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87화 (587/862)

12화. 대지모신(大地母神) (3)

말. 도. 안. 되. 는.

약. 속. 지. 켜. 라.

대지모신은 갑작스러운 연우의 반응에 적잖게 당황했는지, 분노를 표했다.

원하는 대로 비에라 듄을 내어 주지 않았느냐. 그러니 약속을 지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녀석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에라 듄을 향한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말하기 싫나? 그래도 마지막 의리는 남아 있나 보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연우가 그녀를 연옥로에 가둔 채로 소울 컬렉션에 넣으려 하자, 비에라 듄은 정말 이대로 있다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 아니다! 말하겠어! 그, 그러니 제발……!」

비에라 듄은 연우의 생각이 바뀔까 싶어 속사포처럼 대지모신에 대한 정보를 토설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대지모신의 자아로 있으면서 파악한 특이 정보들이었다. 연우가 요구한 약점들뿐만 아니라, 대지모신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부분까지.

대지모신이 급하게 비에라 듄을 분리시키느라, 그 과정에서 자신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 만. 두. 지. 못.

꺼. 져. 라.

대지모신은 이대로 있다간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거대한 두 눈을 시뻘겋게 뜨면서 신력을 한데 응축시켜 이쪽으로 광선을 쏘았다.

하지만.

촤르륵!

비어 있던 다른 검은 쇠사슬이 빠르게 돌면서 광선을 도중에 쳐 내고 말았으니.

대지모신이 더더욱 초조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호오. 이런 게 있단 말이지? 개념신(槪念神)이라는 것이 항상 모호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하!』

비에라 듄이 던진 말 중에는 크로노스조차 놀랄 만한 내용도 있었다.

대지모신이 왜 칠흑과 관련된 연우와 동생에게 그토록 광적인 집착을 보였는지 알게 된 것이다.

‘개념신의 탄생은 첫 번째 빛이 일어난 우주 창생과 함께 시작되었다라…….’

우주 창생은 어떻게 보면 ‘정지’되어 있던 무(無)와 공허의 세계에, 갑자기 거친 폭발과 함께 빛이라는 이물질이 생겨나면서 생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떨어져 나간 무와 공허의 조각들은 빛에 감염되어 성질이 조금씩 변화하였고, 조금씩 업이 누적되면서 활동성을 얻어 신적인 존재가 되었으니.

정제되지 않은 의식과 원초적인 모습을 하면서도, 가진 권능과 신권은 여러 우주와 차원을 관통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개념신, 혹은 고대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 중 대부분이 활동성은 있어도 욕망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아,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들은 대개 세계의 이면으로 침전하면서 이데아를 이루는 구성 요소로 전락하였다.

그렇지 않은 존재들도 고대신(Elder god)으로 분류되면서는 우주의 변화를 가만히 관망하기만 할 뿐, 딱히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디에나 특이한 존재는 있기 마련.

얌전한 성향을 보이는 대부분의 개념신이나 고대신과 다르게, 대지모신은 전혀 다른 특색을 자랑했다.

그녀가 보기에 우주의 그런 변화는 전부 자신의 것이었다.

대지가 들어서는 곳. 나무가 자라는 곳. 숲과 산이 일어서는 곳. 생명이 잉태되는 곳. 그리하여 진화를 거듭하고, 마침내 문명을 이루는 곳.

그들을 모두 ‘낳은’ 존재가 바로 대지모신이지 않은가. 생명의 신비란, 그녀가 자리매김함으로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지모신은 자신이 낳은 존재들을, 자신이 안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강했다. 이렇다 할 자아나 의식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오로지 전부 ‘품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이고 또 움직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 대상에는 생명에서 비롯된 현 여러 신격과 악마들 같은 초월자들도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대지모신이 칠흑왕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대지모신이란 개념신은 무와 공허의 파편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파편의 원형(原形)이 바로 칠흑왕이었다.

하지만 현재 칠흑왕의 자아는 공허의 아주 깊숙한 곳에 유폐된 상태.

대지모신은 이런 칠흑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그 존재를 삼키면서 보다 완벽한 존재로 거듭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칠흑왕의 축복을 받은 차정우를 노린 것이었다. 그의 영혼을 탐닉하여 칠흑왕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차정우와 가까이 있던 비에라 듄을 점지했던 것도.

비에라 듄을 자아로 삼아 활동성을 더한 것도.

