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자격 시험 (12)
그 순간.
크로노스는 여태껏 ‘태엽’ 안에만 잠든 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두 개의 신위가 톱니바퀴처럼 조금씩 맞물려 작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과 죽음.
‘죽음’의 경우에는 하데스에게 빼앗기긴 했다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죽음’이라는 개념이기보다는 명계를 다스리는 옥좌에 가까운 부가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으니.
덕분에 크로노스는 ‘죽음’을 외부로 방출해서 심상 세계를 더럽히고자 했다.
올포원을 강제로 ‘죽음’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무소속의 신, 크로노스의 신화가 77층을 가득 물들입니다!]
[플레이어 ‘비바스바트’의 성역, 빛의 관이 크로노스의 신화로 가득 찹니다.]
[신화가 휘몰아칩니다.]
[플레이어 ‘비바스바트’의 업적이 한없이 부족합니다.]
……
[신화를 토대로, ‘죽음’의 신위가 격을 발산합니다!]
[플레이어 ‘비바스바트’가 강렬하게 저항합니다.]
[플레이어 ‘비바스바트’의 권능, 불사(不死)가 발동됩니다.]
[상성 차이로 인해 ‘죽음’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허튼짓을!』
올포원이 뿜어내는 어기전성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크로노스가 자신의 심상 세계에다 배출시키는 신화 때문에 대부분의 권능과 스킬이 정지되어 가고 있었으니.
이러다 자칫 자신의 자아 영역까지 침범당할 판국이라, 섣불리 움직이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순간은.
‘지금!’
크로노스가 바라던 가장 바라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남은 ‘죽음’의 잔재 기운이 저주로 변환됩니다.]
[플레이어 ‘비바스바트’가 극심한 저주에 사로잡혔습니다!]
[‘상태 이상: 속박’이 발현됩니다!]
휘리릭!
『흡……!』
크로노스를 덮쳐 오던 올포원의 동작이 조금씩 느려졌다. 잘게 흩어졌던 죽음의 신위가 칠흑을 타고 흘러와 녀석의 사지를 쇠사슬처럼 빠르게 감았던 것이다.
본래 죽음이라는 개념은 상성상 녀석에게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신화에 잠식되어 권능의 효과가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는 오히려 발목을 묶는 족쇄가 되는 구조.
이것이 바로 크로노스가 페렌츠 백작과 상의했던 계획이었다.
이것만큼 확실히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
‘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해.’
쿠쿠쿠……!
올포원은 칠흑에 묶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속박을 풀어내려 자신의 격을 잇달아 발산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외부로 뿌려 놨던 권능 중 상당수가 그에게로 환원되면서 속박도 빠른 속도로 풀리려 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말도 안 되는 능력이로군.’
크로노스는 질린 나머지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도대체 저만한 능력자가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지금이라도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어 볼까 하는 유혹에 강하게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냉정하게 자신과 녀석 간의 전력을 비교했다. 결과는 당연하지만 비교 불가. 애당초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탑이 있는 한, 녀석은 절대 패배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으니. 페렌츠의 말에 따르면, 천계의 수많은 초월자들을 홀로 막아 내고 있다 하지 않은가. 그렇다는 건 그만한 숨겨진 패가 많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 속박도 어떻게든 풀어 역전을 꾀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빨리 속박을 해제한다고 해도 ‘찰나’의 시간이라도 걸릴 수밖에 없었고.
그 ‘찰나’는 격을 회복한 크로노스에게 있어, 다른 뭔가를 시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위쪽을 응시하면서 양팔을 갑자기 좌우로 활짝 펼쳤다.
『뭘…… 하려는 거지?』
당연히 크로노스가 맹공을 퍼부을 것이라 생각했던 올포원으로서는 그가 뭘 하려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뭐긴 뭐야.”
그 순간, 크로노스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못난 아들놈 구하려는 거지.”
그 순간, 이번에는 ‘시간’의 신위가 작동했다.
