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68화 (568/862)

18화. 자격 시험 (9)

“지구로 자신의 자아라고도 할 수 있는 ‘태엽’을 던졌다…….”

연우는 크로노스의 삶을 대신 살아 보기도 하고, 이렇게 계속 지켜보기도 하면서 ‘태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태엽’은 크로노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우주가 창생된 이래,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면서 크로노스가 억겁의 세월 동안 쌓은 신화를 구성하는 중축(中軸).

시간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신위가 별다른 사달 없이 원활히 굴러가게 해 주는 중간 톱니바퀴였던 것이다.

그런 것을 직접 뽑아다 내던졌으니, 당연히 신위도 덩달아 기능이 정지할 수밖에.

시간이라는 신위가 정지하니, 크로노스의 육체도 같이 정지한 것이리라. 티탄들은 그걸 가리켜 ‘죽음’이 크로노스를 잠식했다고 생각하였고.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이것으로 크로노스라는 존재는 완전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크로노스의 신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 *

“……여기는?”

크로노스가, 아니, 크로노스에게서 분리된 자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태껏 잊고 있었던 여러 감각들이 인지되었다. 밤하늘이 보이고, 꽃향기가 맡아졌으며, 피부 끝으로 살랑대는 바람이 느껴졌다. 다섯 개의 감각이 생생했던 것이다. 동시에 정체 모를 격통이 몸을 찌르르 울렸지만……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좋았다.

살아났다는 감각이 생생했다.

“어딘지는 몰라도, 일단 깨어나게 된 셈인가.”

크로노스는 버릇처럼 무의식중에 자신이 있는 곳의 위치를 찾아보고자 허공을 짚었지만, 손끝으로 그저 바람만 느껴지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제야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창조의 영역까지 넘볼 수 있을 것 같았던 막대한 권능은 이제 찾아볼 수도 없고, 온 우주를 오시하던 격도 상실한 상태. 특히 의식 세계가 너무 작아져서 보이지 않는 밧줄에 꽁꽁 묶인 것처럼 갑갑하기만 했다.

하긴 새로운 ‘황’이 될지도 모른다고 평가받던 몸에서, 이제는 한낱 필멸자로 한없이 영락하고 말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실감은 잠시일 뿐.

크로노스는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제들 중에서도 막내로 입양되었고, 결국엔 왕권까지 거머쥐었던 자신이 아닌가. 필멸자로 떨어졌다고 한들, 잃어버린 것이야 다시 쌓으면 그만이었다. 아니, 도리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상태가 나쁘지만은 않아. 아니,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

크로노스는 머릿속이 너무 개운해서 좋았다. 왕좌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마성이 자꾸만 의식을 흔들어 놓아 끔찍한 두통을 안고 살아야만 했는데. 그리고 어떤 판단을 내려도 계속 극단적인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너무 상쾌했다.

광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마성과 분리되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아.’

마치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아니, 당시에는 없었던 연륜이라는 것이 생겼으니, 오히려 더 좋았다.

훨씬 더 이성적이며 현명한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을 테니.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정신적 면역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이런 상태를 두고, 뭐라고 지칭하는 게 좋을까?

‘……냉혈(冷血).’

그래. 그런 단어가 좋을 것 같군.

크로노스는 차갑게 웃었다.

차가운 피. 그런 단어만큼이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형용사도 없으리라.

자식에게 빼앗긴 옥좌를 되찾으려는 존재의 모습은.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도저히 피가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아주 무정한 아버지로만 비칠 테니.

* * *

크로노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행성에 대한 조사였다.

하지만 도저히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수많은 우주와 차원을 다스렸다지만. 그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문명들을 굽어살폈다지만, 이런 행성은 여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올림포스의 영역이 아니라, 다른 사회의 영역인가?”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치세에 있던 올림포스가 번영을 구가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우주의 영역을 지배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신의 사회는 아주 많았고, 그중에는 올림포스와 비견할 만한 곳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크로노스는 우선 이 행성이 어느 사회의 영역인지부터 파악하고자 했다.

‘내 편을 들어 줄 수 있는 곳이라면 그만큼 격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만큼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

신격들만큼 영역에 민감한 자들도 없다. 만약 자신들의 터전 안쪽에서 허락받지 않은 누군가가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런다면 당장 제거하려 들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아니. 차라리 지금은 때가 올 때까지 계속 자중하고 있는 게 좋으려나.’

크로노스는 행여 자신을 올림포스에 고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재차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사실 이것도 일리는 있었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 적이 되는 사례는 무수히 많았으니까.

무엇보다, ‘태엽’이 여러 우주를 전전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안에 어떤 식으로 사회의 질서가 정립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국 필요한 건 정보인 것인데……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군.’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그렇다면 우선 격부터 쌓아 올려야겠어.’

크로노스는 조금씩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해 나갔다.

* * *

크로노스는 ‘태엽’이 도착한 행성을, 이곳에 사는 지성인들이 지구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크로노스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이름이란 점이었다.

