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76화 (24권) (576/862)

24권

1화. 부자지간 (1)

분명히 말의 내용은 못된 친구에게 맞고 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르는 것 같은 말인데.

어쩐지 어투는 국어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마치 기계음처럼 딱딱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크로노스는 뭔가 즐거웠다.

“이런! 다친 곳은 없고? 하여간 너는 너무 허약해서 탈이구나.”

그래서 자기도 불쑥 장난을 친 건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아내의 병이 전부 낫고 나면 해 보고 싶었던 부자지간의 장난.

문제가 있다면 ‘허약하다’는 말이 많이 자극적이었던지, 연우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는 정도?

“허약…… 하다고요?”

“음? 아무래도 내가 아픈 곳을 찔렀나 보구나. 근데 틀린 말도 아니잖느냐. 멍청하게 저런 놈들한테 맞고나 다니는데. 나는 그렇게 너를 키운 적이 없단다, 얘야.”

“……애당초 아버지가 절 키우지는 않았습니다만?”

“부부 일심동체이니, 레아가 키운 게 곧 내가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지.”

“…….”

연우는 한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사자 소환을 그냥 취소해 버릴까 하는 생각.

사실 그가 바랐던 아버지와의 해후는 이런 게 아니었다. 같이 손을 잡고 마성을 잡은 뒤, 못 다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었는데…… 정작 돌아오는 건 이런 타박과 핀잔이라니!

하지만 크로노스는 울컥하고 치밀어오르는 분기를 꾹 누르는 아들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연우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뭐가 웃긴 겁니까?”

“아니. 그냥. 전부 다 재미있어서.”

크로노스는 언제나 딱딱한 모습만 보이던 연우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니, 도저히 입가에서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너무 즐겁기만 했다.

그런 모습이 연우로서는 더 짜증 나기만 했지만.

망할 아버지 같으니. 역시 아버지와 자신은 도저히 합이 잘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가 잔뜩 갈렸다.

“하여간.”

크로노스는 그렇게 한참 동안 웃어 대다가, 검지로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훔쳐 내면서 씩 웃었다.

이제야 훤칠하게 자란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아주 반갑구나, 아들아.”

“예. 퍽이나 반갑습니다. 이딴 식으로 아버지가 나설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연우는 여전히 쀼루퉁한 모습을 하면서도, 곁눈질로 그를 훔쳐봤다. 인자하게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피식.

저도 모르게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게 말이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지구가 좋을 것 같았는데.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 전혀 생각도 못 했어. 어디 보자…… 햇수로 얼마 만이지?”

“전 방금 전이었습니다만.”

“그렇군. 너의 시간대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겠어. 나도 사실 따지자면 그리 많은 기억이 있는 건 아니다만…….”

크로노스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다시 가볍게 웃었다.

연우는 그가 왜 그러나 싶어 다시 돌아봤다가, 아버지의 눈동자가 이쪽을 보면서도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그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크로노스가 ‘태엽’을 쪼개어 눈을 감았다고 하더라도, 따지자면 비그리드도 엄연히 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비그리드로서 축적된 경험들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아를 되찾은 지금, 그때를 떠올리는 것이겠지.

그래서 연우는 더더욱 묘한 기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곁에서, 자신을 지켜 주며 바라보고 있었을 아버지의 시선 속에 담겼던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어린아이가 위험하게 뛰어노는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았을까. 부모님의 눈에 자식들은 언제나 아이로만 보인다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꽉 죄는 기분이 들었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익숙한. 그렇기에 더더욱 놓치고 싶지 않은 기분.

그렇게 연우와 크로노스가 막간의 해후를 즐기는데.

『내가 앞에……!』

『이것들이 감히 장난을 쳐?』

『아비고 아들이고 간에 마음에 드는 것들이 하나도 없구나!』

마성들은 여태 자신들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이를 바득 갈았다. 예상치도 못한 크로노스의 강림으로 잠시 얼이 빠져 있었지만.

다시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친 것이다.

“이런 아직도 거기 있었나?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으니. 쯧!”

크로노스는 아들과의 좋은 시간을 망치는 그런 녀석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봤지만.

“뭐, 그래도. 못난 아들 녀석이라고 해도, 맞고 왔다는데. 아버지가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크로노스는 그 말과 함께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 순간.

쿠쿠쿠쿠……!

의식 세계가 다른 방향으로 요동쳤다.

