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83화 (583/862)

8화. 부자지간 (8)

명왕의 신전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연우와 페어링으로 연결된 권속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드디어……!」

「아직은 너무 기뻐하기에 이르다! 기가스 놈들부터 대신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나서 기뻐해도 늦지 않아!」

「전군, 거창! 앞으로-!」

「벌레 같은 기가스 놈들을 모조리 박멸해라!」

「주군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신전을 청소해 두자!」

「적에겐 죽음을!」

「아군에겐 투쟁을!」

디스 플루토는 한껏 기뻐하면서 자축을 하다가도, 음험하기 짝이 없는 기가스 진영이 또 어떻게 나설지 모르니 마지막까지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자 했다.

망자 거인들도 신의 사회와 벌인 첫 전투에서 눈에 띄는 승리를 거두자, 한껏 고무된 상태. 사룡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부-파우스트의 활약도 연우가 예상했던 것보다 대단해서, 굳이 그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우는 지체하지 않고 비그리드로 공허를 다시 길게 쭉 찢었고.

그 너머에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페르세포네를 맞닥뜨릴 수 있었다.

“고작 도망친 곳이 이런 곳인가 보지?”

연우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언젠가. 하데스를 업고서 탈출하던 그에게 페르세포네가 지어 보이던 것과 똑같은 비웃음이었다.

당시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쫓기는 것은 연우가 아니라, 이제 페르세포네라는 점이었고.

하데스의 희생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게, 페르세포네는 도망칠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것.

천계로 향하는 중앙 제단을 부-파우스트가 빠르게 점령함으로써, 퇴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린 것이다.

여기서 페르세포네가 도망친다면 딱 한 군데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에레보스.

하지만 과연 타천(障天)이나 다름없는 짓을, 자존심 강한 그녀가 선택할 수 있을까?

없다.

연우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저벅!

연우는 공허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파바박!

실내에 설치되어 있던 갖가지 마법과 권능들이 발동되면서 연우에게로 쏟아졌다.

[권능, ‘우울한 화초’가 작렬합니다!]

[권능, ‘얼어붙는 꽃샘추위’가 침입자에게 내려집니다!]

[권능, ‘퇴비로의 퇴화’가 전개됩니다!]

……

[모든 권능들에 ‘죽음’이 이식되어 파훼되었습니다!]

하지만 연우가 가볍게 비그리드를 허공에다 휘두르자, 죽음의 태엽이 돌아가면서 도중에 모조리 분쇄되고 말았다.

“쓸데없는 짓을 잘도 하는군.”

연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미 그에게 웬만한 권능이나 저주 따윈 통하지 않았다.

검은 쇠사슬을 비그리드와 연결하여 죽음의 태엽이 계속 돌아가고 있는 한, 웬만한 공세쯤은 쉽게 무효화시킬 수 있었으니까.

죽음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생명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상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근원을 끊어 놓는 것. 그것이 바로 연우가 크로노스로부터 계승한 ‘죽음’이었다.

“당신은…… 어째서 하나부터 열까지, 어떻게 우리를 방해하기만 하는 건가요! 대체 우리와 무슨 척을 지었기에……!”

“혓바닥이 길군.”

연우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페르세포네를 향해 비그리드를 거칠게 뿌렸다.

촤르륵-

검은 쇠사슬이 맹렬하게 돌아가면서, 페르세포네의 머리 뒤쪽으로 공허가 활짝 열렸다.

페르세포네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피하는 것과 동시에 세계수의 일부를 현현(顯現), 뿌리를 가득 뽑아 올리면서 촉수처럼 후려쳤다.

채채채챙!

하지만 비그리드는 그런 게 얼마나 오든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단번에 뿌리들을 모조리 절삭하는 것과 동시에.

쿠르르릉!

칼날 부위에 단단히 응축되어 있던 검뢰를 크게 터뜨렸다.

검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극, 삼극, 사극…… 오극까지 차례로 터져 나오면서 페르세포 네를 보호하고 있던 가호나 결계가 잇달아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그러다 단숨에 파고들어 간 비그리드의 칼끝이 페르세포네의 우측 옆구리에 박혔다.

채애앵!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현한 세계수의 줄기가 비그리드를 튕겨 냈지만.

팟!

별안간 연우가 바로 페르세포네 앞에 나타나더니, 튕겨 난 비그리드를 손으로 잡아채면서 역수로 쥐어 그대로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푸화악!

페르세포네의 입가로 핏물이 튀어 올랐다.

“내가, 내가……!”

