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64화 (564/862)

14화. 자격 시험 (5)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몇 번째의 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문제는 이 수면에 그려진 잔상이 직시하고 있는 것이 크로노스인지, 아니면 그 안에 든 자신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잔상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려는데.

피식-

잔상이 한쪽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그런 문장이 새겨지는 것과 동시에.

화아악!

“흡!”

갑자기 잔상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늪을 구성하고 있던 물질이 스르르 움직이면서 연우의 손을 타고 어깨 쪽으로 올라왔다. 더구나 그것은 순식간에 피부 안쪽을 깊숙하게 파고들어 혈관을 장악하고자 했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팔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늪은 그를 단단히 붙든 채 떨어지질 않았고.

“막내야!”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오케아노스가 질겁하면서 손을 이쪽으로 뻗었다. 신력에 따라 대기 중에 섞여 있던 수증기가 단번에 얼어붙으면서 얼음 칼날을 형성, 그대로 연우와 연결되어 있던 늪을 잘라 버렸다.

하지만 그사이 연우에게 달라붙어 있던 늪은 아주 빠른 속도로 피부 속에 스며들어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괜찮으냐?”

오케아노스는 쓰러지려는 연우를 붙잡고 애타게 그를 불렀지만.

연우는 도저히 오케아노스의 부름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혈관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혈류가 너무 빨라져 호흡이 가빠졌다.

마치 무언가가 전신을 붙잡아 걸레 짜듯 억지로 쥐어짜는 느낌. 전신이, 아니,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격통에 연우는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쿵!

쿵!

너는 몇 번째의 나인 거지?

나는 몇 번이나 돌고 돈 걸까?

뭐, 아무래도 좋아.

이번에도 될 때까지 해 보면 될 테니까.

무수히 많은 활자들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저들끼리 이리저리 조합되면서 여러 문장들을 만들어 내었다가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잔상이, 칠흑의 늪을 이루고 있던 잔상이 자신에게로 스며든 것이다.

녀석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의식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체내의 세포와 인자들이 갈기갈기 찢어졌다가 재조합되었다. 신의 인자들이 부서지고 다시 복구되면서 탄탄해지고, 신력이 풍선처럼 마구 부풀면서 격이 단단히 다져졌다.

어떻게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끔찍한 신열(神熱)이 정신과 육체, 전부를 괴롭히고 있었다.

연우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게 무슨 느낌인지 단박에 알아맞힐 수 있었다.

‘마성!’

비그리드와 손을 잡을 때. 합일을 이룰 때에 느꼈던 것과 사뭇 비슷했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크로노스의 합일은 격통을 안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것은 강제적인 각성이 이뤄지기 때문이리라. 칠흑의 힘이 강제로 체내에 새겨지고 있었으니.

‘역시 이놈은 칠흑왕의……!’

신열이 더 끓어오르면서 생각이 마저 이어지지 못하던 그때.

“안 되겠군.”

오케아노스는 이대로 뒀다간 연우가 위험하다고 판단, 그를 등에 업으려고 했다. 그사이에도 연우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라이벌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텐데도, 그를 도와주려는 건 진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케아노스의 그런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신열이 너무 뜨거워 연우를 만지기조차 힘든 데다가, 갑자기 늪에서부터 다른 괴현상이 빚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기포가 더 크게 일어나더니, 거기서부터 독특한 형체를 한 이형(異形)의 괴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고기? 파충류? 무엇인지 쉽게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괴상한 얼굴에 전신이 비늘로 뒤덮이다시피 한, 온 우주를 누비고 다니는 올림포스의 신들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형태를 갖춘 괴물이었다.

키에에엑!

이형의 괴물들은 저마다 손에 서로 다른 무기를 지닌 채, 오케아노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그 숫자만 족히 백여 개체는 넘는 것 같았다.

“이런……!”

대체 저런 놈들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오케아노스는 의문을 지울 새도 없이 재빨리 얼음벽을 높게 세워 놈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쾅! 콰쾅!

하지만 이형의 괴물들은 하나하나가 신격에 못지않은 힘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러 번의 큰 충돌과 함께 얼음벽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큰형님!”

“괜찮아, 큰오빠?”

“저게 대체 뭐야……!”

뒤늦게 다른 형제들과 일행이 달려와 연우와 오케아노스를 보호하려는 동시에, 저마다 권능을 발동시켰다. 화려한 이펙트들이 여기저기서 터지면서 돌풍과 화염 등이 휘몰아쳤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얼굴에는 얼핏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

이형의 괴물도 괴물이지만, 저 너머 늪에서부터 느껴지는 ‘무언가’가 발산하는 격이 그들을 강하게 짓눌렀던 것이다.

대지모신을 비롯해 수많은 적들과 싸워 봤지만, 이런 존재는 그들로서도 처음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압도하는 우라노스조차도 넘보지 못할 무언가가, 저곳에 있었다.

그러다 곧 얼음벽이 깨지면서.

예기치 못했던, 이형의 괴물과 올림포스 형제들 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크로노스가 다쳤다니……?”

늪에서의 대치가 있은 후.

올림포스 신들은 오케아노스의 후퇴 명령에 따라, 빠르게 늪의 영역에서 빠져나온 상태였다. 다행히 이형의 괴물들은 칠흑의 늪에서부터 멀어질수록 힘이 급속도로 약해져 쉽게 물리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연우의 부상 소식도 알려져, 우라노스가 다급하게 포탈을 타고 이쪽으로 넘어왔다.

“아버지! 대지모신 쪽은 어떻게 하시고 이곳에 오신……!”

전열을 수습하고 있던 오케아노스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는 다른 사회의 주신들과 손을 잡고 대지모신을 잠재우는 데 집중하고 있던 상황. 그런데도 전선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와 버렸으니.

