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부자지간 (6)
‘어째서……?’
페르세포네는 명왕의 신전으로 되돌아온 후, 자신의 잘려 나간 오른팔을 보면서 인상을 팍 찡그렸다.
자신의 몸은 현재 세계수와 연결되어 있다. 모시는 신, 대지모신의 세계수로의 침식(侵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계수는 세상 모든 우주와 차원을 관통하며, 세상의 이면에 위치한 이데아(Idea)를 속세로 끌어 내는 역할을 맡는다. 모든 생명들이 내재하고 있는 시스템, 윤회전생을 책임지는 중심이기도 하다.
즉, 죽음에서 생명을 잉태하기 때문에, 그 무한한 생명력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력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봄’과 ‘씨앗’이라는 신위를 가지고 있던 페르세포네가 대지모신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던 것도.
일개 신격에서 이제는 주신격에 맞먹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세계수와의 접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신력을 아무리 많이 소진했다고 해도 그새 보충이 되었어야 하고, 잘려 나간 다리가 있으면 금방 재생이 되어야 할 텐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린 부위에 남은 이질적인 기운이 체내로 들어오려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신력을 사용해 억지로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지만, 이 이질적인 기운은 그런 신력마저 조금씩 잠식하면서 천천히 영혼을 옥죄려는 중이었다.
문제는 이 기운의 성질 페르세포네로서도 친숙하단 점이었다.
‘이건 분명히……!’
그녀의 생각이 이어지던 그때였다.
『‘죽음’이로구나.』
“어, 어머니.”
페르세포네는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허리를 쭈뼛 세웠다.
어머니, 대지모신.
그녀는 예전과 달리 어느새 언어를 정확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그동안 방만하게 펼쳐지던 수많은 의사들이, 이제 점차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는 뜻. 드디어 자아가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지니.
“‘침식’이 끝나셨습니까……?”
대지모신은 현재 세계수 침투에 집중하느라, 다른 곳의 상황에 도저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티탄이 반란을 일으켰어도 곧바로 진압에 나서지 못했던 이유였다.
『그럴 리가.』
하지만 대지모신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고, 뾰족한 어투였다.
『아직 반의반도 해내지 못했느니라.』
“하면 어찌하여……?”
『네놈들이 오죽 못났으면 이러겠느냐!』
채널링 너머로 전해지는 짙은 분노에 페르세포네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티탄,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이 난리를 치도록 내버려 두질 않나, 겨우 하나로 엮어 뒀던 천계가 다시 갈라지게 하질 않나. 이전에 엘로힘을 송두리째 날릴 때도 그리하더니, 이제는 크로노스까지 빼앗기고 말았지. 대체 일을 어찌 처리하려는 것이야! 타르타로스는 어떻게든 우리 손에 있어야 한다던 그 말을, 그새 잊은 것이냐?』
“…….”
페르세포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지모신의 말마따나 그동안 이룬 수고들이 전부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특히 크로노스의 사체를 저쪽에다 빼앗기게 된 것이 가장 뼈아픈 실책이었다.
잃어버린 신격을 회복하고, 올림포스를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크로노스의 신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그들에게는 무한한 자원의 보고와도 같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으니.
비록 대지모신이 세계수라는 새로운 자원 보고를 손에 넣는 중이라지만, 침식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지모신조차도. 아니, 침식에 사용하는 신력 중 상당수가 크로노스의 신력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마저도 속도가 많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망자 거인까지 손에 넣게 된 연우를, 그리고 다른 동맹군까지 상대하라고?
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페르세포네가 가장 우려하는 점은 따로 있었다.
연우가 크로노스의 아들이라는 것.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닌, 레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였다.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와 같은 친형제.
그러면서도 반란에는 참여하지 않은 크로노스의 진짜 후예.
‘티탄은 자신들의 왕인 크로노스를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이 크로노스의 의지를 계승하겠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어. 거기다 에레보스로 가는 문까지 손에 넣게 된다면.’
페르세포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그때는 전부, 모든 게 파멸이 되고 말아.’
포세이돈 등까지 연우에게 가담하게 된다는 뜻일 테니!
제우스가 천마증으로 깊은 잠에 든 이때.
올림포스 내에는 아직까지 기가스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순순히 따르는 이유는 대지모신이 두려워서이지 다른 게 아니다. 결국 그들을 진심으로 반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티탄과 기존 올림포스의 대신격들을 통합한 존재가 나타난다?
