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자격 시험 (6)
찰칵.
찰칵.
체내에서 부서졌던 무언가가 쉴 새 없이 재조립되고, 저들끼리 이리저리 맞물리면서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우는 자신이 이렇다 하게 개입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체내에서 빚어지는 현상에 가볍게 탄성을 흘렸다.
‘태엽이란 건, 신위의 조각을 말하는 것이었나?’
우라노스에게서 발견되었다고 했던 ‘아주 작은 태엽’.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연우는 아직 알지 못했다. 육안으로 직접 목격한 게 아니었으니.
그냥 그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을 뿐이고, 동시에 육체가 스스로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만 느끼고 있을 뿐.
그것은 격(格)의 상승이었다.
또한, 신위가 생성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연우로서도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죽음.
마성과 합일을 이루면서, 그것이 가지고 있던 신위가 강제로 크로노스에게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즉, 칠흑왕의 사도로서 각성을 이루고 있는 중이란 뜻이었다.
그건 연우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칠흑왕의 사도라 하기에 칠흑왕의 목소리라도 직접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다 자신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무리 사도직이 모시는 신과 가장 가까운 위치라지만, 그리 쉽게 칠흑왕과 접점이 생길 수 있다면 그동안 그 많은 고생을 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칠흑왕에 대해 알았더라면, 조금 허탈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만약 예상대로 마성의 정체가 그런 것이라면, 합일을 이룬 것만으로도 칠흑왕의 사도가 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지.’
만약 크로노스의 상태창을 확인해 볼 수 있다면, 칭호란의 가장 위에 ‘칠흑왕의 사도’가 놓여 있지 않을까?
실제로 연우는 마성과의 합일을 이룬 뒤부터, 저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렬한 시선을 미약하게나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저걸 두고 높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아래일 수도 있고, 바로 옆일 수도 있었다. 공간 너머일 수도 있었고. 몇 단계나 차원이 높은 곳에서 자신을 굽어살피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그것이…… 칠흑왕, 본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수많은 우주와 차원을 건너다니면서 오시하는 신격을 이렇게 살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필멸자들은 절대 개념조차 상상해 낼 수 없을 아주 지고한 존재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생성되는 다른 신위는 당연하지만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낯설었다.
시간.
‘이 신위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칠흑왕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우라노스가 건네준 것이었어.’
마성을 잠재우기 위해 우라노스가 건네주었던 신력은 합일이 마무리된 뒤, 스스로 다시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칠흑과 뒤섞이면서 일부 성질이 변한 것이다.
‘우라노스는 하늘을 상징해. 즉, 공간을 다스린다는 것인데…… 하지만 활동적인 칠흑을 만나면서 공간 자체를 움직이는 것으로 바뀐 건가?’
연우는 손을 살짝 뻗어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공간을 따라 물결 무늬가 퍼지면서 갑자기 실내에 있던 모든 것들이 정지했다. 바람에 살랑이던 커튼도, 금방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굴던 꽃병 속의 꽃도 심지어 공기도, 전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지되었던 세계는 금세 풀렸다. 공기가 흐르고, 커튼이 다시 흔들렸다.
‘아직 이 신위의 권능이 미치는 범위는 너무 작아. 효과도 아주 짧고. 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단 거지?’
연우로서는 아직도 이 신위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권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만 좀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면, 퀘스트가 끝난 뒤에도 신위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연우는 퀘스트를 실패해도, 시간 신위의 구조만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크로노스의 힘을 작동시키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대지모신과 페르세포네가 정지한 크로노스에게서 신력을 갈취하는 방식이,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든 것이다.
그때였다.
띠링!
[‘죽음’의 신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수치를 자랑합니다.]
[‘시간’의 신위에 대한 이해도가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태엽’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동기화율이 상승하였습니다.]
[10% → 12%]
‘또 이거로군.’
연우는 망막에 맺힌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주 작은 태엽’을 찾은 이후로 간간이 비치기 시작한 동기화율은 여러모로 연우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크로노스와 동기화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여기에 빙의해 있는 자신의 영혼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크로노스을 이루는 신화를 자신이 ‘가로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곧 격과 신위가 덩달아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이대로 크로노스가 정말 정해진 대로 주신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퀘스트가 끝난 뒤에는 영격도 그만큼 성장할지도 몰랐다. 지금은 합일을 이뤄야만 그 정도에 다다르는 수준이었으니까. 이제는 그런 요행을 바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딱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뭘 그렇게 얼이 빠져 있는 것이냐? 이 아비의 말 상대가 되어 주러 왔으면 거기에 집중은 못 할망정. 으잉, 쯧!”
찌릿!
연우는 갑작스레 미어지는 가슴을 꾹 누르면서 뒤를 돌아봤다.
“일어나셨습니까?”
“흥! 패륜아에 가까운 네놈이야 이 늙은이가 영원토록 잤으면 하고 바라겠지만, 어림도 없다 이것아.”
