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부자지간 (7)
『너는 이 어미의 한을 들어 줘야 한단다, 얘야.』
언제였던가.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은 아주 어린 시절.
이제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페르세포네는 친모 데메테르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은 언제나 유리관 속에 처박힌 채, 제대로 된 사고도 할 수 없이 가물가물한 의식만 붙잡고 있는 게 전부인데도 불구하고.
데메테르는 항상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한을 들어다오.
이 어미의 바람을 들어다오.
못된 남동생 놈들이 앗아가 버린, 우리 자상한 아버지를 되돌리게 도와다오.
따스한 어머니를 사라지게 만든 저들을 물리치게끔 도와다오.
그분들의 인자와 재능을 타고난 너라면, 이 어미의 바람을 알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겠든 이뤄 주지 않겠느냐.
『너만이…… 너만이 망가져 버린 우리 가족들의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란다. 그러니 부디…….』 페르세포네는 자신을 태어나게 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 정신이 들 때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머니.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부모님을 돌려 달라고 애원하는데.
왜 저에게는 그런 소중한 부모님이 없는 걸까요……?
* * *
적에게는 죽음을 선사하고, 아군에게는 투쟁을 가져다 준다.
망자 거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보여 주겠다는 듯, 닥치는 대로 잡히는 것들을 붙잡아 부수기 시작했다.
처음 잇달아 등장하는 연우의 권속들이 두려움을 느꼈던 기가스들은 곧장 용기를 되찾고 반격을 개시하고자 했다.
특히 당대 기가스를 상징하는 8대신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에피알테스, 클리티오스, 미마스를 비롯한 이들. 특히 대지모신이 각별히 아낀다는 알키오네우스는 디스 플루토의 상당수를 망가뜨리면서 전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 시. 일어나. 라.」
전장을 관조하고 있던 부의 명령에 따라, 그림자가 출렁이면서 분명히 망가졌던 디스 플루토가 다시 일어나며 그를 뒤에서부터 노렸다.
연우가 무사하다면 그들은 애당초 불사신일 수밖에 없는바. 몇백 번씩이나 망가진다고 해도, 연우의 마력이 뒤따르는 한 절대 사라질 우려가 없었다.
그리고 크로노스의 본체를 삼키면서 거의 무한한 마력과 신력을 얻게 된 연우에게 ‘마력 소진’은 이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으니.
당연히 그들을 대적하는 기가스로서는 미쳐 버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어째서! 어째서 끝도 없이 계속해서 나타난단 말인가……!』
알키오네우스는 하늘을 보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언제 어디서 공허를 열고 튀어나올지 모르는 비그리드도 공포였고, 죽여도 죽여도 계속 그림자에서 재생성되는 디스 플루토도 공포였다.
이곳이 정말 자신들의 성역이 맞는 건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올림포스의 영역이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들을 더 두렵게 만드는 것은 디스 플루토가 죽었다가 재생성될 때마다, 입고 있는 갑주와 무기의 색이 점차 더 짙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질도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
이전의 기질이 그냥 ‘죽음’에서 기인한 전사로서, 한때 타르타로스를 수호하던 병사로서 어둡고 날카로운 느낌이 강하다면.
지금은 좀 더 강렬하고 폭압적인 기질로 뒤바뀌어 있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생자(生者)를 죽음의 늪으로 빠뜨리는 전염병처럼. 강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음산함이 같이 뒤섞여 있었다.
알키오네우스는 그게 어디서 기인한 건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유용하게 쓰던 힘이었으니까.
‘크로노스의 신력을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가져올 수 있다니……!’
크로노스의 신력.
격이 하락했던 티탄과 기가스에게 힘을 되돌려 주고, 마지막에는 올림포스를 찬탈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 미지의 힘.
비록 티탄-기가스가 득세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지모신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그걸 가능케 했던 것이 크로노스의 신력이라는 사실은 절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을 무적으로 만들어 주었던 그 힘을, 이제는 디스 플루토가 사용한다고?
당연히 기가스로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여태껏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절대적 우위를 빼앗기게 된 셈이니까.
물론, 알키오네우스를 비롯한 기가스들에게도 여전히 많은 양의 크로노스의 신력이 남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소진하고 나면 다시 가져올 수 없는 한정적인 자원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들은 이것을 사용하는 데에도 태생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대지모신의 권능을 빌려 크로노스의 신력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개념이었으니까.
그러나 디스 플루토는 달랐다.
