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자격 시험 (16)
『말도 안 되는……!』
마성은 의식 세계를 금방이라도 부술 것처럼 뒤흔드는 막강한 격의 향연에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비그리드 속에 있던 영웅 신화를 전부 포식했다고 생각해, 더 이상 필요 없다 싶어 버렸던 것인데.
설마 그것을 칠흑왕의 형틀과 연결해서 권능을 개방해 버릴 줄이야!
저런 방식은 그로서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기에 짜증이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크로노스가 정말 강림해 버린다면 위험해진다. 아무리 자신이 크로노스의 본체를 잠식하고 있는 중이라지만, 진짜 녀석의 자아가 나타난다면 빼앗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서 마성은 어떻게든 연우를 제지하고자 몸을 날리려 했지만.
콰콰콰콰-
비그리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풍이 얼마나 강렬한지, 균형을 제대로 잡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사이.
[소환에 실패하였습니다.]
연우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구는 비그리드와 그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보고 있었다.
크로노스의 소환을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아버지의 영혼도 동생처럼 칠흑으로 넘어가고 만 걸까? 그래서 부름에 응답할 수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재차 새로운 메시지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현재 비그리드의 정화가 완전히 이뤄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안쪽에 내장된 ‘태엽’이 망가져 작동하질 못해 원하는 대상을 소환할 수 없습니다.]
[현재 정화 진행률: 99.5%]
[남은 0.5%의 정화를 위한 방법을 빠르게 모색합니다.]
[내장된 ‘태엽’의 수리 및 복원에 대한 가능성을 검토합니다.]
……
[수리가 가능합니다.]
[수리를 통한 기능의 복원이 가능합니다.]
[수리 방법을 모색합니다.]
[‘태엽’의 성질이 죽음과 가까운 성향을 띠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권능, ‘하늘 날개’의 왼쪽 날개(죽음)와의 연동에 관해 가능성을 검토합니다.]
[가능합니다.]
[비그리드의 ‘태엽’과 하늘 날개의 왼쪽 날개가 서로 연동됩니다.]
[죽음의 신위가 연결되어 자동 복원이 이뤄집니다!]
[예상 복원 시간: 12분 41초]
다행히 크로노스의 영혼은 칠흑으로 전부 넘어가지 않고, 일부가 태엽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현재 회중시계는 아난타에게 넘겨주고 온 상태.
이 부름에 응답할 아버지도 사실 완전하지 않은 반쪽짜리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연우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한쪽이 든든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곳은 원래 그의 의식 세계였던 곳. 또한, 아버지의 본체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정말 이곳에 부를 수 있다면 마성을 함께 거꾸러뜨리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때까지 필요한 시간이 문제였다.
현재 연우에게 주어진 시간은 12분여.
그동안 마성 녀석과 싸워야 하고, 비그리드가 망가지지 않게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촉박한데.’
연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비그리드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평상시라면 녀석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한들, 그 정도쯤은 버틸 자신이 있었다. 아니, 승부를 내볼 만한 정도는 된다고 스스로 여기기도 했다.
다만, 현재 닥친 문제는 마성이 동기화를 통해 아버지의 본체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는 중이란 점이었으니.
과연 녀석이 아버지의 본체를, 정확하게는 모든 신화를 가로채는 게 빠를까?
아니면.
‘태엽’의 복구가 더 빨리 이뤄질까?
그 순간.
『정말이지, 끝까지 귀찮게도 구는구나!』
마성이 연우의 낯으로 잔뜩 인상을 일그러뜨리더니, 새롭게 흡수한 신화를 터뜨렸다. 그를 따라 칠흑이 뱅그르르 춤을 추다가, 마치 세포 분열을 하듯이 몸이 분 리되었다.
츠츠츠-
『안 된다면.』
『안 된다면.』
『안 된다면.』
어느새 세 명으로 늘어난 마성이 똑같이 말했다.
『꼼수라도 부리는 수밖에.』
『꼼수라도 부리는 수밖에.』
『꼼수라도 부리는 수밖에.』
팟! 파밧!
세 명의 마성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면서 맹렬한 격의 폭풍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했다.
그러다 셋은 다섯이 되고, 여덟이 되었다가, 열 명으로까지 분화되어 일제히 검뢰를 터뜨렸다.
콰르르릉, 콰콰쾅!
녀석들 사이로 뭔가가 반짝인다 싶더니, 격의 폭풍이 단숨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의식 세계가 위험할 정도로 뒤흔들릴 때, 검은 매연을 뚫고 한 놈이 나타나 검을 이쪽으로 휘둘렀다.
