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대지모신(大地母神) (2)
무섭다.
어린 페르세포네가 처음 하데스를 만났을 때 들었던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상하게 웃는 친모 데메테르와 다르게, 하데스는 너무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정도였으니까.
혹시 나를 해하지는 않을까, 무슨 짓을 하려는 게 아닐까.
그렇게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휘릭!
하데스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날이 많이 쌀쌀하다. 우선 이걸로 몸부터 녹여라.』
자신의 윗옷을 벗어 그녀의 몸에 둘러 주는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어린 페르세포네는 진짜 ‘따듯하다’는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 * *
영락?
아니면 타천?
뭐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는지.
물론 비에라 듄의 입장에서는 딱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지.
“안 돼……! 안 된다고!”
비에라 듄은 상처를 가득 입은 모습이었다.
동생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아름답고 고고한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비단 같던 검은 머리카락은 이상한 뭔가로 얼룩덜룩해 혼탁했고, 당당하던 눈동자는 온통 광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추하다.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벅.
저벅.
“오, 오지 마……!”
비에라 듄은 사색이 된 채로 여러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무리 대지모신에서 떨어져 나왔어도, 별의 마녀라고 불리던 실력은 어디로 가지 않았는지 제법 파괴력이 강한 마법들이었다.
콰콰쾅!
하지만 그런 마법들을 제아무리 갖다 퍼붓는다고 하더라도, 언뜻언뜻 연우를 타고 감도는 망자의 벽과 검은 그림자는 뚫지 못했다. 흠집은 물론, 그을음조차 남지 않았다.
아무리 모든 마녀들의 주인이라 불릴 정도로 강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한없이 영락해 버린 상태. 영락한 신격이란, 필멸자만도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말만 필멸자일 뿐, 이미 웬만한 신격들은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수준을 자랑하지 않던가. 더불어 크로노스의 사체까지 식령하면서 이제는 천계 내에서도 그를 무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지경이었다.
“오지 말라고! 아아악!”
비에라 듄은 아무리 많은 마법과 저주를 퍼부어도 연우가 끄떡도 없자,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빼다가 괴성까지 질러 댔다.
어떻게든 억누르고 있던 공포가 단숨에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손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대지모신으로 지낼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절대 되찾고 싶지 않았던 감각들.
결국 비에라 듄은 공포에 완전히 질식된 채로, 이성을 잃고 광란을 부려 댔다. 손에 잡히는 건 무엇이든지 연우에게 집어 던졌다. 그를 발로 차기까지 했다.
그런데.
[펜리르가 강림합니다!]
갑자기 비에라 듄의 뒤쪽에서 공간이 열리더니, 펜리르가 나타나 단숨에 앞발로 그녀를 찍어 눌렀다. 대지모신이 봉신한 녀석을 같이 풀어 준 것이다.
쾅!
비에라 듄이 개방하고 있던 마법진들이 모조리 캔슬되어 허망하게 사라지는 가운데.
왕!
펜리르가 연우를 보면서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니플헤임’의 악마, 펜리르가 당신에게 반갑다며 인사합니다!]
마치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한 눈빛.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고맙다는 뜻으로 펜리르의 턱밑을 긁어 준 뒤, 조용히 자세를 낮춰 비에라 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천천히 그녀를 위로 들어 올렸다.
“컥……! 컥! 놓으…… 란 말이야……! 제발……!”
비에라 듄은 어떻게든 연우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더 크게 발버둥 쳤다. 손톱을 세워 연우의 손등을 마구잡이로 할퀴고, 그의 복부를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녀의 손톱이 부러지고, 발목이 돌아가기 일쑤였다.
덕분에 공포라는 정신적 고통에 이어서 이번에는 육체적 고통까지 뒤따랐다.
역시나 대지모신으로 지낼 때에는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것. 아파도 너무 끔찍하게 아파서 ‘악’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대체 인간들은 이런 느낌으로 어떻게 살 수 있는 거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천계로 오른 지는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는데. 왜 이렇게 낯설게만 느껴지는 건지.
비에라 듄은 인간으로 산 날들이 마치 수천 년 전인 것처럼 너무 까마득하게만 여겨졌다.
그건 아마도 너무나 지독한 상실감 때문이리라. 그리고 미련 없이 전부 던져 버려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하계의 감각이 이질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우주를 직시할 수 있을 정도로 지고하던 시선은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무한하게 뻗쳐 나가던 의식은 전부 닫혀 좁은 세상에 갇힌 것만 같았다.
