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자격 시험 (8)
대지모신을 잠재운 이후.
크로노스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여전히 오딘이나 옥황상제처럼 크로노스와 견줄 만한 주신격들은 꽤 있는 편이었지만, 감히 크로노스의 패권에 도전하려는 의중을 내비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크로노스가 수많은 신격들에게 인식시킨 이미지가 너무 확고했고, 기존 법칙을 초월한 권능이 대립을 꺼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끽해야 케르눈노스처럼 소속된 사회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돌아다니는 이들만이 견줄 수 있을까 싶었다.
결국 크로노스는 개념신이나 창조신들 이후로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황’에 가장 근접한 존재라 평가받았고.
그런 크로노스가 수장으로 있는 올림포스는 나날이 명성이 높아져만 갔다.
그리고 올림포스를 이끄는 티탄에 대한 공포는 신의 사회 전반에 고루 걸쳐 나타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해진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저주의 잠식이 심해지면서 계속 마성을 깨우고 있어.’
의식 세계에서 크로노스를 살피던 연우는 그가 아주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런 변화를, 정작 크로노스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아버지 우라노스를 좀먹었던 저주가 자신에게도 전가되자,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만 내비칠 뿐이었다.
‘이건 반드시 내가 견뎌야만 하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다.’
주변에 알릴 수도 없었다.
우라노스가 저주에 잠식된 이후, 올림포스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보았었으니까.
그는 언제나 영원히 옥좌에 앉아 있어야 할 것처럼 적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어야 하며, 아군에게는 늘 거대한 성채 같은 왕으로서 군림해야 했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혼자서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크로노스, 당신 요즘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무슨 일이라도 있어?”
물론, 그와 가장 가까이 붙어 있던 레아가 그런 크로노스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챘지만.
“아니. 아무것도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크로노스는 그녀의 도움을 차갑게 뿌리쳤다. 자신에 대한 걱정을 그녀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지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터라, 통치 전략의 일환으로 결혼을 한 것에 가까웠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어느 정도 부부로서의 정도 붙어 있는 상태였다.
결국 그렇게 다시 까마득한 시간이 흐르고.
그동안 저주에 계속 시달리던 크로노스는 점차 성격이 날카로워지면서, 그의 치세는 폭정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곳곳에서 반란도 일어났다.
개중에는 올림포스의 패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곳도 있었고, 올림 포스 내의 불만 세력도 있었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그들을 모조리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무저갱에다 유폐시켰다.
올림포스 신들이 타르타로스라 부르며 꿈에서라도 나타날까 두려워하던 장소.
크로노스의 패권은 그렇게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 * *
“크로노스, 당신 미쳤어? 반란군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헤카톤케이레스를 그런 곳에……!”
쾅!
어느 날, 레아는 크로노스가 있던 집무실의 문을 부서져라 밀어 젖히면서 들어왔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온 건지 숨소리가 상당히 거칠었다. 표정도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크로노스는 마침 보고를 올리던 아틀라스를 뒤로 물린 다음, 무심한 표정으로 레아를 돌아봤다. 왕좌에 오래 앉았기 때문일까. 그는 젊은 시절에 망나니라고 불렸을 정도로 감정적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무표정한 얼굴에 서늘한 눈빛만 달고 있었다.
“레아, 이곳은 궁이다. 보는 눈이 아주 많으니 행동거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어떨까?”
“미안하지만, 폭군인 네게 그런 말 듣고 싶은 마음 따윈 없어. 그리고 지금 이 일은 어떻게든 따져 물어야겠어. 헤카톤케이레스! 그들이 왜 타르타로스에 있는 거지?”
“아, 그것 말인가?”
레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크로노스를 보고 열불이 더 뻗치고 말았다.
헤카톤케이레스. 그들의 양부, 우라노스가 티탄만큼이나 자식처럼 아끼던 이들이다. 3명으로 이뤄진 괴신(怪神)들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지고 있는 힘과 권능은 모든 티탄들을 압도할 만큼 강하던 자. 올림포스의 수문장 역할을 맡고 있기도 했다.
게다가 혈통만 따진다면, 헤카톤케이레스가 그들 부부보다 훨씬 우라노스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크로노스의 집권 초창기에 왕위가 원래는 그들에게 갔어야 하는 말도 나왔었으니.