하지만 그는 도저히 말을 길게 이을 수가 없었다. 우라노스의 왼팔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고 없었던 것이다.

“팔이……?”

“지금 이깟 팔이 중요하더냐! 이런 것이야 신력을 회복하면 금방 복구할 수 있다. 그보다 막내는? 막내는 어찌 되었어?”

단순히 그렇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오케아노스는 목 언저리까지 치고 올라온 말을 억지로 꾹 눌러야만 했다.

우라노스 같은 주신격이 팔을 잃었다는 것. 그건 단순히 신력 회복을 운운할 것이 아니었다.

격.

신들에게 있어서는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에 손상이 갔단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라노스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는 투가 아니었다. 그저 막내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

아버지의 막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지만, 정도가 조금 심하다고 생각했기에.

오케아노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원체 자식 사랑에 있어서는 팔불출인 양부일진대.

결국 오케아노스는 우라노스를 막내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면서도 착잡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너무 막내만 총애하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애써 마음을 숨기려는데.

이아페토스가 옆에 다가와 슬쩍 그에게 그런 말을 던졌다.

오케아노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냐?”

“아버지의 편애가 너무 심한 것 같지 않냐는 말입니다.”

“말조심……!”

“아니, 큰형님은 화가 나지도 않으십니까? 아버지의 자리를 눈앞에서 저런 망종에게 빼앗기게 생겼는데도요? 알다시피 아버지께 남은 시간도 얼마 없지 않습니까?”

남은 시간.

그 말에 오케아노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고.

이아페토스도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오케아노스는 심기가 단단히 뒤틀려 버린 뒤였다.

“아버지께서는 혜안이 깊으신 분이시다. 다 복안이 있으시겠지. 쓸데없는 언행은 삼가도록 하여라.”

오케아노스는 단호하게 한마디를 쏘아붙이고 돌아서서 나섰다.

우라노스에 대한 오케아노스의 신의와 충성은 아주 깊었다.

이아페토스는 그런 오케아노스의 뒷모습을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다, 곧 옆으로 다가온 테이아를 보면서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 봐. 큰오라버니는 결단력이 부족하다니까. 왕재(王才)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화로운 시기에나 어울리는 것이지, 지금 같은 혼란기에는 맞질 않아.”

테이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올림포스의 왕좌는 우리가 가져야겠어.”

* * *

꽤 끈질기게도 버티는구나.

그래. 이런 것도 나쁘진 않겠지.

연우는 늪에서 빠져나온 지 한참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몸과 영혼을 불사를 것 같은 신열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마성의 속삭임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성은 금방이라도 연우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신격의 상승은 계속 이뤄지고 있었다.

‘대체 ‘태엽’이란 게 뭐지? 뭐기에 이딴 것이……!’

연우는 고통에 허덕이면서도 칠흑의 늪에서 일어났던 이형의 괴 물들을 잊을 수 없었다. 마해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것들. 그건 분명히 타계의 신, 혹은, 그에 준하는 것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연우는 계속 영혼을 위협하는 신열을 어떻게 뿌리쳐야 하나 방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퀘스트를 어떻게 정리하기도 전에 자신의 존재부터 사라질 판국이었으니.

그런데.

“……이런 건 미처 생각도 못 했구나. 그저 네가 타고난 피가 있어…… 혹여 ‘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보냈던 것이었는데. 총애가 아니라 저주였구나. 그런 나의 사사로운 편의가 너를 이런 위기로 몰고 말았어. 미안하다. 정말로.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흐릿한 의식 너머로, 우라노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이 늙은이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남아 있으니, 이 저주를 완전히 씻어 내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눌러 두고 견제할 수는 있겠지.”

화아악!

그렇게 우라노스의 따스한 손길과 함께 뭔가가 체내로 스며든다 싶더니.

신열과 격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면서, 연우는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 * *

연우가 다시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을 때.

그는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깊은 잠에 곤히 빠져 있는 한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노인이 우라노스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제법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

연우는 그제야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신력을…… 전부 넘긴 건가?’

체내에 두 개의 상반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나는 평온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체내를 마구 휘돌면서 육체와 영혼을 어루만지고, 갑자기 급성장하게 되어 삐거덕거릴 수 있는 신격을 보좌했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격렬했다.

전부 부술 듯이 요동치면서도, 뜨거웠고 때로는 차갑게 가라앚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칠흑에 가까운 기운이었다.

만약 평온한 기운이 없었다면, 격렬한 기운이 육체를 갈가리 찢어 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덕분에 이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몇 배로 증가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우라노스가 막냇자식을 위해 희생한 결과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연우는 진짜 크로노스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슴 한편이 잔뜩 미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인 감정.

그게 대체 무엇인지 몰라,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자신의 감정인지, 아니면 육체의 주인인 크로노스의 감정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우라노스의 얼굴 위로 잔뜩 진 주름과 검버섯이 눈에 들어왔을 때에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마침 우라노스의 눈꺼풀이 열렸다. 흐릿해진 동공 위에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크로노스의 얼굴이 비쳤다.

우라노스는 그런 막내아들의 표정이 귀여웠던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전에 그를 두들겨 팰 때에 보였던 정력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웃음소리. 그러다 탁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몸은, 뭐, 망나니짓하고 다니더니 괜찮아 보이는구나.”

자신의 몸도 불편하면서 자식의 안전부터 먼저 묻는다.

그것이 자식을 지키기 위한 부성애라는 것을, 연우는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동기화율이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0% → 3%]

[잃어버린 ‘태엽’ 중 ‘아주 작은 태엽’을 찾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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