다 이룬 미련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다른 어떤 해답을 찾길 바라는 걸까. ‘태엽’은 거기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고민해야 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그만큼 뻗어 나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한한 탓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뭔가 확실한 게 하나도 없으니, 이야기의 축을 크게 틀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해도 막상 문제가 있었다.

연우가 이 시대에 대해 아는 점이 적어도 너무 적다는 점이었다.

우라노스 시대는 제우스 등에게도 너무 머나먼 과거였고, 굳이 조명할 필요도 없는 흑역사에 가까웠다. 그나마 알려진 것들도 대게 각색되거나 사장된 부분이 많았으니 참조할 게 못 되었다.

크로노스의 기억 중 일부가 계승되었다지만, 구멍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 상태였다. 대략적인 사람의 이름이나, 올림포스의 길 따위의 자잘한 배경지식이 전부였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크로노스가 어떤 성격인지를 알아야 뭘 하든가 하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크로노스를 친부라고 생각하며 연기하려고 해도, 정작 그가 어땠었는지 전혀 떠오르는 바가 없으니 연기하기도 애매했다.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게 있어야 흉내라도 낼 것 아닌가.

“왜 아무 말도 없는 것이냐?”

결국 그런 고민의 시간이 우라노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가 인상을 찡그린 채로 뒤를 팍 돌아봤다. 신전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신력도 저절로 움직이면서 연우를 단숨에 옥죄어 왔다.

신이란 존재들은 서열에 민감한 족속들이었고, 대개 자신들이 지닌 격을 드러냄으로써 존재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너와 나의 수준 차이가 이 정도다’는 식으로 격차를 보여 상대의 기를 꺾어 놓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 우라노스는 자신의 아들인 크로노스를 격으로 찍어 누르려 했다.

제 딴에는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양새였겠지만…… 연우로서는 그런 모습이 더 짜증 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는 상대가 과시를 하면 하려 할수록, 그것을 강제로 꺾어야만 성이 풀리는 반골이었으니까. 다만, 그동안에는 냉정한 성격 탓에 가려져 있던 것이, 본격적으로 힘을 갖추면서부터는 불쑥 튀어나오는 편이었다.

“부르신 것은 아버지이시니, 말씀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아버지’라는 단어가 영 어색하기만 했지만. 그런 마음을 억지로 삭이면서 손을 휘저어 우라노스의 신력을 풀어헤쳤다.

순간, 우라노스의 눈가로 이채가 흐르는 것을 연우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우라노스는 언제 그런 모습을 보였냐는 듯, 금세 노한 얼굴이 되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얀! 예나 지금이나 말 한 마디를 지지 않으려 드는구나.”

‘그런대로 적절한 대답이었던 모양이로군.’

연우는 우라노스의 노성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다시 자신을 압박할 줄 알았던 우라노스의 신력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으니.

덕분에 자신이 어떻게 나서야 할지 대강 감이 잡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무래도 연기는 크게 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말을 많이 하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 있으니, 연우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자 했다. 그래서 가만히 우라노스를 바라보았다.

우라노스는 그런 연우의 태도를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영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술에 잔뜩 찌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찌 같은 배에서 태어난 네 형제를 그리도 가혹하게 팰 수 있단 말이냐! 그 때문에 원로들이 너를 문책해야 한다고 얼마나 길길이 날뛰는지 알기나 하느냐?”

‘……아니군. 성격이 완전히 개차반이었던 건가?’

생각을 정정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지금보다 좀 더 막 나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체 어떻게 형제를 때릴 수 있는 건지. 우라노스가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걸 봐서는 망나니도 보통 망나니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자식들 중에 막내가 아니었나?’

막내한테 두들겨 맞는 형제라.

오히려 그 낯짝이 더 궁금해졌다.

그때, 우라노스의 노성이 더 커졌다.

“지금 우리들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는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가이아, 너를 잉태한 어미라고 뻔뻔한 낯짝을 하고 있는 대지모신은 날이 갈수록 괴상한 것들을 쏟아 내면서 호시탐탐 우리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또 어디 그뿐이냐! 믿을 수 없는 악마 놈들은 그저 어떻게든 그 사이에서 우리를 등쳐 먹을 생각만 하고, 더러운 용종은 우리에게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도 제놈들 일이 아니라며 수수방관하고 있지.”

우라노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방금 전까지 수놓던 별자리가 하나둘씩 제자리를 이탈하며 바닥에 투둑, 투둑, 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거기다 천마(天魔)는 우리를 이용해 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가두겠다며 미친 망아지 따위 처럼 날뛰니……!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만한 곳이라고는 같은 친지며 동족밖에 없거늘, 너는 어찌 하루가 다르게 적을 만들고 끝내 형제 사이에서도 등을 돌리게 만든단 말이냐!”

“…….”

연우는 여전히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우라노스의 말에서 정확한 시대적 배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라노스의 시대는 아직 그들이 천계라는 틀에 갇히지 않아 여러 우주와 차원을 종횡하면서 자유를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그만큼 많은 갈등을 반복하던 혼란스러운 시기이기도 했던바. 지금은 그런 혼란이 가장 최고조로 오른 시점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천마가 이렇게 일찍 활동하기 시작했었나?’

올림포스가 천계에 갇혔던 시기가 제우스 시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천마는 생각보다 일찍 활동한 모양이었다.

우라노스는 그런 모습을 여전히 반항이라고 받아들여 더 잔뜩 성을 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아!

우라노스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사이에 노화라도 겪은 듯, 얼굴에 잔뜩 주름이 져 있었다.

“아들아.”

연우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방금 전과 달리 더 이상 힘이 느껴지질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내게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질 않다. 오히려 하루하루를 이리 이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많이 벅찬 상태란다…… 그러니 부디, 너희들이 더 이상 쓸데없는 일로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지 않고 한마음 한뜻으로 이 위기를 슬기롭게 타개해 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

연우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우라노스는 염려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 미련 섞인 어투로 물었다.

“할 말은…… 없느냐?”

“없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 네게는 아무 소용이 없겠지.”

우라노스는 더 이상 떠들어봤자 자신의 입만 아프다 여기고 더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에 시름에 젖은 얼굴로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칠흑의 늪은? 아직이냐?”

‘칠흑의 늪?’

처음 듣는 단어.

하지만 연우는 그것이 이 퀘스트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칠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걸 봐서는 그냥 놓칠 수가 없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연우 딴에는 칠흑의 늪이 어떤 장소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두루뭉술하게 대답한다고 한 것이었으나.

문제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라노스가 듣기엔, 망나니인 막내 아들 녀석이 시킨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농땡이를 피운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런 우라질 놈이! 결국 아랫것들과 온종일 술만 퍼마시느라, 여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단 뜻이로구나!”

눈이 회까닥 뒤집히고 만 우라노스는 마침 손에 잡힌 집기를 냅다 연우에게로 집어던지고 말았다.

빠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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