그 뒤는…… 불 보듯 뻔했다.
명분에서도, 혈통에서도. 심지어 다른 사회들의 지지도 면에서도 연우를 꺾을 수는 없었다.
처음 연우가 크로노스의 적자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에는, 연우가 바로 눈앞에 있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지만.
당시에 등골이 서늘해지던 그 느낌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77층에 올포원이 있어서 연우의 탈각과 초월을 막아 주고 있다는 것이지만.
글쎄?
그것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는지.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은 올포원이라지만.
여태껏 페르세포네가 관찰해 왔던 연우는 언젠가 그런 장애물도 넘어설 것만 같았다.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그건, 대지모신도 마찬가지일 테지.
『아니.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크로노스와 ###, 그 모든 것들이 원래는 내 것이었으니. 칠흑, 칠흑! 그것들이 하나로 섞여 있으니, 이제 번거롭게 하지 않고 단번에 가질 수도 있겠지.』
히스테리로 가득하던 대지모신의 목소리는 어느새 잔잔하게 변해 있었다. 마치 잠든 아기를 껴안은 어머니처럼, 자상하고 따스한 목소리.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어째서인지 그런 대지모신의 태도 변화가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이 어미의 부탁을, 실패해서는 아니 되겠지? 이번에는 부디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페르세포네는 머리를 살짝 숙였다.
“……예. 어머니.”
지금 저 말을 하는 작자도 진짜 대지모신이 아닌, 대지모신인 ‘척’하는 비에라 듄의 의지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그녀는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도저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과 권위는 애당초 그녀에게서 나오는 것이었으니까.
막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면 막아야만 한다.
삼키라고 한다면 삼켜야 한다.
그것이 페르세포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이었다.
자유를 갖기 위해 여기까지 올랐다지만.
어쩐지 하데스의 아내로 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은 왜 드는 걸까?
페르세포네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가볍게 짚었다. 타르타로스에 내려온 여러 기가스들의 페어링이 느껴졌다.
“지금부터 티탄을 쫓는 모든 추격을 중단하고, 감히 내 성역을 어지럽히려는 벌레들을 박멸토록 한다.”
『여왕님의 명을 따릅니다.』
『여왕님의 명을 따릅니다.』
벌레. 연우 일당을 이르는 말이었다.
거부 따윈 없었다. 이미 주인을 잃은 티탄 따윈 언제든지 치울 수 있는 먼지에 지나지 않았으니. 가장 골치 아픈 작자들부터 정리하려는 것이다. 페르세포네의 명령은 죽은 티폰보다도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
『여, 여왕님! 큰일 났습니다!』
명왕 신전의 중추를 담당하던 기가스로부터 다급한 전언이 날아왔다.
“무슨 일이냐?”
『저, 적이 쳐들어왔…… 으아악!』
전언은 이어지다 말고 도중에 끊어졌다.
페르세포네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신전 내에 있는 다른 기가스들에게로 연결된 페어링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 이곳 신전은 분명 여러 결계들로 보호되고 있을 텐데, 어떻게 공격을 받는 것이야?”
페르세포네도 연우를 피해 달아나던 당시, 그가 흔적을 따라 뒤쫓아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명왕의 신전을 보호하고 있는 여러 결계 때문이었으니.
명왕의 신전 주인이 잠깐 테이아로 바뀌었던 건, 어디까지나 티폰이 결계 내부에서 갑작스레 기습을 펼쳤기 때문이었을 뿐.
외부에서의 유입은 아주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성역의 중추가 되는 대신전은 그만큼 단단한 가호를 받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현재 다시 페르세포네의 성역이 되고, 대지모신의 신력까지 더해진 결계를 부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일 텐데……!
하지만 페르세포네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쿠쿠쿠쿠……!
명왕의 신전 전체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성역, ‘명왕의 신전’이 동맹군으로부터 공격받고 있습니다!]
“……!”
페르세포네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플레이어 ###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
페르세포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죽음의 태엽이 작동합니다.]
[결계, ‘대지모신의 가호’에 죽음이 이식되었습니다!]
[결계, ‘봄의 찬란한 영광’에 죽음이 이식되었습니다!]
……
[모든 결계가 죽음에 의해 무력화되었습니다.]