그들은 이제 무한에 가까운 크로노스의 신력을 연우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법에 따로 한계도 없었다. 죽음의 태엽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죽음’을 반복하면서 죽음의 태엽에 점차 가까워지고, 크로노스의 신력에도 점차 친숙해져 가고 있으니.
이대로 계속 싸움이 길게 이어진다면, 누구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연우 쪽에는 디스 플루토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때, 여러 신격들을 위협했다는 거인족의 후예, 망자 거인들이 곳곳에서 포효를 터뜨렸고.
하늘에서는 여름여왕과 칼라투스 같은 사룡들이 배회하면서 마구잡이로 브레스를 뿜어 대는 통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동맹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명왕’의 신전이 위험에 처합니다!]
[동쪽 지대가 ‘천령(레베카)’에게 점령되었습니다!]
[서쪽 지대가 망자 거인 군단에게 함락되었습니다.]
[남쪽 지대가 ‘본 드래곤(이스메니오스)’과 ‘혼돈의 마룡(칼라투스)’의 위협에 노출되었습니다.]
[북쪽 지대가 ‘데스 로드(샤논)’ 와 ‘데스 로드(한령)’에 의해 붕괴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신속한 복구가 필요합니다!]
……
[‘명왕의 신전’이 위태롭습니다!]
[‘명왕의 신전’이 위태롭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방어를 필요로 합니다!]
……
[‘명왕의 신전’의 성역 내부가 플레이어 ###의 색채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알키오네우스는 암담한 내용만 전달하는 메시지를 보면서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단어밖에 없었다.
몰락.
과거, 대지모신의 자식으로 태어나 올림포스를 되찾으려 했지만, 결국 제우스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타르타로스에 처박혔을 때가 떠오르고 만 것이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겪을 수 없다……!’
알키오네우스는 핼버드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비탄과 굴종만이 가득했던 때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알키오네우스는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도중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 멀리, 명왕 신전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석이 보였다.
달리 기둥으로도 보이는 것.
위급 시, 천계에 있는 올림포스와 연결하기 위해 사용되는 제단이었다.
‘일단은 올림포스로 후퇴를 해서, 전열을 재정비해야 한다!’
알키오네우스는 생각을 마치자마자 그쪽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래!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타르타로스로는 얼씬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제아무리 연우와 그 권속들이 날고 긴다고 한들, 결국 이곳 타르타로스에 한정될 뿐이었다. 자격을 갖추지 않았으니 98층에 있는 천계로의 입장은 불가능할 터.
그렇다면 저들로서는 닭 쫓던 개 신세밖에 되지 못하겠지.
사실 노다지나 다름없던 크로노스의 사체를 빼앗긴 이상, 타르타로스는 더 이상 그들에게도 크게 중요한 땅이 되지 못했다.
비록 에레보스로 도망친 포세이돈 등을 쫓을 방법이 영구 상실되고, 그로 인해 저들에게 새로운 반격의 기회를 열어 줄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야 남은 통로마저 완전히 차단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어쨌거나 98층으로 올라오기 위해서는 77층의 올포원을 넘을 수밖에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알키오네우스는 제아무리 연우가 크로노스의 신화를 쟁취했다고 하더라도, 올포원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올포원이 쉽게 꺾일 것 같았으면, 여태껏 천계 내에 있는 수많은 강자들이 내려오지 못했을 리 없으니까.
그러니 알키오네우스는 일단 후퇴 후 전력을 재정비해 후일을 기약하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대지모신께서 내리신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고 추후에 어떤 징벌이 내려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우선 몸을 내빼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데.
『넌…… 무엇이냐?』
중앙 제단에는 다른 누군가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과 같은 결론을 내린 동료인가 싶었지만.
알키오네우스는 녀석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곧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거적때기 같은 로브를 두른 거대한 크기의 언데드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한 손에 수상한 수정구를 들고, 양쪽 눈두덩이 위로 푸른 불꽃을 태우고 있는 존재.
아크 리치.
부-파우스트였다.
평상시 같았으면 당장 비키라며 일갈을 날렸을 테지만. 알키오네우스는 어쩐지 일정 거리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언데드와는 궤가 다르다는 건, 한눈에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건 그런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서 던진 질문도 ‘누구냐’가 아니었다. ‘무엇이냐’였다.