연우가 나타났을 때, 그를 삼키고자 했던 것도.

그 모든 일이 전부 녀석의 그런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에라 듄은 여태 대지모신이 꽁꽁 숨겨 뒀던 내막을 서슴없이 늘어놓았고.

연우와 크로노스는 여기에 대해 분노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태껏 몰랐던 대지모신에 대한 약점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음에 안도했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대지모신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마찬가지구나. 하지만 이제 다시는 활개를 치지 못하도록 만들 수는 있겠어.』

크로노스의 분노를 뒤로하고, 비에라 듄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대지모신은 제대로 된 형체가 없기 때문에 지금 저 모습은 영혼석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어! 그리고 그 프로세싱은 내가 도맡았고……!」

연우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비에라 듄이 말한 영혼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색욕의 돌.

모종의 루트를 통해 동생이 구했지만, 도중에 비에라 듄이 훔쳐 달아났던 보물.

지이이잉!

그때, 연우의 심장 옆에 박힌 현자의 돌이 거칠게 떨렸다. 어서 다른 부품인 색욕의 돌을 가져오라는 듯이.

「……이런 식으로 하면 될 거다. 그러니, 그러니 이제 제발 나를 풀어 줘……! 제발!」

비에라 듄이 말해 준 프로세싱은 연우에게도 어느 정도 친숙한 내용이었다.

에메랄드 타블렛을 위시한 계시록의 성질을 잔뜩 담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거래 과정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탑의 지식을 더해 만들어 낸 그녀만의 독자적인 체계일 테지.

만약 연우 혼자서 덤볐다면 영혼석을 강탈하는 데 상당한 수고를 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비에라 듄이 프로세싱을 모두 말해 준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체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우가 가지고 있는 계시록의 정보가 그녀보다 훨씬 우위에 있으니 약점을 분석하는 것도 더욱 수월해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연우는 그렇게 대지모신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대지모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전부 알아내는 데 성공하였고.

안. 된. 다.

「전부 말해 줬잖아! 이 불 좀 꺼달란 말이야! 아니면 차라리 나를 소멸시켜 줄……!」

그런 그의 앞에서 대지모신의 분노와 비에라 듄의 절규가 한께 뒤섞였다.

연우는 비에라 듄을 보면서 한쪽 입술을 크게 비틀었다.

“비에라 듄, 덕분에 좋은 정보를 알았다. 그러니 좋은 선물을 하나 주지.”

「그, 그래! 네가 하라는 대로 했으니까, 이제……!」

비에라 듄은 연우의 말에 처음으로 희망이 번진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럴 때 정우 녀석이 항상 하던 말이 있었지.”

「무슨……?」

“구라지, 병신아.”

「……!」

비에라 듄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연우의 비웃음이 파안대소로 젖었다.

“너도 항상 정우에게 거짓말만 늘어놓지 않았나? 그러니 너도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 날, 날 이렇게 할 수는 없……!」

“닫혀라.”

비에라 듄은 절망에 빠진 상태로도 어떻게든 연옥로의 길에서 탈출하기 위해 아등바등했지만, 그림자가 위로 길게 쭉 올라오면서 그녀를 도로 집어삼켰다. 불길과 함께 통째로.

쿵, 쿵, 쿠쿵!

영혼이 발기발기 찢어지는 고통에 비에라 듄이 몸부림치는 것이 연우에게 전해졌다.

대체 얼마나 많은 악업을 태우고 있는 건지 도저히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어 나온 사념들은 저절로 그림자의 양분이 되어 주었다. 연우는 다시 대지모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계수에 들러붙어 있어 얼굴의 생김새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지만. 분명히 인상이 잔뜩 일그러져 있을 녀석이 보였다.

이제, 타르타로스에서의 마지막 사냥을 시작할 때였다.

“펜리르.”

왕!

펜리르가 연우를 보면서 알겠다는 듯 크게 짖더니, 하늘을 향해 하울링을 내뱉었다.

아우우!

[펜리르가 소속된 사회, ‘니플헤임’에 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동맹군 ‘니플헤임’이 펜리르의 요청에 따라 원군을 파병합니다!]

[요르문간드가 강림합니다!]

[헬이 강림합니다!]