빛의 세계를 물들였던 칠흑이 더 맹렬한 기세로 뻗쳐 나갔다. 곳곳을 따라 파문이 잘게 퍼져 나가면서, 크로노스는 드넓은 우주의 섭리에 접촉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간만에 맛보는 감각.
모든 우주와 차원마저도 초월하여, 저 드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다 보는 감각이 영혼을 한껏 적셔 왔다.
이 순간, 크로노스는 모든 신격들이 그토록 바란다는 전지와 전능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강한 고양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시간을 멈춰 올림포스의 내전까지 종식시키지 않았던가. 많은 신격들이 두려워하던 그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역시 ‘굴레’를 굴리는 건 무리인가?’
크로노스는 그런 감각과 별개로, 자신의 능력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예전과는 아주 많이 달랐던 것이다. 아무리 격을 회복했다고 해도, 상당수를 유실해 버렸으니 안 되는 것이겠지.
모든 우주의 시간을 조금만 앞으로 되감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많이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딱 한 달, 아니, 단 며칠만이라도 좋았다. 정우가 탑에 들어오기 직전이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전성기 때에도 ‘굴레’를 굴리는 건, 단 두 번밖에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던바. 그마저도 올림포스가 상당한 인과율을 소모했기에 가능했었다. 당연히 지금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그래서 크로노스는 처음으로 잃어버린 옛 능력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굴레’를 이용하고자 했다.
‘굴레’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전지(全知)가 일부 가능해진다.
‘굴레’를 엿보는 데에 과거를 투사한다면, 특정 시점에서 벌어졌던 모든 우주의 현상들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고.
미래를 투사한다면, 예지(豫知)가 가능해진다.
16층의 앉은뱅이 세 여신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어야만 가능해 진다는 영역을, 크로노스는 홀로 이뤄 내는 것이다.
물론, 그건 진짜 미래의 일을 내다본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각각의 운명이란 것은 수많은 변수들을 담고 있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게 절대 아니었으니까. 그런 것을 관측할 수 있는 존재는 시공의 한계를 초월한 ‘황’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있을지도 모를 가능성의 영역을 내다보는 정도는 가능했다. 어느 특정 인물이나 구역에 한정시킨다면, 변수도 한정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게 크로노스가 엿보고자 한 존재는 정우였다.
정확하게는 정우가 앞으로 펼쳐 낼 미래.
‘지금의 나로서는 올포원, 이 자의 구속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 내가 직접 정우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렇다면 정우가 무사히 탑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그럴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크로노스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정우가 탑에서 빚어낼 미래‘들’을 보고자 했다.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찾아, 그쪽으로 정우를 유도할 생각이었다.
찰나의 순간 동안. 수많은 미래들이 크로노스의 망막 위를 스쳐 지나갔다.
일만 개가 넘는 정우의 미래가.
하지만.
‘……말도 안 돼.’
크로노스는 그 많은 미래들을 보면서 절망의 늪에 빠져야만 했다.
그렇게나 많은 미래들을 보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미래에서도 정우를 위한 해피 엔딩은 존재하지 않았다.
* * *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피가 너무 빨리 돌았다. 현기증이 강하게 핑 하고 돌 정도였다.
그만큼 이곳에서 계속 지켜본 크로노스의 생활들은 그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여태까지 그가 알고 있던 진실들이, 아니,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여태껏 아버지는 기나긴 세월 동안 불우한 삶만을 살아왔고, 마지막에는 사실 어머니와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그런 것도 모르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뒤에 가려진 진실도 모른 채, 그는 아버지를 여태 원망만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연우는 가슴 한편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좀처럼 누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고 싶었지만, 좀처럼 입이 떼어지질 않았다.
생생하게 그려지는 신화들을 보면서 당장 밖으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럴 수가 없는 현실이 너무 원통하기만 했다.