차아앙!
맑은 쇳소리가 울리고.
카카카캉!
연우가 비그리드에다 힘을 줘 강제로 밀어내면서 반격을 가하려는데, 이번에는 좌우에서 다른 마성들이 나타나 각각 옆구리를 갈라 왔다.
“무슨 아메바도 아니고, 이런 미친 것들이……!”
연우는 이렇게나 많아진 마성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해 오는 것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녀석이 잠식한 의식 세계라, 별의별 일들이 다 가능하다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마성의 본체 잠식 속도가 그 정도로 빠르다는 뜻이었고, 또한 그만큼 본체가 가진 신력과 신화가 엄청나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
쉭!
연우는 재빨리 아래쪽으로 몸을 떨어뜨리면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녀석 두 명이 차갑게 웃으면서 검을 교차시키고 있었다. 그 끝에는 검은 오러가 스파크처럼 지글거리고 있었다. 두 개의 검뢰가 잇달아 터져 나왔다.
이건 피하기 글렀다는 생각에 있는 힘껏 검뢰를 끌어 올려 두 번을 연달아 풀었다.
쿠르르릉-
콰쾅, 쾅!
비그리드에서 발출된 검뢰 줄기가 녀석들의 검뢰를 가르고 지나가는 한편.
팟!
연우는 빠르게 블링크를 발동, 방금 공격을 가했던 두 녀석의 후방을 점했다.
녀석들이 뒤늦게 연우의 동작을 읽고 몸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그보다 먼저 비그리드가 세 번째 검뢰를 터뜨리고 있었다. 8배의 출력을 자랑하는 삼극이었다.
그리고.
[듀렌달]
스걱-
비그리드는 아주 쉽게 한 녀석을 갈랐다. 사타구니에서부터 미간까지 쭉 길게 이어진 혈선을 따라 칠흑이 피처럼 솟구치다가 소멸했다.
닿는 것은 모두 갈라 버리는 듀렌달의 전승, ‘일도양단’이 함께 발현되었던 것이다.
[‘태엽’의 복원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정화가 진행 중입니다.]
[진명 ‘크로노스’의 완전한 개방까지 현재 75.4%가 남았습니다.]
[다른 진명들의 개방이 가능해집니다.]
진명 크로노스의 개방은 여태껏 비그리드가 보였던 진명 개방과는 의미가 여러모로 달랐다.
비그리드에 내재된 진명을 통해 전승을 끌어오던 이전 방식과 다르게, 이번에는 수많은 전승들을 ‘신화’라는 틀로 묶어 하나로 엮어 내려는 것이었다.
완전 개방(完全開放).
비그리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최초의 모습으로 환원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 과정에서 모든 종류의 전승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흡……!』
옆에 있던 다른 녀석은 검격에 노출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하늘 날개를 움직여 간격을 벌리고자 했지만.
촤르륵-
이미 연우는 그런 녀석의 생각 따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비그리드를 놓으면서 대신에 쇠사슬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곳곳에 뚫린 공허를 따라 검은 쇠사슬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그대로 녀석의 오른발을 칭칭 감았고.
[하르페]
어느새 낫으로 변한 비그리드가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날개와 목을 한꺼번에 갈라 버렸다.
『크아악!』
연우는 단숨에 다섯 동강이 난 채로 죽은 녀석을 보면서 다시 비그리드를 회수했다.
이렇게 둘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이곳에는 많은 놈들이 남아 있었다.
『강하구나. 역시……!』
『보면 볼수록 확실해졌어.』
『네놈은 더 이상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이대로 계속 뒀다가는.』
『내가 탈이 날 것 같거든.』
『그만큼 무르익었으면 이제 따 먹을 때가 된 거지.』
고개를 들었을 때.
연우는 검은 매연이 가신 자리로, 어느새 의식 세계를 빼곡하게 물들이다시피 한 마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이 분화를 한 건지, 숫자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00:09:12]
[00:09:11]
……
슬쩍 카운트를 보니 이제야 겨우 3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사이 연우가 해치운 건 고작 두 마리인 데 반해, 녀석은 벌써 이만큼이나 늘어났다?!
어쩐지 갈 길이 먼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 해 봐야겠지.”
연우는 하늘 날개를 있는 힘껏 펼치면서 다시 쇠사슬과 비그리드를 쥐었다.
마성이 크로노스의 신화를 삼키면서 점차 강해지고 있다지만.
그만큼이나 그도 비그리드가 방출하고 있던 크로노스의 신력을 아주 조금씩 뜻대로 다룰 수 있었으니까.