……

이어 하늘 곳곳이 열리면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떨리는 대지에서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 뱀이 그림자에 묻힌 채로 일어났고, 하늘에서는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지만 아름다운 얼굴을 한 미녀가 여러 병사들을 대동한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를 휘감는다는 뱀, 요르문간드와 죽은 망자들을 다스린다는 여신, 헬이 나타난 것이다.

모두 펜리르의 아우들로서, 니플헤임을 다스린다고 알려진 존재들.

특히 그들 3남매의 막내인 헬은 죽음을 다스리는 사신(死神)이기도 해서 그런지, 연우를 보는 시선에선 색기가 가득했다.

『드디어, 드디어 저분을 만났어……! 우리의 별이신 분을. 이 몸은 지금 당장 여기서 눈을 감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답니다.』

『대체 무슨 망측한 소리를 하는 거냐. 진정해라, 헬. 지금은 너의 사리사욕을 채울 때가 아닐……!』

『저에겐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중요한 건 없거든요? 둘째 오라버니가 최애를 만난 제 심정을 알기나 하시나요? 덕통 사고를 당했던 그 순간부터 제 머릿속은 온통 우리 ### 님에 대한 생각만 가득하답니다.』

『최애는 무엇이고, 덕통 사고는 또 무엇이란 말이냐…… 대체 그런 하계의 이상한 단어들은 어떻게 알아 오는 건지.』

요르문간드와 헬이 서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동안.

[6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하늘 날개]

연우는 하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전의를 잔뜩 끌어올렸다. 크로노스의 신력을 가득 머금은 현자의 돌이 다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팟!

연우는 쇠사슬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공허를 타고 대지모신이 있는 공간으로 넘어갔다.

펜리르가 재빨리 그 뒤를 따르고, 니플헤임의 원군도 뒤따라 공 허를 건넜다.

『아앗! 저도! 저도 같이 가요!』

마지막으로 헬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세계의 이면(裏面)에 접속하였습니다.]

[이데아가 출현합니다.]

[‘세계수의 영역’에 입장하였습 니다.]

끝도 없이 높게 선 거대한 나무가 나타났다.

세계수 이그드라실.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법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나무는, 대지모신이 들러붙어 있어 절반 가까이가 썩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동맹군 ‘니플헤임’이 동맹, 플레이어 ###의 요청에 따라 전쟁을 개시합니다.]

[대상자는 올림포스의 대지모신입니다.]

크와앙!

펜리르는 대지모신을 보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허공을 박차 빠르게 세계수로 달려들었다. 그전에 당한 수치를 어떻게든 앙갚음하겠다는 듯, 얼굴에는 분노가 잔뜩 담겨 있어 대가리를 치켜세울 때마다 거친 숨결이 녀석에게로 작렬했다.

요르문간드도 빠르게 세계수를 타고 움직이면서 대지모신을 집어삼키고자 하고, 하늘에서는 헬이 니플헤임의 군단을 진두지휘 하면서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여러 이펙트가 현란하게 터져 나가는 가운데.

모. 두. 죽. 일.

과녁이 되다시피 한 대지모신은 하늘을 보면서 잔뜩 격노를 토해 냈다. 과거, 탑에 닫히기 전에 그 들에게 당했던 때가 떠오르는 듯, 터지는 분노는 매우 거셌다.

대지모신의 의지에 따라, 썩은 뿌리들이 잔뜩 일어나면서 니플헤임의 군단을 사냥하러 움직였다. 물리 법칙이 잔뜩 비틀리면서 하늘을 따라 온갖 불덩이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녀석의 그런 맹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용신안]

[화안금정]

[검은 구비타라 - 현자의 눈]

연우가 황금색으로 물든 용의 눈으로 대지모신을 빠르게 훑고는.

[시차 괴리]

현저히 빨라진 의식 세계 속에서 대지모신의 약점, ‘결(缺)’을 최대한 많이 찾고자 했다.

다행히 비에라 듄에게서 얻어 낸 정보들이 상당하기에 그만큼 많은 결을 인식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고.

[검뢰팔극]

연우는 흑백으로 점철된 시야에 잡힌 여러 선들을 따라, 비그리드를 쥔 그대로 의념 절기를 있는 힘껏 터뜨렸다.

콰르르릉!

수도 없이 내려쳐진 검뢰가 잇달아 대지모신의 몸뚱이 위를 가르면서 팔다리를 차례로 잘라 내고, 다섯 동강 난 머리통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대지모신이 지르는 비명이 이데아의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끼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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