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자격 시험 (3)
터벅. 터벅.
“…….”
연우는 인상을 팍 찡그린 채로 우라노스의 신전을 나서야만 했다. 그의 양쪽 눈두덩이에는 시퍼런 멍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퀘스트를 시작하자마자 당하는 게 이딴 꼬락서니라니.’
왜 대체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짓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는 건지.
처음 우라노스가 던진 집기를 본능적으로 피한 게 실수였다. 사실 크로노스의 육체는 이상하게 현실의 자신과 비교해도 뒤처지는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현실의 육체보다 더 편하게 적응한 면도 있어 쉽게 반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우라노스의 화를 더 부채질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고.
그 뒤에는 우라노스가 오늘 막내아들을 결딴내고 말겠다면서 길길이 날뛰는 것이었다.
저항을 하려 해도 강하기는 또 얼마나 강하던지. 빠져나오는 데에도 한참 시간이 걸려야만 했으니.
‘인성 더러운 영감 같으니.’
연우는 신력을 벼락처럼 마구 뿌려 대던 우라노스를 떠올리다 혀를 찼다.
‘올림포스가 어째서 신들의 사회에서도 논외로 분류되었었는지 알겠어. 저러니 도처에 적이지.’
초대 주신인 우라노스가 저러하고, 그 뒤를 이은 크로노스도 여태 저지른 일들에 대해 들어 보니 성격이 장난이 아닌 망나니였던 것 같으니.
연우는 앞으로도 얼마나 더 길게 이어질지 모를 이 퀘스트가 내심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둘이 일으킨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건 결국 부외자인 자신이었으니.
그래도.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분명히 조금이나마 짜증이 나야 마땅한데도.
제3자인 자신의 눈에는 너무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우라노스가 크로노스에게 보였던 모습은 화도 화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모습에 가까웠다. 안타까움과 사랑이 섞여 있는.
연우로서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 언제나 따스한 모습만 보여 주셨던 어머니의 모습과는 비슷하되,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도 많이 피곤한가.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는군.’
연우는 살짝 가슴이 미어지려는 것을 털어 내고, 재차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우라노스와의 대면은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라노스로부터 ‘늪’에 대한 단서를 획득했습니다.]
[‘늪’은 크로노스의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자랑하는 무대입니다.]
[또한, ‘시계 태엽’이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이 높은 후보지 중 한 곳입니다. 집중 탐색할 것을 권장합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시스템 메시지가 따라 주니까 방향성이 크게 어긋나는 일은 없겠어.’
연우는 그제야 퀘스트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우선은 크로노스의 신화가 크게 틀어지지 않는 선에서 활동한다. 크로노스의 성격을 대강 알 것 같으니 중간마다 발생할 이벤트도 거기에 맞춰서 행동하고.’
우선은 칠흑의 늪이라는 곳부터 소상하게 파악하는 게 급선무일 듯싶었다.
‘그래도 어떤 곳인지는 대충 감이 잡히는군. 현재 위기에 처한 올림포스가 숨기고 있는 비장의 패…… 혹은 무기, 뭐 그런 거겠지.’
대지모신과의 싸움에 집중하기도 바쁜 마당에 천마를 비롯해 여러 고민거리들이 산재해 있다면, 보다 더 큰 힘을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을 위해 칠흑의 늪이라는 곳을 개발하고자 했을 것이고.
‘그런 곳에 대한 질문을 크로노스에게 던졌다는 건, 그에게 따로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뜻일 텐데.’
연우는 그게 무엇일까 하고 짧게 고민하다가, 금세 그럴싸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칠흑왕의 사도.’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우라노스가 유도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적으로 선택을 받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크로노스가 칠흑왕의 사도가 되었던 계기가 바로 이때부터겠지.’
그리고 한 가지 더 걸리는 점이 있었다.
우라노스가 지나가듯이 말했던, 자신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던 말.
그게 무슨 뜻일까?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을 때 즈음.
뚝!
연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신전 기둥, 한쪽 모퉁이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숨어서 보는 것만큼 모양 빠지는 짓도 없지 않나?”
연우는 망나니 같은 크로노스의 성격을 대강 유추하면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이상하게 제 옷을 입은 것처럼 너무 잘 맞아들었다.
