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63화 (563/862)

13화. 자격 시험 (4)

우라노스의 자식들은 칠흑의 늪이 위치해 있다는 수풀 지대를 헤쳐 나갔다.

대신격인 그들에게도 험하게만 느껴지는 지대는 아직 우라노스와 올림포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온 곳이 아니라 그런지, 아니면 행성 자체가 품고 있는 기운이 그런 건지, 그들을 거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신력을 발휘하려 해도 번번이 타오르다 그치기를 반복하니, 도저히 이동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늪의 영역에 가까워질수록 훨씬 심해졌으니.

자칫 한눈을 팔면 존재가 잡아먹힐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자신만만하던 형제들의 얼굴에도 어느새 긴장감이 역력했다.

다른 사회들과 전쟁을 치를 때에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대지모신과 일전을 겨룰 때에나 느꼈던 긴장감이었기에 더더욱 신경을 바짝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늪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것은 그들이 각자 데려온 병사들이었기에 그나마 위험은 덜했지만.

그리고 그런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

연우는 전혀 다른 이유로 입을 꾹 다문 채, 일행들의 가장 후미를 따라가고 있었다.

걷는 내내, 그의 시선은 온통 저 앞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레아에게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어머니.’

연우는 몇 번이고 목 언저리까지 치고 올라온 목소리를 억지로 삼켜야만 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보고 싶었노라고 말하고 싶은 갈망이, 예전처럼 칭얼대고 싶은 욕구가 몇 번씩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만큼.

어머니는 그에게, 그리고 그들 형제에게 아주 소중한 분이었다.

어린 시절에 종적을 감춘 아버지와 다르게,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들을 사랑으로 돌봐 주셨으니까.

어린 시절에 자신이 공부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살짝 어긋나 밖으로만 나돌아 다닐 때에도, 꾸중 한 번 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기다려 주셨던 분이 어머니였고.

그들 형제가 툭하면 치고받고 싸울 때에는 단호하게 혼을 낼지언정 마지막에는 꼭 안아 주시던 분도 어머니였다.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들 형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무리해서 일을 하시기도 했다.

당시에 병을 얻은 것도 그때 무리하신 후유증이었으니.

그들 형제는 자신들 때문에 어머니가 편찮으신 거라며 자책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게 아니라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서 안아 주셨지만.

그러다 동생은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탑에 올랐고.

어머니는 그런 동생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다가 눈을 감으셨으니.

홀로 남게 된 연우는 아무것도 모른 채 화만 속으로 삭이다, 점차 감정이 무뎌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 이런 모습을 하고 계셨었단 말이지.’

어머니의 젊은 모습을 바로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크로노스가 아버지의 모습을 띠고 있어,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지만.

크로노스의 아내였던 레아가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있으니, 각오는 하고 있었다지만.

그게 정말 현실로 닥치니 너무 어지럽기만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연우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억지로 삭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도저히 어떻게 풀어낼 겨를이 없었다.

그가 알기로, 신화 상에서 레아는 크로노스를 아주 증오한다.

형제나 다름없던 키클롭스와 헤카톤케이레스를 타르타로스에 처박은 것으로도 모자라,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집어삼키기도 했던 희대의 폭군이었으니.

그래서 크로노스를 몰락시키는 데 가장 앞장섰던 이가 바로 레아였다.

당시 막내였던 제우스를 따로 빼돌리고, 키클롭스와 헤카톤케이레스 등을 깨우면서 저항군을 조직하는 데 크게 일조했던 것이다.

그러니 크로노스와 레아는 부부이면서도 원수라고 할 수 있는바.

하지만 연우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만큼은 진짜였다.

의문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탑의 구속에서 해방되셨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들 형제가 정말 크로노스와 레아의 자식이라면. 제우스 형제들의 막내뻘이 된다면. 어째서 그들에게는 신력이 없는 걸까?

그리고 어머니는 그만한 대신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리도 약한 몸으로 계시다 눈을 감으셔야 했을까?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가 앓으셨던 병.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가 없다고 했던 불치병이 천마증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필멸자들의 기술로 치료가 불가능한 건 당연했으니까.

그러니 연우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심적 동요를 도저히 막기가 어려웠다.

제아무리 격이 올랐다고 해도, 냉혈 특성이 있다고 해도 이번만 큼은 평정심을 찾기가 어려웠다.