연우는 어쩐지 마성이 그랬을 때는 위압감을 느낀 데 반해, 지금은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따스한 무언가가 자신을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반면에 마성은 정반대였던지, 하나같이 굳은 얼굴을 하면서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아마도 크로노스의 본체를 잠식하려던 술수가, 자아가 도로 나타나 방해를 받아서 그런 것이겠지.

본체는 확실히 크로노스에 반응하고 있었다.

화아아-

여태껏 의식 세계를 뒤덮을 것 같이 굴던 마성의 칠흑이, 언제부턴가 뒤쪽에서 나타난 크로노스의 칠흑에 밀려나고 있었으니.

마성의 것이 혼탁하고 끈적끈적해서 수렁 같은 느낌이 든다면 크로노스의 것은 마치 밤하늘의 색채를 옮겨 담은 것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같은 칠흑인데도 불구하고 느낌이 너무 상반되어 구분하기 쉬웠다.

까마득한 세월을 지나 다시 되돌아온 ‘태엽’.

비록 아직까지 반쪽짜리에 불과했지만, 그것만 해도 깊은 잠에 든 본체를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크로노스는 본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마성 역시 한때 그의 의식 일부를 이뤘던 것이 아닌가. 그만큼 본체에 대해 지분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반쪽짜리 ‘태엽’만으로 주 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기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마성 녀석이 주체가 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고 한들, 주인이 여기에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칠흑의 반편이 따위가, 시종에 불과한 것이 왕의 것을 탐하였단 말이지? 그것이 얼마나 중죄인지를 모르진 않겠지?”

그렇기에 크로노스는 오만한 낯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었고, 그를 따라 흐르는 격의 폭풍은 다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지금 이 순간, 크로노스는 망나니라고 불렸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다.

안하무인에 오만불손. 자신의 눈에 차지 않는 것들은 전부 눈 아래로 보는 눈빛이 강렬하게 마성들을 꿰뚫었다.

한편.

시종이란 단어에 마성들의 얼굴이 일제히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여태 크로노스가 자신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알게 되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은 여태 자신을 편리한 도구처럼 여겼단 뜻이 아닌가.

여기에 마성들이 다 같이 입을 모아 뭐라고 반발하려는데.

『가……!』

“시끄러워. 너무. 그러니까.”

스륵!

별안간 크로노스가 칠흑을 손날에 가득 두르더니.

“그 주둥이부터 좀 다물자.”

가볍게 허공에다 비스듬하게 그었다.

공간을 따라 기다란 단층이 마성들 사이로 쭉 그어졌다.

그리고.

퍼퍼퍼펑-

곧 어마어마한 연쇄 폭발이 도미노처럼 일어나면서 선상에 놓인 마성들을 모조리 터뜨리기 시작했다.

마성들은 하나같이 괴성을 질러 댔다. 손발이 잘려 나가는 정도라면 모를까, 아주 자그마한 생채기만 생겨도 거기서부터 폭발이 일어나 그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크로노스가 죽음의 태엽을 맹렬하게 돌리면서 증폭시킨 신력을 마성들에게 강제로 쑤셔 넣고, 마치 독처럼 신위를 퍼뜨려 존재를 그 속으로 강제로 밀어 넣는 것이다.

‘신위를 저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나? 저건 신위의 한계가 아니야.’

연우는 그런 크로노스의 싸움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크로노스가 싸우는 방식은 여태껏 자신이나 다른 신격들이 보이던 것과 방식이 비슷하면서도, 사뭇 달랐다.

보통 신격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능이나 신력으로 상대를 폭압적으로 찍어 누르는 경우가 많았다. 신위에서 파생된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이것을 뒤집어 신위를 무기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자칫 신위가 망가질 우려가 컸지만, 그는 절대 그럴 일 없다는 듯 신위를 외부로 팽창시켜 그 안쪽으로 적들을 집어삼키려 했으니.

이미 크로노스는 그 자체만으로도 ‘검’이라 할 수 있었다. 비그리드. 전장을 뜻하는 그 이명(裏名)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는 진명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개념…… 죽음이라는 개념 속으로 마성들을 모조리 밀어 넣고 있다.’

격을 회복한 아버지는 이렇게나 강한 존재구나. 연우는 크로노스를 보는 내내 감탄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눈이 새롭게 열리는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디딘 경지는 스승님과도 많이 달랐다.