[결계가 부서졌습니다!]
[페르세포네의 성역, ‘명왕의 신전’에 입장하였습니다.]
공허를 열고 들어선 연우를 가로막은 것은 명왕의 신전을 반구 모양으로 뒤덮고 있던 수십 겹의 결계들이었지만.
연우는 별 무리 없이 비그리드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쉽게 결계들을 부숴 버렸다.
죽음의 태엽이 영향을 미치는 건 비단 생명체만이 아니다.
무생물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어떤 물질이든지 ‘수명’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고, 죽음의 태엽은 바로 이런 수명을 가속화시켜 붕괴에 이르게 만드니.
제아무리 페르세포네와 대지모신이 심혈을 기울여 결계를 설치한다고 한들, 죽음의 태엽을 비껴 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계가 모조리 분쇄되면서 드러난 광경은.
연우에게도 아주 낯이 익은 장소들이었다.
그가 하데스의 밑에 있을 때 머물던 터전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하데스의 대신전답게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던 신전들은 여러 번의 전투 끝에 많이 망가져 있었다.
『비록 터만 남은 곳이 많지만, 그래도 제법 거대하구나. 소싯적에는 아주 경건하고, 아름다웠겠어.』
크로노스는 아래를 슬쩍 보면서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막내인 연우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퇴장한 하데스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그런 크로노스의 감정선은 잠시.
『겨, 결계가 무너졌다!』
『###이다! 막아! 어서!』
티탄과의 전쟁을 마치고, 겨우 명왕의 신전을 수복하여 한숨을 돌리려던 기가스가 뒤늦게 연우를 발견하고 갖가지 권능을 뿌려 댔던 것이다.
“아버지.”
『오냐!』
연우가 비그리드를 거칠게 흔들자, 검은 쇠사슬이 빠르게 돌아가면서 이쪽으로 쏟아지던 수많은 권능들을 허공에서 격추시켰다. 퍼버벙,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폭발이 폭죽처럼 터지는 가운데.
촤르르륵-
비그리드는 공허를 관통하면서 신전 내 밑바닥에서 등장, 그리고 지면을 타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검은 빛살이 곳곳에서 터지면서 삽시간에 발목을 잃은 기가스들이 쓰러지면서 비명을 질러 댔다.
『아아악! 아악! 내 발목! 내 발모오옥……!』
『대, 대체 어디서! 크아악!』
『제, 젠장!』
비그리드는 마치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먹이를 향해 움직이는 뱀처럼, 순식간에 성역을 따라 쇠사슬을 길게 남기면서 기가스들을 일제히 도륙했다.
기가스들은 땅에 있어 봤자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허공으로 튀어 올랐지만.
“일어나라.”
연우의 시동어에 따라, 성역 곳곳에 나 있던 그림자들이 서로 연결되더니, 그 위로 검은 군사들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디스 플루토.
하데스의 옛 권속들이, 잃어버린 옛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의 두 눈엔 하나같이 시퍼런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반드시 찢어 죽여야 할 적이 바로 이곳에 있으니.」
「형제들이여, 이들을 죽음의 늪으로 빠뜨려 지난 원한을 갚으라!」
샤논과 한령의 지휘 아래, 디스 플루토는 구슬픈 함성을 터뜨리면서 일제히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콰콰!
연우의 다른 권속들도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으니.
「왕을 따라, 그분의 무명(武名)을 드높이리라!」
대지에서는 발데비히를 비롯한 망자 거인들이 일어나 달아나려는 기가스들을 쳐 죽이고.
「기가스들, 저것들은 예전부터 하나같이 꼴 보기가 싫었지.」
「그대가 칠흑과 한결 가까워지니 이전보다 현신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하늘에서는 사룡(死龍) 여름여왕과 칼라투스가 날아다니면서 브레스를 마구잡이로 뿌려 저들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 땅. 에. 칠흑. 을.」
부의 두 눈이 허공을 찢고 나타나, 명왕의 신전을 전부 강제로 연우의 그림자 속으로 복속시키고자 했다.
격진과 함께 수많은 마법과 권능들이 난사되면서 명왕의 신전 내에 있는 모든 기가스들을 압도했다.
「적에게는 죽음을, 아군에게는 투쟁을!」
그 구호 아래.
명왕의 신전은 단번에 함락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