“너, 참 웃기는구나?”

그렇게 계속 레아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게도 제법 익숙한 얼굴이 있었으니까.

테이아.

헬리오스, 셀레네, 에오스 등의 어머니이며, 현실 세계에서는 티폰의 뒤통수를 치면서 티탄의 새로운 수장이 되었던 존재.

하지만 음험하기만 한 미래와 다르게, 이곳에 있는 테이아는 짓궂은 악동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속까지 그런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연우가 입을 열었다.

“뭐가?”

“뭐긴 뭐야. 평상시에는 그렇게 아닌 척 잡아뗐으면서! 으이그. 툭 하면 치고받고 싸우더니 그럴 줄 알았다.”

“……?”

연우는 그녀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미간을 더 깊게 좁히다, 곧 말뜻을 알아채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계속 레아를 보고 있었더니,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말로 어쩐지 어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많이 싸웠었나?”

“어머.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희들이 그냥 싸우기만 했니? 원수처럼 으르렁거렸잖아. 언제는 누구 하나 죽는 꼴을 보기 전까지는 절대 화해하는 일 없을 거라더니. 그새 정이라도 붙은 거니? 아니면…… 그동안 우리 레아의 관심을 끌려고 그렇게 못살게 군 거야? 응? 응?”

테이아는 연우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면서 참새처럼 계속 쫑알거렸다.

‘말이 너무 많아.’

그것이 못내 짜증 났지만.

한편으로 연우는 덕분에 어머니의 모습을 더 깊게 알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다행히 이번 퀘스트가 짜증 나는 것만 있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뭐라고 대답 좀 해 봐, 얘! 벙어리니? 그렇게 말 많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이렇게 과묵해진 거람. 답답해 죽겠네. 어라? 레아가 이쪽 본다. 내가 계속 너랑 있는 걸 보니 질투라도 하는 건가? 작전이 통했나? 너, 생각보다 좀 제법이다? 매번 제 성질대로만 사는 망나니인 줄 알았는데. 제법 엉큼한 면도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테이아를 계속 상대하다가는 귀가 떨어질 것 같아,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는데.

『전원 정지!』

갑자기 선두에서 걷던 오케아노스가 손을 높이 들더니, 신력을 가득 담은 진언(眞言)으로 정지 명령을 내렸다.

연우와 테이아의 시선도 저절로 그쪽으로 쏠렸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수풀이 어느새 사라지고, 저 멀리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거대한 늪이 보인 것이다.

그리고 연우와 테이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태껏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파장이 그들을 압박했던 것이다.

테이아는 더 이상 장난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자신이 데리고 온 일행들 쪽으로 돌아가 만전의 준비를 갖췄다.

연우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칠흑의 늪을 바라보았다.

바짝 경계하는 일행들과 다르게, 그곳은 그에게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띠링-

[‘늪’을 발견하였습니다.]

[‘늪’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세요.]

‘심연. 아니…… 마해인가?’

칠흑의 늪은 여러 가지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것도 아니야.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곳이야.’

연우는 심연이나 마해가 이곳에서 분화된 것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들의 성질이 칠흑의 늪을 닮았다는 표현이 옳았으니까.

그러니 이것은 다른 것이었다.

공허.

태초보다도 이전에 있었다는 진짜 공허가 틀림없었다.

그러니 칠흑의 후예로 낙인된 연우에게는 이래저래 익숙할 수 밖에 없는 장소였지만.

아직 칠흑과 거리가 멀기만 한 우라노스 시대의 신들에게는 너무 낯설어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과연 태초, 그보다 더 전부터 있었다더니…….”

“여러 원로들이 이곳을 두고, ‘거대한 틈’, 카오스라고 명명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모두가 어수선하게 웅성거리던 도중.

가지고 있는 힘만 따진다면 아버지인 우라노스도 함부로 할 수 없다던 오케아노스도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칠흑의 늪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오케아노스는 뭔가를 다짐했는지, 이를 악물고 칠흑의 늪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온 호위병들이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오케아노스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일행들의 통솔자이자, 형제들의 맏이. 당연히 이런 위험한 일에는 그가 솔선수범을 해야만 했다.

그걸 보고 연우도 오케아노스의 뒤를 따르고자 했다. 칠흑의 늪을 조사하는 건 퀘스트의 일환이었으니까. ‘태엽’과 관련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도련님.”

