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84화 (584/862)

9화. 부자지간 (9)

『너만이…… 너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빛이란다.』

데메테르의 그 말은 항상 어린 시절 페르세포네의 머릿속을 맴돌았었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그런 것도 너무 좋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 한복판이었고, 친모 데메테르 외에 그녀를 방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데메테르가 찾아와도 아주 짧은 시간만 머물다가 가는 게 전부였으니.

어린 페르세포네는 그저 혼자서 하염없이 시간을 죽여야만 했다. 친구는 또 다른 자신이었고, 대화 상대도 자신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계속 중얼대기만 하고 있던 어느 날.

『……누이가 또 별 이상한 헛 짓거리를 한다기에 몰래 뒤를 밟았더니. 이딴 곳이 있을 줄이야. 아주 불쾌한데.』

난생처음으로 데메테르 외에 다른 사람을 보게 되었다. 무뚝뚝한 인상에 진중하게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있는 남자.

하데스였다.

* * *

“……그래도 명색이 신의 사회를 이룰 정도인 곳인데. 아예 쑥대밭이 되었군.”

“허허허! 이건 이거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군. 그만큼 우리의 동맹이 강하다는 뜻 아닌가!”

이랑진군과 나타태자는 연우를 쫓아 명왕의 신전으로 건너온 후, 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들이 보게 된 광경은 아주 충격적이었으니까.

기가스가…… 패배하고 있었다.

포세이돈을 위시한 여러 대신격들이 머물고 있던 올림포스를 찬탈한 기가스가.

물론, 그들 세력의 한 주축이 되었던 티탄이 빠져나간 상황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연우가 벌인 업적은 너무 놀라운 것이었으니.

특히 대지모신을 등에 업고 있어서, 천계 내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페르세포네의 목이 돌아가 있는 모습은…… 일견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으하하하! 그것참!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대단한 친구야!”

“내가 계속 말하지 않았나. 역시 나의 사도가 될 자격이 있는 아이라고!”

“사도는 무슨. 이 헤라클레스 님의 좋은 양우가 될 분에게!”

“우리 형제님, 아직도 헛된 욕심을 버리지 못하셨구만?”

뒤늦게 나타난 헤라클레스와 아레스는 그 광경을 보며 투덕거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방실방실 떠나지 않고 있었다.

반면에 아테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경건한 자태로 어딘가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시끄럽게 구는 남동생들과 다르게, 지금 이런 상황을 축복하는 것이겠지.

그들로서는 여태 막다른 벽으로만 느껴졌던 것이 사라지고, 드디어 길이 활짝 열린 셈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이랑진군은 앞으로 올림포스가 누구의 손에 들어가게 될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곳 타르타로스를 기점으로 에레보스에 갇혔다는 기존 신격들을 구출해 내고, 나아가 올림포스까지 오를 거다. 원래 타르타로스는 올림포스와 별도라 구분지어도 되었던 곳이었으니…… 두 개가 통합된다면 시너지 효과가 적지 않을 테지.’

더군다나 그렇게 재탄생하게 될 올림포스는 기존의 사회들이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를 게 분명했다.

‘게다가 여기에 기존의 죽은 용종들이며 망자 거인들까지 더해진다면. 음……!’

생각을 굴리는 내내, 이랑진군의 눈빛은 진중했다.

가뜩이나 급격한 성장세를 이루고 있는 연우를 두고 천계 내에서는 위기론이 한창 대두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 더 큰불을 지피게 된 셈이니. 올림포스의 왕좌에 앉아 버리게 된다면, 다른 사회들이 그를 마땅히 제지할 수단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만큼 탑이 탄생한 이래, 처음으로 올포원을 물리칠 만한 대적자(對敵者)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어린 시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혹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기라도 할까 싶을 테니. 그 뒤에 저 아둔한 것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중간에서 잘 조절을 해야겠군.’

연우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천교로서는 앞으로 천계 내에 불어닥칠 소란에 대해 교통정리를 잘해야겠다는 판단밖에 들지 않았다.

그사이.

『###!』

뒤늦게 나타난 아가레스가 검은 날개를 접으면서 연우 앞으로 툭 떨어졌다.