웬만한 사회들의 영토들은 전부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었지만, 떠오르는 게 전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여태 발견되지 않은 변두리 영역일 가능성도 고려해 봐야겠군.’

게다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자신들이 기거하는 지구가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 이제 갓 곳곳에서 문명을 태동하기 시작한 ‘어린’ 존재들이었다.

‘차라리 잘되었어. 그만큼 신화를 쌓기 쉬워질 테니.’

문명의 발전 정도가 미약할 그만큼 미신은 득세하게 되고, 영웅과 신에 대한 기대가 커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 집단 내에 전승이 강하게 남아 계속 확장되고, 끝끝내 종교가 탄생하게 되니. 신앙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앙을 필요로 하는 여러 신의 사회들이 갓 태동하기 시작한 문명을 찾고자 그토록 애쓰는 이유였다.

‘이곳을 나의 새로운 성역, 기반으로 삼아 일어난다.’

그 뒤로.

크로노스는 수도 없이 많은 생을 살게 되었다.

그를 이루는 ‘태엽’은 시간과 죽음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니, 이를 통해 전생(轉生)을 거듭 반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생을 시작할 때마다, 크로노스는 영웅이 되어 수많은 활약상을 벌였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절대 빚어낼 수 없는 활약들은 전설이 되었고, 그것은 구전을 통해 여러 문명과 민족들을 따라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를 기리는 수많은 종교들이 탄생했다가 쇠락하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크로노스는 몇 개나 될지 모르는 수많은 이름들을 얻었지만, 전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원래 자신을 규정하는 이름이었던 ‘크로노스’까지 잊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원래 이름으로 불러 주지 않았으니,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건, 그가 원체 그전에 쌓았던 격이 높았기 때문일 뿐.

그리고 지구에서의 생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는 뜻밖에도 이상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올림포스의 신화가 왜 여기서 들리는 거지? 그럼 이곳은 올림포스의 영역인가……? 하지만 분명히 이전 생에서는 아스가르드의 신화가 들리지 않았었나? 천교의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지구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여러 종교들은 분명 신의 사회를 그려 내고 있었다. 물론, 모든 게 정확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신화라는 것은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애당초 필멸자들이 그렇게 정확하게 초월자들의 신화를 꿰뚫어 본다는 게 그로서는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더구나 더 놀라운 건 지구가 이렇게 발전하는 동안에도, 여태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신격들을 마주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마치 다른 무언가가 개입해서 그들을 전부 제거하거나, 어딘가에 봉인한 것처럼…….’

하지만 그런 크로노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계속 문명을 발전시켰고.

언제부턴가 크로노스가 새로운 활약상을 펼쳐도, 그저 지역의 민담으로만 남을 뿐 더 이상 신화가 되지 않게 되었다.

격이 성장하는 데 있어 드디어 장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조금만 더 하면 탈각을 이룰 수 있을 텐데……!’

크로노스는 지구에 대한 의문을 지우고, 어떻게 해야 마지막 장벽을 통과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만 했다. 탈각을 지나면 초월까지는 금방일 것 같은데, 그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사실 수많은 전생을 거쳐서 쌓은 격이라고 해도, 불과 만 년도 안 되는 시간. 원래 크로노스가 살았던 억겁의 세월과 비교한다면, 이만큼 따라온 것만 해도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니 평정심을 갖추려 해도,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지구에서 대세가 된 것이 마법 문명이나 주술 문명이 아닌, 과학 문명이란 점이었다.

물리적 현상 법칙에 집중하는 이 문명은 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형이상학을 물리치는 데 탁월했으니. 신격이 태동하는 데 너무 큰 어려움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크로노스는 처음으로 계획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 * *

‘이번 생은 고아 신세인가? 재벌가 막내아들쯤으로 태어난다면 편했을 것을.’

크로노스는 자신이 전생한 장소가 한국의 변두리에 위치한 고아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

사실 이번 생은 이렇다 할 활약상을 펼칠 생각이 없었다. 영웅이 될 생각도 없었다. 그래 봤자 신화가 성립하기는커녕, 요술을 부린다면서 탄압되기 쉬울 뿐이었으니.

그저 아무렇게나 살면서 차근차근히 머릿속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탈각과 초월을 이루려면 계획의 노선을 바꿔야 했으니, 그걸 구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따악!

“아얏!”

지금 크로노스가 정체성을 깨달은 육체는 불과 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 당연히 부지불식간에 이마를 강타하는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인상 찡그리는 거 아니거든! 누가 그러라고 가르쳤어!”

크로노스가 끙끙거리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부여잡고 위쪽을 흘낏 노려보았다.

그보다 두 살 정도 더 많을 것 같은 여아가 고사리 같은 두 손을 양쪽 골반에 걸친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크로노스의 머릿속으로 기억이 살짝 들었다. 이곳 고아원에서 군기반장 역할을 맡고 있는 여아. 위로 있는 오빠들도 그녀에게는 꼼짝 못 할 정도로 당찬 여장부이기도 했다.