스승님은 일신의 무(武)로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지만, 아버지는 진정한 신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자신이 여태 쌓고 있던 죽음과 투쟁의 신화를 어떻게 더 이어 나가야 할지 새로운 길을 제시받는 기분이었고.

크로노스는 그런 선망 어린 아들의 시선을 받고 흥이 돋았던지, 피식 웃으면서 더 빠르게 손날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댔다.

콰콰콰쾅!

잘린 마성의 목과 사지가 허공에 마구잡이로 튀어 오르다 폭발하길 여러 차례.

『감히! 감히……!』

마성은 더 이상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고 여겼는지, 분화했던 칠흑의 기운을 전부 하나로 끌어모아 거대화를 이뤘다.

의식 세계를 전부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몸집. 정말 밖에 있던 크로노스의 본체가 나타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높은 크기라, 단순히 발산하는 격의 폭풍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녀석이 손을 아래로 내려치자, 돌풍과 함께 불화살이나 얼음 우박 같은 자연재해가 맹렬하게 쏟아졌다.

이번에는 만만치 않겠다고 여겼는지, 크로노스는 칠흑의 기운을 손날이 아닌 손바닥으로 끌어모으면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결계가 잇달아 세워지면서 모든 재해들을 튕겨 내고.

팟!

동시에 공간을 열어젖히면서 자리를 급속도로 이동, 마성의 왼쪽 어깨 위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허공에다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스퀴테.”

파앗!

그의 손에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 낫이 잡혔다. 비그리드의 변형체인 하르페와 닮았으되, 그보다 훨씬 큰 크기를 자랑하는 무기.

크로노스가 신왕이었던 시절, 쓰러진 대지모신의 배꼽에 맺힌 ‘원한의 샘’에서 직접 뽑아 올린 결정(結晶)을 가다듬어 탄생시킨 애병(愛兵)이었다.

한때,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의 상징물이, 올림포스의 왕을 상징하던 대신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진짜 스퀴테는 제우스가 왕좌를 찬탈한 이후에 직접 망가뜨려 찾을 수 없었지만.

이곳은 그의 의식 세계이니, 얼마든지 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랜만이구나.”

지이이잉!

스퀴테는 크로노스의 말에 호응하듯이 몸을 크게 떨었다.

크로노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이 감촉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스퀴테는 원래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비그리드의 원형이기도 했다.

비록 진짜 스퀴테가 가진 능력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스퀴테는 오로지 그를 위해서 만들어진 무기였다. 시간과 죽음의 신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공능을 담은 무기.

생명체라면 필멸자와 초월자를 불면하고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바. 스퀴테는 바로 그런 ‘시간’을 직접 베어 ‘죽음’으로 인도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사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위력이었고.

『너, 너……!』

스퀴테를 알아 본 마성이 뭐라고 소리를 치려 했지만.

“뭐라고? 신도 되지 못한 찐따가 하는 말이라서 그런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크로노스는 냉소를 흘리면서 그보다 먼저 스퀴테를 아래로 내리쳤다.

촤아아악!

『크아아악!』

스퀴테는 마성의 왼팔을 무참하게 훑고 지나갔다. 말끔하게 잘린 단면을 따라 혼탁한 칠흑이 핏물처럼 튀어 올랐다.

쿠우우웅!

마성은 괴성을 지르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커다란 덩치가 꿈틀거리자, 의식 세계가 요동칠 정도였다.

웬만한 통증 따위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였지만, 스퀴테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왼팔을 복구하려 해도, 칠흑이 그쪽으로 흐르질 않았으니까.

스퀴테가 남긴 죽음의 잔념이 회복을 죽이고 만 것이다.

연우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역시 한 번에는 안 되는군.”

크로노스는 그런 이적을 실현하고도, 별다르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전성기 시절이라면 이 한 방에 마성의 모가지까지 같이 따 버렸을 텐데. 아무래도 지금은 시간의 태엽을 갖고 있지 못해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그래도 아무래도 상관없나? 죽을 때까지 베어 버리면 그만이니.”

크로노스는 차갑게 웃으면서 마성의 어깨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곧 검은 바람이 되어 마성의 거체를 마구잡이로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무쌍 난무(無雙亂舞)〉

지구에서 수없이 많은 영웅의 생을 살면서 터득한 그만의 새로운 권능이었다.

쉬쉬쉭-

촤악, 촤아악-

촤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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