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66화 (566/862)

16화. 자격 시험 (7)

“……!”

“……!”

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 상황 속에서.

테이아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와아아!

갑자기 전장을 따라 곳곳에서 거대한 포탈이 열리더니 대규모의 군단이 하나둘씩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과 비등할 정도의 머릿수였다.

그들을 본 순간, 테이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새롭게 난입한 군단의 수장이 레아였던 것이다.

사실상 올림포스를 가르던 네 개의 파벌 중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하고 있던 레아는 현 내전에서 균형추의 역할을 맡고 있었고.

테이아와 오케아노스는 어떻게든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판세를 유리한 쪽으로 이끌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레아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내전에 개입하기를 꺼려 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크로노스의 편을 들게 될 줄이야!

문제는 레아가 끌고 온 병력에 그녀 산하의 군단뿐만이 아니라, 여태껏 단 한 번도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우라노스의 직속군도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들은 왕좌에 앉은 이들에게만 충성을 맹세하니, 자신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싶다면 그만한 자격을 선보이라고 외치던 이들까지 합류한 것이다.

이는 여태 단 한 번도 표명하지 않았던 우라노스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으니.

챙그랑!

그때, 갑자기 오케아노스가 들고 있던 무기를 바닥에다 떨어뜨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가, 모두 놀라고 말았다. 테이아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 늘 인상을 찡그리고만 다니던 그가 활짝 웃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런 날만 기다렸다는 듯이.

“다들 뭣들 하느냐, 새로운 왕께 인사드리지 않고!”

오케아노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그렇게 호통을 쳤고, 그제야 수하들도 허겁지겁 연우에게 하나둘씩 고개를 조아렸다.

“……테이아.”

당연히 이에 맞서고 있던 히페리온 등의 시선이 저절로 테이아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눈빛. 사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새로운 왕을 뵙습니다.”

테이아의 굴복 선언과 함께.

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올림포스의 새로운 왕께 고개를 숙였다.

[‘아주 작은 태엽’을 발견하였습니다.]

[‘작은 태엽’을 발견하였습니다.]

……

[동기화율이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15% → 25%]

* * *

뺨, 빠밤, 빰!

거대한 홀에서, 중앙에 난 융단의 좌우로 도열한 뮤즈(Muse)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동시에.

머리에 왕관을 깊게 눌러 쓴 연우가 융단을 가로지르면서 천천히 옥좌에 올랐다.

대관식.

내전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우라노스의 선양을 받아 진정한 올림포스의 왕에 등극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내내. 장남이면서도 막내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는 오케아노스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가득했지만.

테이아나 이아페토스를 비롯한 여러 형제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하는 자는 없었다.

여전히 그가 부리던 신위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시간을 잠시 멈추고, 죽음을 제 맘대로 부리던 모습.

그것은 ‘법칙’을 따르기 마련인 일반적인 신위로는 절대 해내지 못할, 법칙 너머의 힘.

자칫 그에게 밉보였다가 거기에 휩쓸리고 싶은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신격들은 꿈에도 바라마지 않을 왕좌에 앉으면서도,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연우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 모습 어디에도, 그 옛날 제멋대로 감정에 휘둘려 지내던 망나니는 없었다.

세계를 오시하는 절대자만이 있을 뿐.

결국 홀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가 주는 압박감에 저절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것은 새로운 우라노스의 재림을 의미하기도 했다.

정작 당사자는 착잡한 마음을 억지로 숨기고 있는 거였지만.

‘대체 언제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인형극을 계속해야 하는 거지?’

왕좌에 등극하고 나면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무래도 한동안 이런 식으로 계속 신화를 되풀이해야만 하는 모양이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지 모르는 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아테나 등 또 어떤 위기에 잠길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아니면 동기화율을 100%로 다 채울 때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나?’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동기화율이 높아진다는 건, 그만큼 태엽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지만.

반면에 그만큼 크로노스와 일체화가 이뤄지면서 신화에 잠식될 위험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도 간간이 크로노스의 감정인지, 자신의 감정인지 모를 위화감 어린 느낌에 젖을 때가 있었으니.

아무래도 주의를 단단히 기울여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찌릿!