그러다 크로노스가 정우를 쫓아 탑에 들어오고, 올포원에 억류되어 역전을 꾀하려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안 돼!’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크로노스가 보았던 가능성 있는 정우의 많은 미래들은 그도 진즉에 알고 있던 것이었으니까.
‘일기장 속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아.’
일기장에서 정우의 사념체가 수도 없이 경험해야만 했던 수많은 가능성들. 그리고 기록들.
끝끝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좌절과 절망만을 계속 되풀이해야만 했던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크로노스에게도 똑같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았던 자신의 마음도 찢어질 것 같았는데,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할까?
‘어떻게든…… 어떻게든 아버지를 도와야만 해!’
그래서 연우는 어떻게든 크로노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비록 이것이 한낱 파편화된 기억이라고 해도, 이미 끝난 지 오래인 과거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별 쓸데없는 짓이라고 해도.
그래도 연우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돕고 싶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저 절망에 빠진 낯짝은…… 여태 기억하고 있는 재수 없는 아버지에게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언제나 말이 없고 무뚝뚝해야만 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항상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그래서.
화아악!
있는 힘껏 격을 방출했다.
동기화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언제부턴가 크로노스를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 세계에 갇힌 상태로 어떻게 움직인다 한들, 이미 분리된 의식이 다시 연결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재접속이 실패합니다!]
[재접속이 실패합니다!]
……
[경고! 현재 크로노스와의 동기화율이 필요 이상으로 높은 상태입니다. 재접속이 성공할 시, 크로노스의 신화에 잠식될 위험이 큽니다. 재접속이 아닌 ‘태엽’을 찾아 퀘스트를 완수하세요.]
[경고! 필요 이상으로 동기화율이 높은 상태입니다. 무리한 재접속은 영혼의 자아 붕괴로 이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냉혈 특성이 불발됩니다!]
‘젠장!’
쾅!
쾅!
연우는 결국 동기화가 연거푸 실패하자, 아예 영체를 직접 날리려 했다. 발밑에 그려지는 영상들을 강제로 깨부숴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당연히 그마저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연우는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고개를 높이 들어야만 했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하지만 잔뜩 흥분했기 때문인지, 도저히 이성적인 판단이 들지 않았다. 사고가 원활하게 돌아가질 않으니 자꾸만 짜증만 치밀어 올랐다.
바로 그때.
꿈틀-
연우는 가슴 한편, 심장 한쪽 구석에서부터 이질적인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마성!’
현재 자신은 마성과 합일을 이룬 상태.
그리고 그건…… 크로노스도 마찬가지였다.
접점이 생긴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마성이 움직인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노리고 한 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 그에게는 동기화에 재접속할 수 있는 루트가 생겼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연우는 모든 의념을 한데 모아 마성에게로 불어 넣었다.
쿠쿠쿠……!
그 순간, 의식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주 좋구나.
좋아…….
마성이 내뱉은 듯한 활자들이 머리 위로 맴돌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발되었던 재접속이 성공하였습니다!]
성공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연우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 * *
“……연우?”
크로노스는 어디선가 다른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주변을 홱 하고 둘러보았다.
물론,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연우는 분명히 지구에 있을 테니까.
‘환청인가……?’
하지만 단순한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했던 목소리.
그 때문일까.
‘어쩌면.’
크로노스는 여태껏 정우에게만 집중했던 예지의 각도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자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하면 다른 방법이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맹렬한 속도로 시간 신위를 빨리 감아, 정우가 죽은 뒤에 벌어질 미래들을 쭉 보았고.
그 과정에서 연우가 정우의 뒤를 쫓아 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연우가 여러 난관들을 거쳐, 자신의 본체에 다다르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들어와, 자신의 신화를 지켜보는 것까지도.
“위험하니 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누가 쌍둥이가 아니랄까 봐, 정말이지 둘 다 도통 말을 안 듣는구나.”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린 곳에.
“그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연우, 아니, 정확하게는 미래의 연우가 서 있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서 그런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