연우가 멱살을 잡고 있지 않아도, 비에라 듄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아주 좁디좁은 우리에다 자신을 욱여넣은 것 같았으니까.
도저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더 큰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시는 그 전능했던 감각을 되찾지 못한다는 사실에. 손만 뻗어도 삼라(森羅)가 흔들리고, 의지만 내비쳐도 만상(萬象)이 그녀를 따라오던 힘.
천망회회(天網恢恢)와 만휘군상(萬彙群象)을 다스리던 이적이 더 이상 이 손에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재화? 명성?
부귀? 영화?
그런 것들을 몽땅 가져다 놓는다고 한들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대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래서 여태껏 겨우 이뤄 놓은 것들이 허망하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강박증이 더더욱 숨통을 옥죄어 왔다.
그래서.
“놓…… 아줘……! 살려…… 줘……!”
비에라 듄은 연우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에서도 제발 살려 달라며 애원했고.
“아주 꼴사나워.”
연우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비에라 듄의 눈가에 비친 자신은 분명 냉소를 짓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생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일 때도.
독을 먹이고, 심장에다 칼을 박을 때도.
대지모신이 되었을 때도.
녀석은 항상 자신만만하고, 고고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다.
그저 비루한 꼴만 하고 있을 뿐.
그래도 최소한 마지막까지 당당한 모습일 줄 알았는데. 이따위라니.
대체 어떻게 천계와 하계, 그리고 자신들 형제는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녀석에게 여태 농락당하고 있었던 걸까?
기도 차지 않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우의 시선을 느낀 걸까.
비에라 듄이 숨이 막힌 상태에서도 억지로 기력을 쥐어짜 목소리를 냈다.
“내…… 가……?”
“그래.”
“헛소리…… 마!”
공포에 잔뜩 질려 있던 비에라 듄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네놈이…… 제삼자일 뿐인 네놈이 뭘 안다고 개소리를 지껄여! 네가 알기나 해? 네 동생은 항상 그랬어. 날 똑같은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지. 보호할 대상으로만, 그리고 어디다 내놓을 트로피로만 여겼을 뿐이라고……!”
목소리에는 독기가 잔뜩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빼앗았어! 가져갔다고! 근데 뭐? 그게 뭐가 잘못된 거지? 여태껏 네 동생이 명성을 떨치고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건 우리들의 희생이 있어서였지. 우리가 전부 떠받쳤기 때문이었어! 나중에는 거기에 지쳐서 다들 나가떨어졌던 거고!”
비에라 듄은 이미 자신의 죽음 따윈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말이라도 어떻게든 퍼붓겠다는 듯, 잔뜩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악담을 퍼부었다.
그리고.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연우는 한참의 침묵 끝에 그렇게 말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
비에라 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
“네 말대로 정우가 선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저 내 동생이니, 내가 선한 피해자로만 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몇 번이고 동생의 일기장을 되돌아보았고, 심지어 그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굴러가는 여러 상황들을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동생이 당한 배신에는 분명 그의 잘못도 있었다는 걸.
“그래서 뭐?”
하지만 그렇기에 연우는 도리어 묻고 싶었다.
“피해자가 왜 가해자를 동정해야 하는 거지? 사정을 헤아릴 필요가 있나?”
“무슨……!”
“정우를 떠받들었던 이유? 녀석이 잘나서였겠지. 너희들은 그걸 두고 질투를 했을 뿐이고. 그리고 만약 녀석이 정말로 너를 인형으로만 여겼다면, 자신의 심장에다 칼을 박아 넣을 때, 독을 먹일 때, 너를 어떻게든 쫓았을 거다. 아무리 허약해졌어도, 당시의 그놈에게도 그 정도 힘은 남아 있었어.”
“……!”
“하지만 정우는 그러지 않았어. 왜냐고? 너를 그만큼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그리고…… 트로피라고 했나? 웃기는군. 세상에 어느 누가 트로피에게 자기 간이며 쓸개를 다 내어 주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
연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너는 그냥 배반자일 뿐이다, 비에라 듄. 제아무리 그럴듯한 헛소리로 포장해도, 결국 너는 네 연인을 독살하고, 친딸을 실험체로 삼았던. 그런 포악한 괴물일 뿐이야.”
“아……!”
비에라 듄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지만.