그러는 와중에도 연우를 바라보는 페르세포네의 눈길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검뢰가 영체에 손상을 입히고, 죽음의 기운이 체내로 쏟아져 감염 상태가 되었다지만 의지만은 절대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도리어 이것을 어떻게든 역전의 기회로 만들겠다는 듯, 비그리드를 뽑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손을 뻗어 연우의 멱살을 움 켜쥐었다.

그럴수록 연우는 더더욱 깊숙하게 비그리드를 밀어 넣었지만.

“내가!”

화아악-

열풍이 불었다.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의 아내, 즉, 명계의 왕비로 있으면서 터득했던 업화(業火)의 열풍.

비그리드가 도로 뽑혀 나왔다. 불길이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피어올라 세계수 뿌리를 장작 삼아 거칠게 몸집을 일으켰다.

쾅!

쾅!

연우가 적당히 간격을 벌리자, 페르세포네는 그가 도망치는 것이라 여기고 잇달아 폭격을 날렸다.

지면을 완전히 박살 내고, 주변 신전까지 모조리 붕괴시킬 정도로 위력적인 폭발.

콰아아앙!

연우는 부서진 건물을 뒤로하고 성역 밖으로 나왔다.

페르세포네가 있던 자리엔, 펄펄 끓는 용암으로 뒤덮이다시피 한 거대한 목우(木偶, 나무로 만든 사람 인형)가 서 있었다.

거신화(巨神化).

티탄들에게만 제시하고 자신은 절대 하지 않으려 했던 신력 개방이 이뤄진 것이다.

쿠어어어!

녀석이 거칠게 포효를 내질렀다. 다른 어느 티탄이나 기가스가 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신력이 방출되면서 명왕의 신전이 크게 들썩였다.

연우를 비롯해, 한창 전투를 벌이던 권속들이며 기가스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향했다.

『페르세포네가 크로노스의 신력을……?』

『거신화라니!』

『이곳을 전부 망가뜨릴 생각인가?』

기가스들은 마지막까지 믿었던 페르세포네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같이 잔뜩 굳고 말았다.

그녀가 궁지에 몰리니, 최후의 수단을 발동시켰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연우는 저것이 페르세포네의 ‘진짜’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들아.』

그때, 크로노스가 침음을 흘리면서 말을 걸어왔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여태 너를 끔찍한 혼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미안하게 생각한다.』

‘무슨 말씀을……?’

『너보다 더한 혼종이라니…… 하!』

‘…….’

『말했지? 저거, 이것저것을 잡다하게 섞어 놓은 클론이라고 말이야. 그런 주제에 내 신력을 쓰고 있으니, 그것참 건방지다고 해야 할지, 짜증 난다고 해야 할지.』

사실 크로노스는 다시 눈을 뜬 이후, 여러 기가스들을 보면서 기가 차는 심정이었다.

자신이 남긴 신력을 저들끼리 이딴 식으로 사용하고 있을 줄은 여태 생각도 못 하고 있었으니까.

연우는 차마 그에게 티탄들은 저보다 더하다는 것을 말해 줄 수가 없었다. 높이만 장장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신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는지.

『하여간 저거 빨리 정리하자꾸나.』

크로노스는 영 보기 끔찍하다는 듯, 싫은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그리드를 꽉 쥐었다.

* * *

결론적으로.

페르세포네의 본체 현신은 사실 덩치만 커졌을 뿐, 연우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업화의 열풍을 아무리 토해 낸다고 하더라도 사왕좌 속에 담긴 권능, 연옥로를 이길 수 없었고.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유황불을 끌어와 세계수의 뿌리와 함께 태운다고 하더라도, 검뢰의 열기를 당해 낼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해 준 크로노스의 신력도 이제는 연우의 것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이미 타르타로스가 연우의 성역으로 넘어간 이상, 사왕좌의 신위는 다른 어느 때보다 크게 빛나고 있었으니.

“명토 선포.”

[귀속된 타르타로스가 명토(冥土)로서의 기능을 더합니다!]

[아군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적군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촤르르륵-

분명 페르세포네가 가진 힘은 주신격을 능가할지도 모르지만.

촤악, 촤악, 촤악!

촤아아악!

그녀에게는 불운하게도 애당초 연우와의 상성이 좋질 않았던 것이다.

『안 돼……!』

어쩌면 하데스가 연우에게 사왕좌를 넘겼을 시점부터. 페르세포네가 가지리라 마음먹었던 것이 틀어졌던 순간부터 예정된 미래였는지도 몰랐다.

『안 돼애애애애!』

콰르르릉-

페르세포네는 위압감 어린 모습과 다르게 쇠사슬에 칭칭 감겨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남은 손발이 전부 잘리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검뢰는 거대한 신체마저도 종잇장처럼 찢거나 부수는 등, 가공할 만한 위력을 선보였던 것이다.