[엑스칼리버]
다시 한번 더 강풍이 불었다.
* * *
[게이 볼그]
힘차게 던진 비그리드가 빛살이 되어 여러 마리나 되는 마성들을 잇달아 격추시키고.
[아론다이트]
빛살은 검은 불길처럼 확 하고 일어나 격의 폭풍을 타고 다른 놈들을 잇달아 잿더미로 만들기도 했다.
촤륵, 촤르륵-
연우가 쇠사슬과 비그리드를 빠르게 돌릴수록, 싸움이 계속될수록 위력은 점차 커져 갔다.
아스칼론, 아마스, 헌원검, 바이던트, 스퀴테…….
여태껏 연우가 밝히지 못했던 진명들도 차례차례 속속들이 개방되면서 전승들이 점차 누적되고, 그럴수록 ‘태엽’의 복원도 빨라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연우는 비그리드와 점차 동화가 이뤄지는 기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의 태엽은 현재 왼쪽 날개와 연결되어 있는바. ‘태엽’ 안쪽에 있는 톱니바퀴들이 아주 미세하지만, 조금씩 움직여지는 게 느껴졌다.
이를 통해 새로운 동기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으니.
연우는 이 과정에서 크로노스가 지난 수만 년 동안 살았던 영웅으로서의 전승과 신화를 속속들이 체득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지구에서 쌓았던 경험들을 모두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비그리드를 다루는 데 있어 더 완벽해질 수밖에 없었고.
여태 모르고 있던 기능들을 속속들이 사용하면서 마성들을 더 빠르게 휘몰아칠 수 있었으니.
연우는 단숨에 몇 개나 되는 깨달음의 벽을 단숨에 뛰어넘으면서 마성들을 빠르게 압박했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합일이었다.
콰콰콰-
비그리드가 길게 횡으로 그어지자, 그 선상에 놓여 있던 마성들이 줄줄이 터져 나갔다.
『어째서!』
『대체 왜! 왜!』
『당해 낼 수가 없는 것이냐!』
반면에 마성들은 점차 초조해졌다.
분명히 크로노스의 본체를 잠식해 나가면서 빠른 속도로 자아를 완성하고 있다지만, 연우를 집어 삼키는 건 그리 쉽게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그리드가 뿌려 대는 격도 점차 강렬해지니, 결국 조바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 된다면.』
『억지로라도 매몰시킬 수밖에!』
마성은 이대로 있다간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우에게로 몸을 날렸다. 자그마치 수백 마리나 되는 녀석들이 죽음을 도외시했다.
연우를 완전히 파묻어 강제로라도 흡수를 하려는 속셈이었다.
까가가강!
이렇게나 숫자가 많아서야, 연우로서도 아무리 녀석들을 베어 낸다고 한들,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몇 마리의 마성들이 폭발을 뚫고 연우의 손발에 매달리는 데 성공했다.
검뢰가 수도 없이 튀어 올랐다. 연우의 팔다리도 몇 번씩이나 찢겨 나갔다가, 재생 스킬을 통해 복구되기를 여러 차례.
그러다.
[00:00:02]
[00:00:01]
[00:00:00]
[‘태엽’의 모든 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복원을 성공하였습니다!]
[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
[완전한 개방이 이뤄집니다!]
콰콰콰-
여태껏 발산되었던 모든 격의 폭풍이 한데 모이면서 칠흑이 되었다가, 도로 맹렬한 속도로 비그리드 쪽으로 빨려 들어왔다.
『이런!』
『아, 안 돼……!』
“너네들 어쩌면 좋냐.”
연우는 마성에 둘러싸인 채로 차갑게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우리 아버지가 좀 많이 센데 말이야.”
[사자 소환이 시작됩니다.]
파직, 파지직-
여태껏 방출된 모든 격을 삼킨 비그리드를 따라 검은 스파크가 튀어 오르더니.
쩌거걱!
검신을 따라 균열이 잔뜩 퍼져 나갔다.
그리고.
[무소속의 신, ‘크로노스’가 강림합니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비그리드가 폭발했다. 하지만 파편들은 다른 곳으로 튀지 않고, 회오리치는 칠흑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새로운 형태로 결합되었으니.
찰칵.
찰칵.
파편 조각들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검의 형체가 아닌,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연우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는 얼굴.
주름이 살짝 졌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가 조용히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담은 것은 바로 연우였다.
“아버지.”
연우가 그를 보면서 말했다.
“이것들이 저 때렸어요. 좀 혼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