그게 좀처럼 쉬울 것만 같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여왕님께서 납십니다!”

저 멀리.

새롭게 홀의 문이 열리면서 한껏 차려입은 레아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옥좌 옆에 놓인 다른 옥좌는 비어 있었다.

[‘아주 작은 태엽’을 발견하였습니다.]

[동기화율이 계속 상승합니다.]

[27% → 32%]

* * *

연우는 동맹을 맺었을 때 약속했던 대로, 레아와 공동 통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형식상으로나마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수많은 올림포스 신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는 레아가 아닌 연우였으니.

연우는 철권통치를 발휘해 아직까지 올림포스 내에 산적해 있던 문젯거리를 모두 정리하고, 왕의 권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못난 네놈이 제대로 할 수나 있을지…… 제대로 지켜보지도 못한 채로 이리 가는 게 애석하기만 할 뿐이로고.”

어느 정도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을 무렵, 우라노스도 겨우 남은 신력이 소진되면서 눈을 감을 시기가 오고 말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우라노스는 과거 올림포스를 통합하던 과정에서 대지모신에게 크게 잠식되어 격을 상당수 유실하고, 신으로서의 불멸(不滅)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크로노스를 살리고자 남은 신력을 모두 넘겼던 것이니. 연우로서는 마음이 미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연우도 우라노스를 가까운 가족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부성애라는 감정이 여전히 낯설어 ‘아버지’라는 단어는 입에 담기 어려웠지만.

그리고 그 사랑이 자신이 아닌, 자신이 빙의한 크로노스를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점차 강해진 동기화는 연우에게 너무나 어려웠던 부자의 정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가길 어딜 간단 말씀이십니까? 그냥 계십시오. 어젯밤만 해도 지팡이로 아무렇지 않게 제 머리를 후려 패시던 분이.”

“허허! 하여간 말본새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구나. 아주 싸가지가 없어.”

주름이 잔뜩 진 우라노스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폈다.

“하지만 나는 너의 그런 싸가지 없는 모습이 아주 좋았다. 나이도 어린 것이, 겁도 없이 제 형과 누이들에게도 어찌 그리 바락바락 대들던지…… 하지만 이제 다들 나이도 먹었으니, 더 이상 싸우지 말고. 평화…… 롭……!”

“……아버지? 아버지!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아버지!”

연우는 자그마한 빛무리가 되어 부서지는 우라노스를 보면서 눈물을 쏟았다.

마치 손으로 쥐어짠 듯,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에 미쳤다.

만약 ‘아버지’를 자신의 그림자 속에다 담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다면.

돌아가시는 것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우라노스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다른 손길이 연우의 손을 옆으로 치웠다.

“……레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아버지께서 이런 걸 바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오히려 이러는 짓이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야.”

“…….”

결국 연우는 레아의 단호한 말투에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띠링!

[‘큰 태엽’을 발견하였습니다.]

[동기화율이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45% → 52%]

* * *

우라노스의 소멸 이후.

연우는 한 가지 사명(使命)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우라노스를 이어 왕좌에 올랐으니, 우라노스가 마저 다 이루지 못한 업을 이어서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올림포스를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의 사회 내에서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올림포스를 가장 강한 곳으로, 그리고 나아가 진영을 전부 포괄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아직 내분의 가능성이 큰 여러 세력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려 단합성을 기를 필요도 있었다.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때부터 연우는 스스로를 ‘차연우’라기보다는 ‘크로노스’라고 조금씩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신의 사회를 통합해야 한다는 연우의 기치 아래, 올림포스는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여러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은 그에게 더 큰 힘을 가져다주는 원천이나 다름없었고.

덕분에 정복 전쟁이 이어질수록 신의 사회 내에서 올림포스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무엇보다. 우라노스가 양자로 삼았던 형제들의 활약상이 가장 눈부셨으니. 언제부턴가 여러 신격들은 그들을 통틀어서 ‘티탄’이라는 종족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천 년?

아니면 수만 년?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까마득한 시간이 흐르면서.

연우의 자아는 점차 흐르는 세월 속에 파묻혀 나갔다.

[‘큰 태엽’을 발견하였습니다.]

[동기화율이 계속 상승합니다.]