부를 따라…… 꿀렁대는 그림자가 온통 끔찍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마치 세상을 거부하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
분명히 부-파우스트는 ‘창백’이라는 신위를 획득한 초월자가 분명했다. 신이라고 해야 할지, 악마라고 해야 할지 분간은 힘들었지만, 분명히 신격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법칙을 다스리는 초월자라면 응당 가져야 할 느낌이 전혀 없었다.
법칙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마치…… 타계의 신 같은……!’
그런 생각에 미치자, 알키오네우스는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제야 부-파우스트를 따라 감도는 기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이 무질서, 혹은 혼돈이라고 부르는 타계의 법칙이 풍겼다.
스스로를 ‘옛 지배자’라고 부른다는 이들과 사뭇 비슷하지 않은가!
‘아니, 저 정도라면…… ‘외신’에 거의 근접했을……!’
하지만 알키오네우스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여태껏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부-파우스트가 처음으로 심어(心語)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희 같. 은. 종자들을. 아주. 싫어한. 다. 진정한. 주인. 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매한. 눈. 을. 가진 것들.」
덜그럭, 덜그럭-
턱 관절이 움직일 때마다 뼈가 부딪치는 요상한 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알키오네우스는 등골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분. 이. 직접. 오셨는. 데도. 불구하. 고. 어째서. 너희. 몽매. 한. 것들은. 무릎을 꿇. 고. 고개를. 조아리. 지. 아. 니하는가.」
부-파우스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알키오네우스는 어떻게든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서 악다구니를 썼지만.
「그것. 이. 바로. 너희들의. 죄. 다.」
부-파우스트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수정구를 허공에다 높게 둥실하고 띄웠다.
그 순간, 알키오네우스는 몸을 앞으로 날렸다. 부-파우스트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은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부-파우스트는 원래 연우의 권속들 중에서도 총수(總帥) 역할을 맡고 있는 리더에 가까웠고.
전생에서부터 현생에 이르기까지, 에메랄드 타블렛을 계속 탐독하면서 얻은 마법적 지식은 이미 웬만한 신격들이나, 타계의 신을 넘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질서 측에 해당하는 법칙과 혼돈 측에 통용되는 섭리, 양측의 지식을 모두 통달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러니 알키오네우스가 부-파우스트에게서 타계의 신과 같은 기질을 감지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파우스트가 추구하는 것은 질서니 혼돈이니 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엄연히 탑 속에 있는 신격들과 타계의 신들이 저들 편의상 구분한 것일 뿐. 결국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훨씬 이전으로 넘어가야만 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칠흑이었고, 부-파우스트는 기나긴 탑의 역사 동안 칠흑을 좇던 이들 중 자신만큼 가장 가까이 다가간 적이 있는 도전자는 없으리라 자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분이야말로, 칠흑의 후계자이며. 이제는 사도를 친부로 둔 진정한 전승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분의 뜻을 거역하려는 이런 잔당들은 반드시 치워야 하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화아아 혼탁하면서도 시린 빛을 뿜어 대는 수정구는 기어 다니는 혼돈을 비롯해 티폰 등, 연우가 그동안 흡수했던 신격들의 자아를 토대로 만들어 낸 것.
마성을 흡수하면서 도로 빼앗은 대신격들의 자아와 사념이 뒤엉킨 기물(奇物)이 화려하게 빛났다. 어찌 보면 마성의 머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짙은 안개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고.
파츠츠츠-
『아, 안 돼……!』
알키오네우스를 둘러싸는가 싶더니, 그대로 천천히 모공과 칠공을 통해 흡수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는 뒤늦게 이것이 공허나 칠흑으로 연결되며,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는 저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지만, 이미 그때는 늦은 뒤였다.
결국 별다른 저항도 못한 녀석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뒤.
덜그럭.
덜그럭!
부-파우스트는 사라진 녀석 외에 아직도 주제를 모르고 설쳐 대는 기가스들을 완전히 지워 버리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럴 때마다, 뼈마디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 * *
[‘타르타로스’의 중심지, ‘명왕의 신전’이 탈환되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5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보상으로…….]
……
[지금부터 업적에 따라, 60층의 히든 스테이지, ‘타르타로스’가 ‘페르세포네’로부터 플레이어 ###에게로 귀속됩니다.]
[경고! 현재 스테이지의 환경이 너무나 극악한 상태입니다. 어떤 생명체도 기거할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신전을 건설하세요.]
[중심지에 대신전을 건설하여 성역의 기능을 보강하세요.]
[현재 다수의 존재들이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성역에 무단 침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