왕위 계승에 걸림돌이 될까 싶어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뒀던 다른 티탄들과 다르게, 레아는 여태까지 그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간만에 그들을 만나려던 차, 갑자기 헤카톤케이레스가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분노를 토해 낼 수밖에.
“그만한 죄를 지었으니까.”
“뭐?”
“얼마 전, 테이아가 진압되었었지. 그들은 테이아와 손을 잡으려 했던 혐의다.”
“테이아는 일을 치르기도 전에 잡혔잖아! 게다가 헤카톤케이레스는 무슨 자린지도 모르고 나갔다가, 담소만 나눴을 뿐이라고!”
“죄가 없다면, 조사 과정에서 차차 밝혀지겠지.”
“크로노스!”
레아는 크로노스가 명분만 테이아를 갖다 댔을 뿐, 헤카톤케이레스를 풀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왕권 강화를 위해 우라노스의 피붙이를 절대 올림포스에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레아는 그것이 더 답답했다.
이제 와서 그의 치세에 도전할 만한 자가, 그의 왕좌를 의심할 만한 자가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크로노스는 너무 독선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처음 왕좌에 앉았을 때까지만 해도 형제들을 다독이고, 직접 올림포스 신들을 고취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찍어 누르고, 반발하면 치워 버리는 폭군만 있을 뿐이었다.
레아는 그 점이 너무 안타까웠다. 우라노스의 뜻을 이어 가겠다며 자신 있게 외치던 크로노스는 대체 어디로 가고, 지금 이 자리에는 괴물만이 남은 걸까. 그런 그의 모습에 서서히 마음을 열었던 자신도 언제부턴가 없었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오히려 시선은 레아의 배에 고정되었다.
“……레아, 너?”
“당신과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설마…… 임신을 한 거냐?”
얼음장 같았던 크로노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하지만 레아는 자신의 배를 감추면서 홱 돌아서려 했다.
“말했잖아. 당신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내 아이를 배 놓고, 그런 말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크로노스는 재빨리 옥좌에서 일어나 레아의 팔을 붙잡았다. 레아는 그런 남편이 화가 나 따귀라도 쳐올리려 했지만, 크로노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배에 시선을 고정하자 저도 모르게 흠칫거리고 말았다.
크로노스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아의 배를 매만졌다.
“나의, 아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동안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서로 이성적으로 마음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이상하게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으로 결실이 생겼으니.
순간, 크로노스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너는 네 어미만큼이나 따스함을 지니고 있구나. 영원토록 그 따스함을 간직하란 뜻에서 ‘헤스티아’라 부르마.”
“…….”
레아는 그런 크로노스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헤스티아가 태어난 이후.
크로노스 부부에게는 거짓말처럼 자식들이 연달아 태어나게 되었다.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라는 세 딸이 태어난 이후, 하데스와 포세이돈이라는 아들까지 태어나게 되었으니.
내심 후계 걱정을 하던 올림포스 신들은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고, 크로노스도 언제부턴가 바깥 활동보다 집안일에 더 충실해졌다.
레아도 점차 크로노스가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아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에게 저주를. 네 아비에게 그러했듯이, 너도 똑같이 자식에게 죽을 운명일지니.
두근!
대지모신이 내린 저주는 여전히 그의 심장 한편에 남아 있었다.
* * *
“크로노스, 이게 무슨 짓이야! 대체, 대체……!”
“너무 걱정하지 마라, 레아. 아이들은 내 공허에서,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영원토록.”
“안 돼! 안 된다고!”
레아는 크로노스의 눈가에 맺힌 광기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헤스티아부터 포세이돈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자식들이 크로노스의 ‘입속’으로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허 속으로.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아이들과 같이 웃고 떠들던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레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크로노스는 크로노스이되, 크로노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크로노스의 탈을 쓴 다른 무언가였다!
하지만 지금 크로노스에게는 이게 아주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대지모신이 내린 예언은 그냥 무시하기엔 너무 강력했으니까. 개념신의 말이라는 것은 그만큼 강한 구속력을 지니고 있었다. 레아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배 속에 있는 이 아이만큼은…… 제우스만큼은 지켜야 해.’
크로노스에게 깜짝 선물로 주기 위해 말하지 않았던 막내 아이의 운명이 이렇게 될 줄이야.
비장한 결심을 한 레아는 그날 밤 크로노스를 피해, 도망자 신분이 되어 올림포스에서 도망쳤다.