[55% → 61%]

……

[64% → 70%]

[71% → 76%]

……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태엽’이 빨리 감기 되었습니다.]

[신화가 빠른 재생 됩니다.]

* * *

[경고! 자아가 극심한 혼란을 겪는 중입니다. 플레이어, ###으로 서의 자아를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장기간 휴면 상태에 빠집니다.]

……

얼마나.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새로운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휴면 상태가 해지되었습니다.]

[휴면에 대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뭐지?’

연우는 머릿속을 뒤흔드는 소란에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다 자신이 크로노스에 빙의한 상태가 아닌, 그의 의식 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자신의 발밑 아래, 자신인지 크로노스인지 모를 존재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전 우주를 덮을 것처럼 구는 대지모신과 전쟁을 치르는 광경이 보였다.

아니, 저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크로노스였다.

자신의 자아는 저 거대 존재를 구성하던 신화 속에 파묻혀 있었을 뿐.

『이번에는 기필코 너의 날개 한 짝은 뜯어 가야 수지 타산이 맞을 것 같구나, 가이아!』

『너에게…… 저…… 주를…… 네 아비에게…… 그러했…… 듯이…… 너도 똑같이…… 자식…… 에게 죽을…… 운명……!』

푸화악-

크로노스는 그야말로 연우가 처음 왕좌에 올랐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황’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왼손으로 시간을 건드려 모든 우주의 흐름을 정지시켜 대지모신을 묶은 다음, 오른손으로 죽음을 형상화한 낫을 거칠게 휘둘러 대지모신을 크게 잘라 버렸으니.

대지모신은 차차 가라앉으면서도, 마지막 남은 전력을 쥐어짜 크로노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작은 입자로 흩어져 사라졌다.

존재가 지워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신격들은 알고 있었다. 대지모신은 소멸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동면에 들었을 뿐이란 것을.

애당초 개념신인 그녀에게 소멸이란 절대 성립할 수 않는 모순이었다. 그녀가 소멸한다면 우주를 구성하는 법칙마저 무너져, 모든 차원과 우주가 붕괴되고 말 테니.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처럼 ‘퇴치’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올림포스를 비롯하여 결전을 위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신격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크로노스를 바라보았다.

여태껏 전 우주를 집어삼킬 것처럼 위협하던 대지모신을 쓰러뜨릴 수 있는 자가, 이 우주에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어디선가 깊이 잠든 ‘그’가 있고, 또 다른 신과 악마들을 어디론가 유폐시키고 있다는 천마가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대에 전 우주를 통틀어서 크로노스에 대적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다른 사회의 주신들마저도.

그리고 크로노스는 그런 시선들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오만하게 굴고 있었으니.

이곳에서 크로노스를 지켜보고 있던 연우만이, 그에게 현재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대지모신이 내린 저주가 크로노스를 잠식하기 시작했어. 과거 우라노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연우는 자신이 어째서 크로노스에게서 다시 자아를 분리시킬 수 있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 저주 덕분에 정신에 혼란이 생겨서 내가 다시 따로 분리될 수 있었던 건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원래 그가 이룬 경지라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다고 할지라도, 절대 자아가 사라질 걱정은 없었지만.

‘연우’라는 자아를 숨긴 채. 크로노스의 가면을 쓰고, 크로노스로서 생활을 하고, 크로노스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서. 크로노스라는 페르소나(Persona)를 쓰게 되어 완전히 동화를 이룬 모양이었다.

[동기화율이 계속 상승합니다.]

[91% → 94%]

‘동기화율도 벌써 90%를 넘었어. 그러니 이럴 수밖에.’

그동안 무의식중에 찾았던 태엽도 꽤 되는지, 밀려 있는 메시지가 아주 많았다.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있다간 겨우 복구한 자아마저 다시 휩쓸릴 판국이었으니. 퀘스트는 아직도 끝날 생각을 않았다.

어떤 수를 강구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저주에 잠식된 크로노스에게서 이질적인 기운이 감지된 것이다.

‘마성……!’

우라노스의 신력에 여태껏 억눌려 있던 마성이, 아주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오면서 크로노스의 정신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츠츠츠-

크로노스의 눈가에 광기가 맺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