마침 연우는 아레스와 헤라클레스에 둘러싸여 ‘사도가 되라’느니, ‘같이 사냥이나 다니자’느니, ‘자신과 함께하자’느니 하는 별 이상한 소리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재빨리 아가레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들아. 아비로서 진지하게 말하는데, 우선 이것들 정신 교육부터 시키자꾸나. 요즘 어린 것들은 원래 다 이런 거냐? 어째 족보에 위아래가 없어요, 위아래가. 나중에 이 할아비도 만나고 나면 맞먹으려 들겠어?』

크로노스가 꿍얼거리는 핀잔에서도 해방되고 싶었다.

‘그럴 걱정을 하시기 전에 우선 나타날 생각부터 하십시오.’

『험험! 그건 나중에. 그래도 명색이 신왕이라고 불리고, 이 애들한테는 옛날 옛적의 존재일 텐데. 그냥 초라하게 나타나서 쓰나. 이 왕에 나타날 거면 아주 신비롭게 나타나야지, 안 그래?』

연우가 봤을 때는 난생처음 만나게 된 손주들을 직접 대면하려니 어딘지 부끄러워서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지적을 했다간 잔소리만 들을 것 같았기에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뚝뚝하고 서먹하기만 하던 아버지와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현실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왜 그러지?”

연우는 이런저런 생각을 뒤로하면서, 아가레스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그답지 않게 아주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심각하게 논의를 나눌 이야기가 있단 뜻이었다.

『개새끼를 구해다오.』

“펜리르를?”

『그래.』

연우도 펜리르가 페르세포네에게 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안 상태. 정확하게는 ‘봉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에 놀라고 말았다.

이 자존심 강하고 탐욕 덩어리인 아가레스가, 누군가를 구해달라고 직접 말할 줄이야.

그동안 펜리르와 툭 하면 티격태격하기에 사이가 좋지 않나 싶었는데, 그사이 정이 깊게 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 몸의 애완견과도 같은 녀석이다. 주인인 내가 제대로 돌봐 줬어야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봉신의 구조를 안다면 내가 직접 갈 것이나, 나는 알지 못하니…….』

하지만 자존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지, 아가레스의 얼굴에는 자기혐오가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굴욕감도 섞여 있었다.

『그러니 부탁한다.』

[악마의 사회, ‘동마왕군’이 아가레스를 따라, 동맹인 플레이어 ###에게 간곡히 요청합니다!]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동맹으로서의 의무를 지켜 줄 것을 요청합니다!]

[강림을 준비 중인 요르문간드가 애타는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강림을 준비 중인 헬이 애타는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니플헤임’의 수장, 로키가 당신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연우는 여러 시선을 느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저 허공 중 쇠사슬에 매달린 채로 있는 페르세포네의 사체로 향해 있었다.

“크게 한숨을 돌렸다고 해도, 대지모신이 있는 한 아직 싸움은 전부 끝난 게 아니니까.”

『너?』

“천계 뒤편으로 도망친 그년을 이쪽으로 끄집어 내려야지.”

아가레스는 연우의 눈가에 맺힌 흉흉한 살의를 읽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긴! 여기서 끝낼 수는 없겠지. 그래야 바로 ###이 아니겠나. 이 아가레스가 인정한 몸다운 발언이야.』

아가레스는 진중했던 모습에서 다시 광기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들아, 혹시 이놈 무슨 조울증 같은 거 있니?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해?』

연우는 동생과 자신에 대한 아가레스의 광적인 집착에 대해 크로노스에게 말해줬다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이에 아가레스는 아무래도 좋은지 하늘을 응시하더니 다시 수십 쌍의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츠츠츠-

검은 마기가 안개처럼 잘게 퍼져 나갔다.

『그럼 이 몸은 네가 대지모신을 끄집어 내리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뒷정리를 도와주마.』

그 순간.

쿠쿠쿠쿠……!

타르타로스의 잿빛 하늘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수십 수백 개의 유성우가 잇달아 궤적을 그리면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명왕의 신전에서 도망치는 기가스 놈들을 때려잡고 있으면 되겠지?』

[아가레스의 명령에 따라, ‘동마왕군’이 강림합니다!]