우라노스는 동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연우는 한쪽 가슴이 꽉 조이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야만 했다.
자신에게 모든 신력을 건네준 뒤, 우라노스의 기력은 눈에 띌 정도로 쇠락하고 있었다. 나날이 얼굴에 잔주름이 늘고, 피부도 퍼석해지면서 검버섯이 폈다. 호쾌하게 연우를 두들겨 패던 정력적이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덕분에 올림포스는 왕이 곧 스러질지 모른다는 소식에 많이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양자들 간에 빚어지는 신경전도 날이 갈수록 격화되어 자칫 내전 발발의 위험성을 보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줄곧 우라노스의 곁에 붙어 병간호에 집중했다.
그건 그가 자신의 세상도 아닌 권력 다툼에 관여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데다가, 우라노스에 대한 복잡 미묘한 감정을 풀어낼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크로노스와의 동기화율이 강해질수록 감정은 더욱 강해졌으니.
연우는 이러다 자칫 신화 속에 자아가 매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라노스에게 부자(父子)의 정을 느끼는 크로노스가 어이없기도 했다.
“영원토록 주무시기를 바란 적 없습니다.”
“그럼?”
“설마 그렇게까지 바라겠습니까? 그냥 아주 푹 주무시기만 바랄 뿐이죠.”
“뭐?”
“거 왜, 가실 때가 되면 원래 잠이 많아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놈이?”
우라노스의 한쪽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잘도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저 뻔뻔한 낯짝을 어떻게 후려치는 게 좋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겨우 남아 있는 신력으로 벼락이라도 한 줄기 뽑을까 싶던 그때.
쾅!
갑자기 두 사람이 있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우라노스의 앞을 막아 서서 신력을 끌어 올렸다.
“이게 무슨 일이냐!”
우라노스는 연우와 티격태격할 때와는 달리, 정말 격노한 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거처 안쪽으로, 일단의 병사들이 줄지어 들어오더니 그들을 에워싸는 게 아닌가. 병사들의 얼굴에 전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단호한 기세였다.
위계를 중시하는 신의 사회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이런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경우.’
아니나 다를까.
저벅, 저벅!
곧 병사들이 좌우로 열리면서,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연우는 우라노스를 보호하기 위해 더 크게 격을 끌어 올렸다.
테이아, 이아페토스, 히페리온, 포이베, 크리오스, 코이오스…….
우라노스는 비록 양자와 양녀로 맞아들였지만, 그래도 친자식처럼 애지중지 길러 왔던 아이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크게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너희들이 어째서……!”
쿠데타의 주동자, 테이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아버지, 이것은 전부 당신의 책임입니다. 그만한 자리는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셨지요.”
테이아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연우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우라노스 쪽을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계를 진즉 깔끔하게 점지하시던가 하셨어야 할 텐데…… 자격도 되지 않을 막내 녀석을 끼고도니 이런 사달이 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고얀……!”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서 힘겹게 쌓아 올리신 올림포스는 저희가 이어서 더 높게 쌓아 나가겠습니다. 막내도 아버지 곁에 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왕좌를 찬탈하고, 그와 연우를 이곳에다 유폐시키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우라노스는 당장에라도 녀석들에게 벼락을 내리꽂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분명히 그에게는 아직까지 그만한 힘이 남아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들도 그가 각별히 아끼던 자식들이었으니까.
파르르-
연우는 테이아 등이 비웃음을 흘리며 나갈 때까지 잘게 떨리는 우라노스의 손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내전이 발발했다.
테이아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를 피해 달아났던 오케아노스가 자신의 군세를 일으켜 테이아와 대립한 것이다.
명분은 유폐된 우라노스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 여기에 호응한 이들이 생각보다 많아, 내전은 아주 팽팽한 접전으로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올림포스는 빠른 속도로 양분되고 말았고.
연우는 급속도로 기력이 쇠해지는 우라노스를 보면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현재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선택지에 따라 남은 ‘태엽’을 찾는 데 성공할지 여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동기화율에도 많은 영향이 미치게 됩니다.]
[침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어나시겠습니까?]
“…….”
선택지야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동안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연우가 내린 결론은 동기화율이 높아질수록 ‘태엽’을 찾을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화를 적극적으로 수행 하는 것이 좋다는 점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차치하더라도, 우라노스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더 이상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짜증 났다.
하지만 이 엿 같은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연우는 짧게 고민하다가,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 밤, 우라노스의 방을 몰래 빠져나왔다. 주변을 경계하는 병사들이 있다지만, 그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는.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지?”
레아가 마침 책을 읽다 말고 예리하게 눈을 뜨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이는 감정은 명백한 살의였다.
‘어머니…… 의 본가 쪽과 크로노스의 본가 쪽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고 했지?’