덕분에 그가 내뱉은 비웃음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아주 커서, 상대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눈길의 주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모퉁이에서 나왔다. 막강한 신력을 품고 있지만, 하고 있는 몰골은 양쪽 눈에 멍을 달고 있는 연우보다 더 볼썽사나운 녀석. 연우에게도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이아페토스.’
처음 타르타로스에서 한창 티탄들과 격돌할 무렵, 자신과도 악연이 있었던 작자가 아닌가.
‘저놈이었나. 크로노스에게 개 패듯이 맞았다는 한심한 녀석이.’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기는 마찬가지라더니. 어떻게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그동안에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던 건지.
막냇동생에게 그렇게 두들겨 맞았으면, 보통 쪽팔려서라도 모습을 비치기 힘들 텐데. 저놈도 참 어지간한 얼간이다 싶었다.
그런 연우의 한심해하는 시선은 이아페토스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고.
“이이……!”
이아페토스는 주먹을 꽉 쥐면서 연우를 노려보았으나, 섣불리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이전에 실컷 얻어맞은 것에 기가 완전히 꺾인 것이리라.
그걸로 녀석에 대한 연우의 평가는 더 확고해졌다.
더 상대해 봤자 시간 낭비일 뿐.
“할 말 없으면 먼저 가도록 하지.”
연우는 다시 한번 더 비릿하게 냉소를 던지고, 이아페토스의 옆을 홱 하고 지나쳤다.
이아페토스는 그런 연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다가, 그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자 울화를 참지 못하고 신전의 기둥을 냅다 발로 후려 차고 말았다.
* * *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 괜찮으세요, 도련님? 어쩜 좋아! 많이 아프시겠다! 우라노스 님도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연우는 자신의 몰골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유모 아난케를 보면서 다시 묘한 감정에 잠기고 말았다.
진짜 친모처럼, 혹은 누이처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던 것이다. 역시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거의 느껴 보지 못했던 따스한 감정이었다.
아무래도 크로노스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어긋나게 자랄 수 있는 건지.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어.’
연우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사실 그는 우라노스의 신전을 나와 거처로 돌아올 때까지, 종종 눈이 마주쳤던 여러 신격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같이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황급히 고개를 숙이거나, 그를 피해서 돌아서 가는 이들뿐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어떤 시녀를 잠깐 불렀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제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으니.
덕분에 연우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크로노스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망종이었단 사실이었다. 대체 평상시에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녔던 건지. 덕분에 뭔가 일을 하려 해도 영 쉽지 않았다.
“난 괜찮으니, 너무 호들갑 떨지 말고.”
“그래도 도련님……!”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아난케는 계속 치료를 거부하는 연우를 못마땅한 기색으로 노려보다, 쀼루퉁한 기색으로 물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구요?”
“……유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그보다 내가 이아페토스를 두들겨 팰 때.”
“아! 아틀라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틀라스?”
아틀라스는 훗날 제우스의 반란 당시에 마지막까지 크로노스의 편을 들었다가, 그 죄로 영원토록 세계를 등에 업는 벌을 받게 되었다던 티탄이 아닌가.
그런 이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하긴 도련님께서는 당시에 고주망태셨으니 못 들으셨겠지…… 도련님이 구해 주신 병사의 이름이에요.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어떻게 그렇게 성격이 유약하던지. 우둔하다고 이아페토스 님이 괴롭히시던 걸, 도련님께서 지나가다 구해 주셨는걸요.”
아난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도련님에게 어떻게든 보은(報恩)을 하고 싶다고 사정하는 걸 일단 돌려보내긴 했는데…… 갑자기 생각나셨나 보네요. 어떻게 할까요? 불러올까요?”
“아니. 됐어.”
자신이 알고 있는 아틀라스와 성격이 많이 다른 것 같긴 하지만.
깊게 연관되어서는 괜히 퀘스트만 길어질까, 손사래를 치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크로노스가 자신의 생각만큼 망나니는 아니었나 보다 하고.
* * *
며칠 뒤.