갑자기 유모 아난케가 연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 그러지?”

연우는 혹시 그녀가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건가 싶어 비키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아난케가 막은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테이아 님의 말씀이 사실이신가요?”

“무슨……?”

“말씀해 주세요.”

단호한 말투.

아난케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연우도 인상을 딱딱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테이아가 크로노스와 레아를 연결시키려던 걸 보고 찝찝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두 분은 절대 이뤄지실 수 없습니다. 도련님의 본가와 레아 님의 본가는 절대 합칠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다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선대의 은원부터, 이미……!”

크로노스와 레아, 둘 사이에 신화에서도 밝혀지지 않은 어떤 비밀이 있었던 걸까? 연우는 그게 무엇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에 시달릴 때가 아니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도련님!”

“그보다 비켜. ‘늪’을 조사해야 하니까.”

연우의 단호한 말투에 아난케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곧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아난케를 지나, 일행들을 곧장 통과했다.

테이아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늪이 주는 압박감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연우를 보고 크게 놀라워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늪에 다다랐다.

먼저 도착해 있던 오케아노스가 뜻밖이라는 듯이 연우를 돌아보았다.

“막내야, 너……?”

하지만 연우는 그런 오케아노스의 말도 무시하고, 늪을 내려다보았다.

늪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수없이 터지는 기포 위로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음험함을 자랑했다.

그러면서도 늪의 표면은 마치 반질반질하게 닦은 유리구슬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으니. 연우의 얼굴, 지금은 크로노스의 얼굴까지 거기에 비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아주 당연하게도, 아버지의 얼굴과 똑같았다.

“보면 볼수록 두려운 곳이다. 대체 아버지께서는 이곳에서 어떻게 힘을 얻겠다고 하시는 건지…… 질서도, 혼돈도 아닌 이것은 창생(創生)을 추구하는 우리들 로서는 거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막내야, 너는 뭔가 알 것 같으냐?”

오케아노스는 칠흑의 늪에 다가가기를 꺼려 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차기 왕좌를 두고 다투는 라이벌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야 약점밖에 되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막내인 크로노스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가 그만큼 호인(好人)이란 뜻일까?

무엇이 되어도, 연우로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기에 그냥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늪 쪽으로 손을 뻗을 뿐.

“막내야, 위험……!”

오케아노스도 평소 막냇동생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가 위험한 행동을 하려 하자 다급히 뜯어말리려 했다.

하지만 곧 벌어진 괴현상을 보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연우의 손끝과 늪에 비친 연우의 손끝이 서로 맞닿는 순간, 늪에 비친 모습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진짜와 다르게 한쪽 입술 끝을 크게 비트는 게 아닌가.

누가 봐도 명백히 그들을 비웃는 듯한 모습.

아니, 정확하게 그것은 연우를 향해 비웃고 있었다.

그것이 입술을 달싹였다.

또 돌고 돌아왔구나. 이곳으로. 아주 멍청하게도.

녀석을 중심으로, 활자가 뱅글뱅글 돌면서 문장을 이뤘다.

‘돌고 돌아?’

이게 무슨 소리지?

그 순간, 연우의 머릿속으로 스치는 것이 있었다.

-또, 너로구나.

-이번에도 운(運)은 어긋났고, 명(命)은 짧다.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몇 번이고 실패할 숙운(宿運)이고,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실패를 겪어야겠구나.

-여기까지 온 것이 이걸로 네 번째인가? 시간은. 그래.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졌구나. 하지만 그게 전부야. 달라진 게 거의 없어. 역시 영혼에 새겨진 숙운의 틀은 달라지지 않는 것인가?

-굴레 속에 갇혀, 몇 번이고 악몽을 꾸는 아이야. 부디 이 악몽에서 헤어 나와, 언젠가 너의 길을 볼 수 있기를.

어째서 회중시계로 의념을 투영했을 당시, 동생의 꿈에서 보았던 올포원의 말이 떠오르는 건지.

더구나.

어쩐지 연우는 늪에 비치는 잔상이 자신이 빙의한 크로노스가 아닌, 그 속에 있는 자신을 직시하는 것 같다는 강한 압박감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니 묻지.

활자가 계속 돌고 돌면서 또다시 새로운 문장을 그려 냈다.

너는 ‘몇 번째’의 나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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