우라노스가 여러 신의 사회들을 올림포스로 통합하기 전, 크로노스 가문과 레아 일족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전쟁을 벌였다고 했었다. 그 이름들까지 파악한 건 아니었지만, 꽤 많은 신격들도 죽었다던가. 수많은 창세 신화에서 숱하게 언급되는 그런 전쟁이었다.
더구나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연우는 그동안 의도적으로 레아를 피해 다니곤 했다.
레아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편이 계속 울렁거렸으니까. 도저히 스스로 감정을 추스를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간 퀘스트가 엉망으로 망가질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피할 수가 없었다.
“손을, 잡자.”
연우는 다시 흔들리려는 목소리를 억지로 짓누르면서 짧게, 끊어서 말했다.
하지만 레아는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조소를 흘렸다.
“왜지? 아, 그새 왕좌에 앉고 싶어졌나 보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이제 좀 정신을 차려서 아버지를 모시는 건가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라 점수를 따려 했었던 거였나?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되니……!”
“난 그딴 거 몰라. 그냥 이딴 엿 같은 상황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뿐이지. 왕좌, 앉고 싶으면 그쪽이 앉아.”
연우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따가운 시선이 너무 낯설었지만, 어떻게든 참으며 그렇게 말했고.
레아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연우의 진의를 살피기 위해 위아래로 훑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심인가? 말도 안 되는…….”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네가 가진 진짜 꿍꿍이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도 지금 벌어지는 상황들에 화가 나 있던 차였으니까. 모른 척하고 눈감아 주겠어. 대체 언니 오빠란 것들이, 아버지께서 겨우 이루신 평화를 뭘로 보는 건지……!”
형제들 중에서 우라노스에 대한 존경은 레아가 가장 컸다. 크로노스 가문이 싫은데도 불구하고, 그들 일족이 통합에 따랐던 건 우라노스가 부르짖던 이상(理想)에 크게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을 잡는다고 해도, 전황을 어떻게 뒤집을 생각이지? 지금 판세는 웬만해서는 손대기 어렵잖아? 도리어 겨우 통일된 올림포스가 다시 분리될 소지만 커.”
네가 가진 건 무엇이 있느냐는 레아의 질문.
“있다. 방법이.”
“그게 뭔데?”
연우는 눈빛을 스산하게 빛냈다.
“압도적인 힘.”
* * *
쿠르르, 콰콰쾅!
수많은 전격과 화염이 내리꽂히고, 돌풍이 휘몰아치면서. 전장으로 선택되었던 행성은 이미 기능이 정지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수많은 신격들이 자웅을 겨루는 전장이란, 그렇게 세상의 모든 법칙들이 충돌하면서 물리적 세계가 붕괴되는 끔찍한 장소였다.
대회전(大會戰).
올림포스를 장악한 테이아 군과 이를 되찾으려는 오케아노스 군은 대규모 일전을 벌이면서 어떻게든 상대의 명줄을 끊어 놓고자 했다.
여러 신의 사회에서도 아주 유명한, 전투 종족 ‘티탄’들의 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신격들이 소멸을 맞았고.
그들을 따랐던 병사들의 피가 도처에 뿌려졌다.
그런데도 승부는 좀처럼 나질 않아, 또다시 차후를 기약해야 하는 건가 싶던 그때.
두-웅!
갑자기 세상이 정지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물리적 법칙과 권능이 정지된 것이다. 다만, 정신은 멀쩡했기에 신격들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더 거대한 신격이 있어 공간을 장악했다면 이해라도 하지, 이건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상식선을 훨씬 벗어나고 있는 괴현상에 충격을 받는 와중, 연이어 새로운 괴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츠츠츠-
갑자기 용암과 맨틀이 흐르는 대지 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여태 보지 못하던 군세가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통 칠흑색의 투구와 갑옷, 그리고 병장기로 무장한 병사들. 웬만한 신격들마저도 떨리게 만드는 ‘죽음’의 기운이 녀석들을 따라 회오리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나타난 죽음의 군단이, 모두 하나같이 그들이 아는 얼굴이란 점이었다.
『세레베스타! 네가 왜 거기에 있는 것이냐?』
『알론? 너는 방금 전 우리를 구하다 죽었잖아……! 어떻게?』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테이아 군과 오케아노스 군, 양쪽 진영이 죽이거나 죽었던 병사들이었다.
그래서 왜 그런 꼴로 있느냐며 그들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죽음의 군단은 예리한 광망만 피워 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장에서 죽었던 이들로 이뤄진 군세가 전부 일어난 순간, 그들의 창칼이 일제히 양쪽 진영을 겨누었다.
그 살벌함에 양쪽 진영은 잔뜩 경직되고 말았다. 시간을 멈추고, 죽음을 다스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적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리고 죽음의 군단 중심으로, 연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폭풍처럼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격의 기세에 모든 신격들은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새로운 우라노스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전부 대가리 박아.”
연우가 잔뜩 경직된 형제들을 보면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아니면 뒈져서 내 군세에 합류하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