* * *
“너의 이름은 제우스(Zeus). 옛 신중신 드야우스(Dhyeus)의 이름에서 따왔단다. 그만큼이나 언젠가 위대한 존재로 자라다오.”
레아는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랄 막내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을 사무치게 만들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쫓아라!”
그때, 저 멀리서 크로노스가 보낸 추격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한단다, 아들아.”
레아는 제우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강에다 그를 떠내려 보냈다.
그리고 추격대가 있는 곳으로 몸을 던졌다. 녀석들이 제우스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게 하기 위해.
* * *
“당신을 죽이러 왔소, 크로노스!”
또다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어느 날,
장성한 제우스가 나타나 도전장을 날렸다.
명석했던 그는 갓난아기였던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여러 운명의 난관을 돌파하면서 어엿한 대신격으로 성장해 있던 차였다.
더구나 크로노스는 자식들을 삼킨 이후, 점차 광기가 더 심해지면서 저주에 거의 완전히 잠식되다시피 한 상태.
마성이 이성을 완전히 잠재웠으니. 이제 그에겐 ‘아버지 우라노스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기존의 사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 내 왕좌는……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그런 그의 눈에 제우스는 사명을 그르치게 만들려는 적으로밖에 비치지 않았고.
심지어 제우스가 오케아노스의 도움을 빌려, 자신이 과거에 삼켰던 자식들을 다 토해 내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여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저리 변하시다니…… 가슴이 아플 뿐이군.”
크로노스의 공허에 갇혀 빠져나올 기회만 기다리던 하데스와 형제들은 몰락한 아버지를 보며 아픈 가슴을 움켜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 레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크로노스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티타노마키아였다.
* * *
기나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올림포스의 새로운 주신이 된 제우스 3형제는 신진철에 꽁꽁 묶인 크로노스를 두고, 차례대로 판결을 내렸다.
『나는 크로노스의 신위를 가져가겠노라.』
하데스는 수많은 신격들을 공포로 넣던 크로노스의 신위, ‘죽음’을 강탈했다.
『나는 크로노스의 신력을 가져가겠노라.』
포세이돈은 오늘날의 크로노스를 있게 만들었던 우라노스의 신력을 약탈했다.
『나는 크로노스의 신앙을 가져가겠노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우스는 온 우주에 걸쳐 크로노스를 향하던 수많은 신전을 찬탈하면서, 올림포스의 왕좌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로노스를, 타르타로스에 유폐시킨다!』
새로운 주신들의 명령에 따라, 모든 것을 잃고 만 크로노스는 과거에 반역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도 똑같이 타르타로스에 처박히고 말았다.
하지만.
‘안 돼……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반역자들을 물리치고…… 올림포스는 내가 이끌어야……!’
마지막까지 겨우겨우 남아 있던 크로노스의 정신은 이대로 스러질 수 없다는 의지 아래, 마지막 수를 던지고자 했다.
‘크로노스’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축, ‘시계태엽’을 뽑은 것이다.
마성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도, 그는 간간이 의식을 차리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 왔다. 시간과 죽음이라는 신위는 법칙을 초월하기 때문에 간간이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었던바. 두 신위를 관통하는 키워드, ‘시계’로 그동안 쌓았던 신화를 정리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태엽’은 그런 ‘시계’를 구성하는 중심 요소였으니. 쉽게 말해, 그것은 그를 이루는 정수(精髓)이자 핵(核), 그리고 크로노스라는 존재를 가동케 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었다.
크로노스는 그런 ‘태엽’을 바깥으로 던졌다.
올림포스에서도, 천계에서도, 어느 누구도 눈치챌 수 없도록.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쩌면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 ‘태엽’이란 씨앗이 어딘가에 닿아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런다면 자신도 언젠가 부활을 이뤄 낼 수 있을 테니.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지 않은가. 농작물이 가을에 수확되어 겨울엔 죽고,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듯이…… 이 크로노스도 겨울을 지나 새롭게 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태엽’은 그걸 위한 씨앗이고.’
그렇게 바깥으로 던져진 ‘태엽’은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도록 수많은 우주와 차원을 누비다, 끝끝 내 어딘가에 다다랐으니.
연우는 ‘태엽’이 떨어진 장소를 보고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곳은 자신에게도 아주 익숙한 장소였으니까.
푸른 별이 그곳에 있었다.
“……지구.”
자신과 동생이 태어났던 고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