우라노스로부터 칠흑의 늪을 제대로 탐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동안 연우는 크로노스에 대한 평판을 알아보고, 필요한 정보들을 취합해 어느 정도 시대적 정보를 숙지하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마침 크로노스의 정보도 더 많이 갱신되어 이제는 어느 정도 퀘스트에 익숙해지던 때, 본격적인 탐방에 돌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 아틀라스. 반드시 크로노스 님. 지킨다.”
그때, 혹시 거인족이 나타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녀석이 쿵, 쿵,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다가왔다.
“어떻게든 도련님께 보은하고 싶다고, 안 된다면 시종군(侍從軍)으로 호종할 수 있게라도 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해서 데려왔는데…… 조상 중에 거인족의 피도 섞여 있다니, 아마 도련님께도 도움이 될 거예요.”
아난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쩍 연우의 눈치를 봤다. 그의 허락 없이 일을 저질렀으니 어떻게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슬쩍 아틀라스를 보다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탐사대가 모여 있을 숲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그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 막내께서 참 빨리도 오시는군.”
선객은 모두 열 명이었다.
하나같이 강맹한 신력을 품고서 예리한 눈빛을 띠고 있는 자들. 이아페토스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우라노스의 자식들.’
올림포스의 차기 왕위를 노리는 이들.
훗날, 크로노스의 시대에서 12대신으로 불리면서 ‘티탄’이라는 종족의 시조가 되었던 이들이기도 했다.
그동안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우라노스의 자식들이라 알려진 이들은 사실 진짜 우라노스의 친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우라노스가 올림포스를 구축하기 위해 통합한 여러 신의 사회들의 계승자들.’
한마디로 아직 통일성이 강하지 않은 올림포스를 단단히 규합하기 위해 맞아들인 양자들이란 뜻이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그들은 ‘형제’ 혹은 ‘남매’라는 틀에 묶여 있어도, 형제애 따윈 찾아볼 수도 없었고.
도리어 차기 왕위를 두고 다투는 라이벌에 가깝다고 봐야만 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자들은 따로 있기 마련이었다.
그 숫자는 총 넷.
가장 뒤편에서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맏이, 오케아노스.
우라노스에 이어 드높은 창공을 신위로 두고 도도함을 자랑하는 차녀, 테이아.
또한.
‘막내이지만, 가장 많은 신력을 타고난 크로노스.’
지금 연우가 빙의해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안 왔나?’
연우는 형제들을 돌아보면서 12개의 자리 중 아직 비어 있는 마지막 한 자리를 보았다.
다른 티탄들의 면면은 타르타로스에서 거의 본 적이 있었지만, 유독 마지막 한 사람만큼은 그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연우가 여러 생각으로 두 눈이 깊게 가라앉을 때 즈음.
“하여간 어린 것들이 더하단 말이지. 아버지께서 직접 지시하신 것을 알면서도 이딴 식이니.”
이아페토스는 연우더러 들으라는 듯, 대놓고 경멸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른 형제들의 동의를 구하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도 연우처럼 그를 병신 취급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장 포근한 미소를 품고 있는 오케아노스만이 가만히 녀석을 달랠 뿐.
“무슨 용무라도 있는 것이겠지. 아직 그리 급한 일도 아니니 너무 서두르려 하지 말거라. 도리어 그럴수록 일만 그르치는 법이니.”
이아페토스도 맏형의 그런 말에는 섣불리 반박하지 못하겠는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기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그때, 오케아노스가 웃는 낯 그대로 연우 쪽을 보면서 물었다.
“크로노스. 너는 그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알고 있느냐?”
왜 그걸 자신에게 묻는 건지.
연우는 자신도 모른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고.
오케아노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웃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여기서 기다리자꾸나.”
그때, 그들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왔군.’
연우는 다른 형제들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월등한 신력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의 기척에 따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확인하고자 했던 그녀가 수풀을 헤치면서 나타난 순간.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숨을 헐떡이며 미안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 퀘스트를 받았을 때부터 혹시나 했던, 결국 이번에도 우려했던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우라노스의 막내딸이자, 제우스 3형제의 친모였으며, 나중에 크로노스를 몰락시킨 주범이기도 했던 왕비 레아.
그녀의 얼굴은 그에게도 너무 익숙했던 것이다.
‘어머니.’
언제나 보고 싶었던 모습.
돌아가신 어머니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품은 채로 바로 그곳에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