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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랭커-580화 (580/862)

5화. 부자지간 (5)

지난 수만 년 동안 타르타로스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산맥이 되었던 크로노스의 사체가 잘게 부서지는 광경은.

그동안 이곳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에게 아주 큰 충격을 선사할 수밖에 없었었다.

특히 올림포스 소속이었던 아테나와 아레스, 그리고 헤라클레스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어 그쪽으로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사체가 부서진 자리에는 검은 입자들이 안개를 이루었고.

촤르륵!

마치 풀숲을 헤치는 뱀처럼, 그 사이로 쇠사슬에 매달린 비그리드가 재빠르게 튀어나오면서 아테나 앞에서 멈췄다.

비그리드는 아테나가 알고 있던 것과 모양이 많이 달랐다. 검은색 빛무리에 휩싸여 있어,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낫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듯한 모양새.

챙강!

아테나를 노리려던 뿌리가 단번에 튕겨 났다.

그동안 여기 있는 신과 악마들이 아무리 많은 권능들을 퍼부어도, 흠집 하나 나지 않고 모조리 흡수하기만 하던 뿌리가 처음으로.

그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튕겨 났던 비그리드가 다시 도중에 방향을 꺾더니 단번에 뿌리를 그대로 절삭해 버리는 게 아닌가!

비그리드는 매서운 칼바람을 일으키면서 득달같이 페르세포네에게 달려들었다.

지면에 박혀 있던 다른 뿌리들이 일제히 일어나, 페르세포네를 보호하기 위해 몇 겹이나 되는 벽을 세웠지만.

스걱-

비그리드는 마치 종이를 자르듯이 너무 쉽게 벽을 가르고 지나가 페르세포네에 다다르고 말았다.

페르세포네는 다행히 피부 위로 단단한 나무껍질을 뽑아내어 비그리드를 튕겨 낼 수 있었지만, 팔뚝이 한 움큼 깊게 파이면서 핏물이 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어…… 떻게?”

페르세포네는 현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크로노스의 사체가 갑자기 사라진 것만 해도 말도 안 되는 것인데, 대지모신의 가호까지 이렇게 상처를 입힌다고?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던 괴사였기에 경악이 스치는 가운데.

촤르륵!

녀석이 그러거나 말거나, 비그리드는 쇠사슬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느새 아테나의 앞에 선 연우에게로.

“괜찮으십니까?”

“너……?”

아테나는 저번처럼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말고, 도중에 자기도 모르게 그치고 말았다. 어쩐지 말을 놓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확 들었던 것이다.

어째서인지, 도저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연우를 따라 무언가가 달라진 듯한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었다. 기질(氣質)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존재가 아주 크게 성장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분명히 연우라는 껍질은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 든 내용물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것만 같았다.

측정할 수도 없을 만큼 아주 거대한 무언가를, 아주 작게 압축시킬 대로 압축시켜서 연우라는 껍질 안에다 욱여넣은 듯한 모습.

그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격하게 떨리던 크로노스의 사체를 한없이 줄여 놓는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껍질은 작을지언정, 존재감은 이미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아니, 타르타로스 전체를 채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테나는 눈앞에 있는 연우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음. 이 아이가 내 손녀란 말이지? 이렇게 보게 되니 조금 낯간지러운데? 아직 한국 나이로는 마흔 살을 겨우 넘었을 뿐인데, 손녀라니…… 허, 참.』

그런 멍한 시선을 한 아테나를 보면서, 비그리드가 잘게 떨렸다.

크로노스는 연우와 함께 현실 세상으로 나오면서 형체가 다시 검형(劍形)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나오기 직전에 연우가 그에게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가신다면 아마 아버지의 손자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세샤는 미래 예지로 본 적이 있지만…… 너도 그새 사고라도 쳤어?

-제가 정우와 같습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아버지가 타르타로스에 처박히고, 꽤나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올림포스가 오죽 바뀌었겠습니까.

-…….

당시에 크로노스는 연우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라고 해서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올림포스도 바뀌었을 테니까. 신격들에게 시간의 관념이 많이 부족해 굼뜬 면이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편이었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굳이 신레아에게도 올림포스의 상황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대략적인 변화는 들었지만, 세세한 내용들은 듣지 않았던 것이다.

괜히 들으면 마음만 아플 것 같아서였다.

자신이 버리다시피 한 자식들이 있는 곳.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떡 하니 손주들을 마주하게 되니, 마음이 저절로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그리드의 형태로 되돌아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차마 본 모습을 비칠 엄두도 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제법 의젓하게 자란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파탄이 나다시피 한 올림포스의 현 상황을 알고,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졌다.

자식들의 타천.

티탄과 기가스의 싸움.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자신이 뿌리고 갔던 씨앗들이 만들어 낸 광경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다시 타르타로스로 돌아온 지금, 크로노스는 여태 외면하기만 하던 시선을 다시 이쪽으로 되돌려 놓고자 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싶었다.

연우에게 이미 대략적인 정황은 들었지만,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면서 직접 판단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러다 크로노스는 도중에 궁금한 점이 생기고 말았다.

『제우스의 딸이라면 너에게는 조카나 마찬가지일 텐데, 웬 존대야? 순서가 바뀐 거 아니니?』

연우와 아테나의 관계를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질문.

연우도 순간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촌수만 따진다면 자신은 아테나의 삼촌뻘이었으니까. 비록 나이야 아테나 쪽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촌수 정리는 우선 여기 급한 불부터 끄고 하도록 하죠.’

『그래. 뭐, 그래야겠지.』

연우는 비그리드를 고쳐 쥐면서 아테나에게 말했다.

“‘태엽’은 모두 찾았습니다.”

아테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 그럼……?”