타르타로스는 이미 연우의 성역으로 선포된 상태. 당연히 연우의 허락이 있는 한, 강림에 필요한 인과율이 극도로 적어 단체로 강림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아가레스는 단숨에 하늘로 날아 올라 강림을 완료한 휘하 악마들과 함께, 여전히 타르타로스 곳곳에 남아 있는 기가스를 사냥하기 위해 움직였다.

“악마들이 움직이는 데야,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 본교는 어디 숨었다는 티탄의 잔당들을 청소하도록 하지.”

나타태자도 그동안 몸이 근질근질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이랑진군이 하늘을 보며 소리쳤다.

“오라. 제장(諸將)들이여.”

[삼신장 중 두 신장의 의결에 따라, ‘천교’의 토천평군(討天平軍)이 강림합니다!]

나타태자와 이랑진군은 각각 불줄기와 수룡이 되어 강림을 시도하는 군병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사라졌다.

타르타로스에 남아 있는 티탄과 기가스만 전부 정리된다면 모든 토벌이 끝나는 셈이었다.

“그럼 우리는 에레보스로 가는 문을 복구하고 있을게.”

아테나는 여기서 자신들이 나설 구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연우를 최대한 서포트할 생각이었다.

연우는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촤르르륵!

쇠사슬 끝에 걸려 있던 페르세포네의 시체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연우는 녀석을 향해 왼손을 활짝 펼쳤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페르세포네’에 대한 식령을 시도합니다!]

연우가 집어삼키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페르세포네의 영혼이 아니었다.

이미 크로노스의 사체를 삼키면서 그는 완숙의 상태에 이르러, 아무리 더 많은 신격들을 삼킨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의 성장을 이루긴 힘들었다.

다만 지금 연우에게 필요한 것은 페르세포네의 영혼 안쪽에 있었다.

대지모신과 연결된 단말.

녀석이 사도로 있을 수 있었던 그 매개체를 가질 수만 있다면, 대지모신을 추적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막바지에 대지모신이 채널링을 단절시킨 것 같았지만, 복구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페르세포네와 대지모신이 크로노스의 신력을 사용했던 것이, 이제 와서는 연우에게 반격의 카드가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식령에 성공하였습니다!]

[‘올림포스’의 신, 페르세포네를 식령하였습니다. 그녀가 이룬 모든 신화가 전이됩니다.]

……

[페르세포네의 모든 자격을 이을 수 있습니다.]

페르세포네의 자격을 잇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대지모신의 사도’로서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식령된 페르세포네의 잔재 속에서 아주 흐릿하지만 그가 찾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망가진 단말을 발견하였습니다.]

[죽음의 태엽이 작동합니다.]

[복원을 시도합니다.]

[실패합니다.]

[복원을 시도합니다.]

[실패합니다.]

……

[복원에 성공하였습니다.]

[채널링이 복구되었습니다. 채널링을 강화하세요.]

[칭호, ‘대지모신의 사도’를 획득하였습니다!]

『푸하하! 칠흑왕의 후예라는 놈이, 이 크로노스의 아들이라는 놈이, 대지모신의 사도좌까지 꿰차게 될 줄이야!』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게 되자, 크로노스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모든 신격들이 증오해 마지않는다는 자리를…! 정말이지 내 아들이지만, 너처럼 골 때리는 놈은 본 적이 없단다!』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잔뜩 격앙 되었다.

『거기다 이제는…… 그런 모시는 신을 이 땅으로 끄집어 내리려고 할 줄이야!』

신을 끄집어 내린다는 것!

그것만큼 재미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전부 아버지께 배운 것 아니겠습니까?”

『어허. 감히 어디서 이 애비가 너에게 견줄 수 있겠느냐. 청출어람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원래 새싹은 씨 뿌린 곳에서 나는 법이지요.”

연우는 그렇게 시시껄렁한 대화를 하면서, 손을 높이 뻗었다.

예전에는 느껴지기만 하고,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었던 채널링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죽음의 태엽이 작동합니다.]

연우는 그 이질적인 감각을 느끼면서.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전력을 다해 안쪽으로 세게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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