“다음부터 또 그러면 혼난다!”

“…….”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그녀를 보면서.

크로노스는 어쩐지 이번 생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말았다.

* * *

크로노스의 예상은 적중하고 말았다.

그 뒤로, 사사건건 크로노스가 뭘 할 때마다 여아가 계속 따라붙으면서 꼬치꼬치 잔소리를 퍼부어 댔던 것이다.

“밥은 먹었어? 키도 쪼그마한 게! 어서 급식실 안 가?”

“오늘 학교 땡땡이쳤다며? 죽을래?”

“또 친구 때렸다면서? 너 크면 뭐가 될래?”

“공부 안 하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크로노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거기다 이름까지 레아라니.’

여아의 이름은 신레아.

그들이 있는 고아원은 성당에서 직접 운영하는 기구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세례명을 붙여 주곤 했다.

레아(Leah)는 성경 속 예수의 조상인 유다의 친모를 가리키는 이름인바. 그러니 별달리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 이름의 발음이 이따금 크로노스의 심장을 바늘처럼 쿡쿡 쑤셔 댄다는 점이었다.

크로노스라는 진짜 이름도 잊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온 그였지만, 레아라는 이름만큼은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아니, 잠이 들 때면 항상 그를 괴롭히는 이름이었다.

한평생 그녀에게 상처만을 입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떠나면서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 했었기에, 항상 죄책감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따금 크로노스는 신레아가 계속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진짜 레아가 그녀를 시켜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잔소리들은 언제부턴가 따스한 관심처럼 느껴졌고.

크로노스는 신레아에게서 레아의 지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구에서 눈을 뜬 지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을 뜬 것이다.

“어휴, 등신아. 어떻게 이리 오래 걸리니? 참 빨리도 말한다. 눈치를 그렇게 줬는데도……. 어휴! 키워서 잡아먹기가 뭐 이리 힘들어?”

전전긍긍하던 끝에 그런 마음을 겨우 고백했을 때 돌아온 건, 신레아의 핀잔이었지만.

그렇게.

크로노스는 신레아와 결혼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평범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하고, 함께 데이트를 하고, 같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

언제나 신화를 쌓기 위해 치열한 삶만을 되풀이해야 했던 크로노스로서는…… 너무나 가슴이 따뜻해지는 하루하루였다.

결코 깨고 싶지 않은 날들.

그래서 언제부턴가 크로노스는 신화를 쌓아야 한다는 생각 따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격을 올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언제 이뤄질지도 모를, 이제는 한낱 망념에 불과할 그깟 것들이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로서는 지금 신레아와 함께하는 현실이 더없이 소중했다.

그리고.

“이게…… 내 아이들이라고?”

크로노스는 신레아가 가져온 초음파 사진을 보고 눈을 파르르 떨었다.

신레아는 소중하게 배를 쓰다듬다가, 도중에 예리하게 도끼눈을 떴다.

“등신아,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지난번에 술 처먹고 짐승처럼 기어들어 오더니 결국…… 대학원도 가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기억 안 난다고 발뺌하면 진짜 죽는다?”

“아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 내 아이!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그것도 둘이나! 한꺼번에 둘이나 생겼다고!”

신레아는 너무 좋다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크로노스를 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 역시 계획에 없던 아이가 생겨 놀라긴 했지만, 기뻤었으니까. 다만, 빠듯한 살림에 갑자기 둘이나 식구가 더 생겼으니 어떻게 생활비를 쪼개야 할지 머리를 굴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크로노스가 뛰다 말고, 표정이 살짝 울적해지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웃다가 말고 갑자기 왜 그래?”

“으, 응? 아, 아냐. 아무것도.”

크로노스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배 속에 든 쌍둥이를 본 순간, 지난날 레아와 함께 어울리던 다른 자식들이 문득 떠올랐다는 말을.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그리고 단 한 번도 사랑을 주지 못했던 가련한 아이, 제우스.

한때는 증오했지만, 지금은 그 아이들이 느꼈던 절망과 좌절을 잘 알 것 같기 때문에. 레아에게만큼이나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제우스 녀석들이 떠올라서 그래?”

그래서 갑자기 신레아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던졌을 때, 크로노스는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홱 하고 돌아간 시선. 떨리는 시야 속에 담긴 신레아는 싱긋 웃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마. 그놈들은 서로 머리 쥐어뜯으면서, 알아서 잘살고 있으니까.”

“레, 레아! 너…… 설마……?”

“등신.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눈치를 팍팍 줬는데도, 어째 눈치 한 번 채질 못하니.”

“……!”

그 말에.

“꼭 내 입으로 말을 하…… 어머! 얘가 갑자기 왜 이래?”

크로노스는 울먹거리면서 충동적으로 신레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지금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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