연우는 더 이상 듣기 귀찮다는 듯 손에다 강하게 힘을 주었다.
콰드득-
마치 수수깡처럼 쉽게 목이 부러졌다.
그리고.
[대상의 영혼이 소울 컬렉션에 귀속되었습니다.]
연우는 비에라 듄의 영혼을 그대로 잡아당겨 칠흑왕의 절망 속으로 집어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것에게 깔끔한 죽음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비에라 듄을 심판하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난타와 세샤.
그리고 브라함.
그들에게 이 녀석을 넘길 생각이었다.
『……허망하군.』
여태 말없이 연우와 비에라 듄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크로노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막내아들을 다치게 한 존재인데, 너무 쉽게 가 버렸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야 단순한 자기 위안일 뿐입니다. 전 지금 어느 순간보다 기쁩니다. 아난타에게 줄 선물을 챙겼으니까요.”
『…….』
크로노스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아들의 어깨가 다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그때였다.
약. 속. 지. 켰.
날. 놓. 아.
나. 는. 너. 와. 관. 계. 없.
칠. 흑. 포. 기. 하.
저 허공 너머로, 아직까지 채널링을 해제하지 못하고 있는 대지모신이 울부짖고 있었다.
여태껏 중심 자아로 쓰고 있던 비에라 듄을 떼어 냈기 때문일까. 이전보다 훨씬 정돈되지 않는 여러 사념들이 중구난방으로,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것들이 말하는 바는 하나였다.
비에라 듄을 놓아주었으니, 이제는 자신을 풀어 달라. 이것으로 악연을 전부 끝내자는 뜻이었다. 그 속에는 앞으로 칠흑을 쫓아 귀찮게 하지 않겠단 의중도 섞여 있었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건 아무래도…….”
『자기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참 웃기지? 자아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대지모신은 좀 반편이에 가깝긴 하지. 원초적인 본능이나 의지만 남아 있거든.』
크로노스는 연우의 생각을 읽고, 동조하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하기도 하다. 정제되지 않은 힘이란, 그만큼 더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법이니.』
“멍청하다고 무시는 해도, 만만하게 볼 생각은 없습니다.”
연우는 크로노스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옵션을 발동시켰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비에라 듄.”
츠츠츠-
소울 컬렉션이 활짝 열리면서 영체만 남은 비에라 듄이 나타났다.
아주 잠깐이지만, 수만 개에 달하는 망령들의 세계에 갇혀 있었던 그녀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다급한 어조로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권능, ‘연옥로’가 발동되어 업화(業火)가 지정된 대상의 영혼을 태웁니다.]
「꺄아아악!」
비에라 듄의 영체는 갑자기 발밑에서부터 치솟은 불길에 휩싸여 고통에 허덕였다.
업화는 영혼에 새겨진 악업을 정화시키는 불길. 당연히 악업이 많이 쌓여 있을수록 고통은 더 심할 수밖에 없었고, 대지모신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던 비에라 듄이 받는 고통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빠져나가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감옥에 갇힌 상태이니. 차라리 소멸을 시켜 달라는 말까지 외칠 정도였다.
「제, 제발! 그만! 그마아아안!」
“많이 괴롭나 보지?”
연우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자신이 타인에게 준 고통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으면서, 정작 자신이 받는 고통은 아프다고 꽥꽥 소리를 질러 대는 꼴이라니.
귀가 썩을 것 같았지만, 이제부터 재미난 놀이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꾹 참기로 했다.
「아파! 아프다고! 제발! 제발!」
“그치게 할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지.”
비에라 듄은 연우가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발! 제발……! 하라는 건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제발 풀어 줘……! 아아악!」
당장 영혼이라도 내어 줄 기세.
연우의 한쪽 입술 끝이 크게 비틀어졌다.
“너, 대지모신의 일부이기도 했으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녀석의 약점이나 치부 같은 것도 잘 알고 있겠지?”
「너, 너……!」
비에라 듄은 비명을 지르다 말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연우가 여태 바로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연우의 두 눈이 엷게 기울어졌다.
“그러니까 전부 아는 대로 말해. 어차피 널 버린 건 저놈이니까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잖아?”
「……!」
당사자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의 뒤통수를 때리라는 그 말에.
비에라 듄은 흠칫 굳고 말았고.
『……어휴! 내가 저것과 빨리 화해해서 망정이지.』
크로노스는 비그리드 안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