“크로노스의 신화는 전부 제가 가져왔으니, 더 이상 신력 채취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이놈 보소. 이제는 막 대놓고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대네?』

연우는 크로노스가 꿍얼대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반면에 아테나는 기쁜 얼굴이 되었다. 크로노스의 신화를 취했다는 것. 그 말은 연우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

연우는 어느새 상공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나타태자와 이랑진군, 아가레스 등의 시선을 등지고 페르세포네 쪽을 주시했다.

물론, 그에게 고정된 시선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동맹군, ‘니플헤임’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동맹군, ‘천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동맹군, ‘동마왕군’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연합군, ‘올림포스’가 당신을 경계합니다.]

……

[중립, ‘데바’가 당신을 두려운 눈길로 바라봅니다.]

……

[신의 사회, ‘말라흐’가 고민에 잠깁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숙고에 잠깁니다.]

[비마질다라가 어서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당신이 오기를 강하게 갈망합니다. 자신의 애타는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역시 당신밖에 없노라고 소리칩니다.]

[케르눈노스가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천계가 동요합니다.]

[98층의 모든 존재들이 당신을 살핍니다.]

가뜩이나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천계는 이제 절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세포네를 상대하느라 천계와 연락이 거의 되지 않는 아테나 등과 다르게, 저들은 연우의 상태를 이미 눈치챘던 것이다.

그리고 여태 숨겨져 있던 그의 비밀까지도.

비록 격을 상실한 반쪽짜리라 할지라도, 크로노스가 깨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파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니.

그리고.

페르세포네도 연우에게서 무언가를 감지했던지, 좀처럼 쉽게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저 아이가 내 며느리란 말이지?』

크로노스는 맏아들인 하데스의 목숨을 앗아 간 며느리를 보는 내내 말투에 가시가 잔뜩 돋았다.

‘아버지의 손녀이기도 하죠.’

『음? 그게 무슨 소리냐. 며느리라면서? 그런데 왜 손녀야?』

‘데메테르의 딸이기도 하니까요.’

『……그게 대체 무슨 개족보니?』

데메테르는 크로노스와 신레아 사이에 태어난 둘째 딸.

당연히 목소리가 살짝 멍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올림포스 신화가 그럽니다.’

『니미. 대체 내가 못 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크로노스는 혼란에 젖은 목소리가 되었다.

사실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근친 상혼을 하는 케이스는 지구에서도 숱하게 많았으니까. 고대 이집트의 왕가, 합스부르크의 가문, 심지어 신라나 고려의 역사까지도.

더군다나 신격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아주 강한바.

혈육의 정이 강한 필멸자들의 기준에서 생각하면 절대 안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작 자신의 자식들이 그렇게 했다고 하니, 크로노스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우라노스조차도 밑에 들인 자식들이 전부 양자와 양녀들이었는데 말이다.

설마 이것도 자신이 뿌린 업보가 낳은 결과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크로노스의 사후, 올림포스는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여러 사회들의 숱한 견제를 받아야만 했으니까. 흐트러지려는 전력을 추스르기 위해서도 내부를 공고히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음?』

크로노스는 페르세포네를 착잡한 눈길로 살피다 말고, 무언가 의문점을 드러냈다.

『아들아. 저 아이, 정말 내 손녀가 맞는 거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대지모신의 사도이니 뭔가를 느꼈을 수도…….’

『아니. 대지모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아이, 데메테르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만. 절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기본 바탕은 데메테르의 신력으로 두되, 그 외에 다른 것들이 복잡하게 얽혔어.』

‘그게, 무슨?’

『클론(Clone)이구나. 그것도 인자들을 조작한.』

크로노스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 신격을 인위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거였나?』

‘……!’

『데메테르의 인자를 기초로 해서, 각종 초월자들의 인자 중에서도 뛰어난 것들만 선별해 만든, 인형이다. 저건.』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연우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내 짝퉁인데?』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홱 하고 비그리드를 돌아봤다.

『저런 것을 내 손녀라고 두다니. 내가 없는 동안 다들 미쳐 돌아가고 있었구나?』

크로노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면서도, 냉소를 지우지 않았다.

연우는 어쩐지 재회한 이후로 아버지의 차가운 모습을 처음으로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이런 모습이 신왕이었던 시절의 아버지와 가장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예전에 얼핏 보았던 데메테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딸인 페르세포네를 가련하게 보면서도, 섣불리 달래지 못하던 모습을.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그렇게 되었군요. 크로노스라. 결국 크로노스에 대한 계승은 당신에게로 이어지고 말았나요?”

페르세포네가 하늘을 슬쩍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대지모신과 통신을 마친 모양이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동자 위로, 아주 잠깐 착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크로노스의 신력을 더 이상 취할 수 없는 이상, 더 크게 부딪쳐 봐야 좋을 건 없으니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누구 맘대로?”

“당연히 제 맘대로죠.”

촤르륵-

페르세포네는 담담하게 대답하면서 뿌리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포탈을 활짝 열었다. 일신상의 후퇴.

하지만 연우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쇠사슬을 빠르게 움직였다. 비그리드가 빛살이 되어 공간을 가르는 순간.

촤아아악 -

푸화악!

페르세포네의 잘린 오른팔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것과 동시에, 대지모신의 신력으로 만들어진 포탈이 그녀를 완전히 삼키고 사라졌다.

바로 눈앞에서 놓치고 만 것이지만.

연우는 별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녀석을 놓친 건, 고의였으니까.

『깽판이라도 치려고?』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오는 건 맘대로라도, 나가는 건 아니란 걸 보여 줘야죠.”

연우는 녀석이 남긴 흔적을 쫓아, 비그리드를 휘둘러 공허를 활짝 열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깽판을 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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