『이럴 수는 없어……!』

결국 페르세포네는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 뒀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사도 페르세포네의 요청에 따라, 대지모신이 강림이 시작됩니다!]

페르세포네는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대지모신을 타르타로스에 강림시키고자 했다.

대지모신은 어떻게든 그녀더러 연우와 권속들, 그리고 동맹군을 전부 막으라고 명령을 내렸다지만.

페르세포네는 이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크로노스의 사체를 쟁취한 순간부터 권속들은 이미 기가스와 대등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연우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주신격에 해당하는 강자였다.

어쩌면…… 제우스와 견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강자. 페르세포네가 감당할 수 있을 존재가 아니었다.

비록 어머니께서 세계수로의 침식 작업에 집중하시느라 이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대지모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대지모신이 요청을 거부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타르타로스를 빼앗기고, 올림포스마저 탈환된다면 대지모신의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길 테니까.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어머님…… 어머님이시라면……!’

페르세포네는 자신이 친모보다도 훨씬 친모처럼 생각했던 존재가, 세상에서 한없이 자신에게 따스했던 그분이, 이 부름을 거부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대지모신이 사도 페르세포네의 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

페르세포네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응답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나무껍질로 뒤덮인 얼굴은 충격에 잔뜩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까였나 보군.”

탁!

연우는 페르세포네의 미간에 가볍게 내려앉으면서 냉소를 흘렸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긴 장기짝은 그 쓰임새가 다하면 원래 그냥 버려지는 법이니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어머니께서는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란 말이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

“아니. 틀렸다. 너를 유일하게 이해해 준 건 대지모신 따위가 아니야.”

순간,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하데스였지.”

『무슨 헛소……!』

페르세포네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며 소리를 치려다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어쩐지 연우의 말투가 지금까지와 달리 진중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연우는 하데스로부터 사왕좌를 물려받았다. 단순히 신위뿐만 아니라, 신화도 일부 물려받았을 터. 그렇다면?

『너 무엇을…… 본 거지?』

연우는 굳이 그 질문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을 본 거냐고 묻지 않느냐!』

“너는 멍청하게 유일한 이해자였던 남편을 짓밟아 그 자리까지 왔지. 그렇다면 이제는 네가 짓밟힐 차례일 뿐이야.”

연우는 몇 차례 그녀와 겨루고 난 뒤, 이미 판단을 마친 상태였다.

더 이상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그럴 가치도 없겠다고.

하데스를 배신하고, 티탄-기가스를 이끄는 여왕으로 군림하기에 무언가 대단한 구석이라도 있을까 싶었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저 대지모신이란 커다란 배경을 등에 지고서, 크나큰 힘에 취한 나머지 앞뒤 분간도 하지 못하는 존재.

차라리 기어 다니는 혼돈이나 티폰이 그녀보다 훨씬 나을 듯싶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은 유희를 즐길지언정 칠흑을 좇는다는 이상이라도 있었고, 티폰은 동족들의 한을 풀어 주고 싶다는 바람이라도 품고 있었으니까.

촤촤촤-

연우는 단번에 비그리드를 뽑아 거칠게 뿌렸다. 페르세포네의 남은 몸뚱이가 모조리 분쇄되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무쌍 난무(無雙亂舞)]

촤촤촤촤-

연우가 크로노스의 신화를 보면서 터득한 권능이 발현되자, 검은 질풍이 삽시간에 거체를 뒤덮다시피 하다가.

푸화아악!

나무껍질을 따라 균열이 잔뜩 퍼져 나가면서 검은 신력이 분수처럼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기류를 타고 흘러 연유의 팔찌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조금이라도 더 저항하기 위해 뿌리가 몇 번씩이나 들고 일어나 그를 묶어 두고자 했지만, 허공에 가득 퍼져 있는 쇠사슬의 벽을 좀처럼 뚫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촤르르륵!

검은 쇠사슬이 팽팽해진다 싶더니, 어느새 인간 형체로 되돌아간 페르세포네의 목을 칭칭 감아 허공에다 매달았다.

“켁, 케켁……!”

페르세포네는 거칠게 발버둥을 쳤다. 표독함만이 가득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다급한 감정이 어렸다.

여전히 대지모신에 대한 미련과 하데스에 대한 물음들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숨이 막힌 나머지 전혀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연우는 그런 녀석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

콰드득-

손에 잡힌 쇠사슬을 잡아당겨 그대로 녀석의 목을 돌려 버렸다.

뒤로 돌아간 페르세포네의 머리가 혀를 길게 쭉 내민 채, 아래로 힘없이 툭 하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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