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대지모신(大地母神) (4)
쿵!
대지모신의 몸뚱이가 떨어진 자리에서는 그런 소리가 났다. 멀리서 봤을 때는 아주 굵직한 나뭇가지가 무더기로 떨어진 듯한 모습.
하지만 그것은 식물이 아닌 동물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츠츠츠-
그때, 지면에 넓게 깔린 그림자에서 망자 거인을 비롯한 사룡, 그리고 부-파우스트를 비롯한 디스 플루토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콰쾅!
일제히 대지모신에게 와락 달려 들면서 마구잡이로 거대한 몸뚱이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크로노스의 신력을 가득 머금은 덕분에 진짜 ‘죽음의 군단’으로 거듭난 그들은 악랄한 손속을 자랑했다.
그 거대한 대지모신이……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었다.
[동맹군, ‘니플헤임’이 플레이어 ###의 활약에 다시 탄성을 터뜨립니다!]
연우와 함께 대지모신을 열심히 사냥하던 니플헤임은 이를 놀랍다는 듯 바라보았다.
[요르문간드가 자신들도 질 수 없다고 형제들에게 항의합니다.]
[헬이 당연히 그러노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소중하신 분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드릴 수는 없다고 답변합니다.]
[펜리르가 ‘니플헤임’의 군병들에게 뭘 하느냐면서 윽박을 지릅니다!]
[‘니플헤임’의 수장, 로키가 천계에서 동맹군의 활약상을 흐뭇하게 지켜봅니다.]
펜리르 3남매는 연우의 권속들이 보이는 활약상에 질 수 없다는 듯, 펜리르를 필두로 다시금 폭격을 개시했으니.
끼아아아!
공세가 거듭될수록 대지모신은 더더욱 비명을 질러 댔다.
생각보다 승리가 빠르게 목전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방심하지 마라, 아들아.』
그때, 크로노스가 연우에게 경고하듯 주의를 주었다.
『비록 세계수에서 강제로 떼어 내면서 많은 타격을 주었다지만, 그래도 대지모신은 대지모신이다. 네가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진즉에 나나 우리 꼰대가 잡았겠지. 아니면 다른 사회에서 해낸 놈들이 있거나.』
우라노스와 크로노스를 이어 올림포스가 전 우주에 명성을 떨쳤다지만, 올림포스에 못지않은 사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황’에 근접했다던 크로노스와 견줄 수 있을 존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당장 말라흐의 메타트론이나, 르 인페르날의 바알만 해도 크로노스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저 독한 것이 이렇게 쉽게 끝낼 리 없다. 바퀴벌레 같은 놈…… 아니, 년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어떻게든 일어날 거다. 특히 영혼석으로 프로세싱도 마쳤다면서? 다시 일어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저건 세계수의 성질까지 띠고 있다. 웬만해서는 끄떡도 없겠지. 그나저나…… 저만큼이나 강제로 잘라 냈으니, 당분간 망가진 법칙 때문에 현세에 혼란이 많겠는걸. 수복하려면 시간도 제법 걸릴 테고. 흠. 어쩐다……?』
그렇게 크로노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연우에게 경고를 하는데.
‘아버지.’
『왜?』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
잠시간 두 부자 사이로 흐르는 침묵.
그리고.
『…아들아, 꼭 말을 그딴 식으로 싸가지 없게 해야겠니?』
‘예. 재밌잖습니까?’
『이 개새끼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셀프 패드립입니다만.’
『이 미친놈이……!』
크로노스는 이제 아버지를 아예 갖고 놀려고 하는 아들 녀석이 어이가 없었지만, 곧 이어지는 연우의 말에 다시 시야를 대지모신 쪽으로 돌려야 했다.
“시작되려는 거 같습니다.”
『……하여간 이따 두고 보자꾸나.』
끼아아아!
낱낱이 해체되어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듯하던 대지모신이 거친 귀곡성을 터뜨리더니, 괴상한 형체로 잔뜩 뭉쳐서는 사방으로 몸을 급격하게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세포 덩어리가 움직이는 듯한 끔찍한 광경. 독기와 악취마저 풀풀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니플헤임에게는 아주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다. 그들이 탑에 갇히기 이전, 고대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는 대지모신의 진짜 형태였으니까. 지금까지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는 게 오히려 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렇기에 행동은 즉각적이었다.
『전원 후퇴!』
대지모신의 독기는 그녀의 신력을 잔뜩 담고 있는바. 자칫 잘못 노출되었다가는 대지모신의 신력에 신성이 오염될 위험이 컸다. 그런 경우에는 대지모신의 ‘식사 거리’가 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그건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후퇴는 아주 빨랐다.
그걸 보고 있던 연우의 권속들도 재빨리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 가운데.
독가스를 마구 분출하던 거대 세포 덩어리가 이번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크기를 확 줄이는 게 아닌가.
연우는 용신안을 통해 변화의 중심에 영혼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흑백으로 일그러진 결들 사이로, 유일하게 영혼석만이 시린 빛을 토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행동은 즉각적이었다.
연우는 하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단번에 공간을 이동, 영혼석이 있는 부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순간, 세포 덩어리를 보호하고 있던 독가스가 연우를 질식시키기 위해 체내로 들이닥쳤다.
히드라의 독. 시케우스가 아테나를 잡으려 할 때 사용했던 극독. 대신격마저 거꾸러뜨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독(神毒)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물질이 체내에 침투되었습니다!]
[‘상태 이상: 중독’이 되었습니다.]
[체내의 기능이 현저히 저하됩니다.]
……
[스킬 ‘무채독’의 효과로 인해 중독 증상이 중단됩니다.]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흡수된 ‘히드라의 독’에 대한 성분 검사를 실시합니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
[‘무채독’의 성질에 ‘히드라의 독’이 추가되었습니다!]
[‘무채독’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무채독 스킬 덕분에 독기는 얼마 침투하지 못하고 도중에 힘을 잃고 말았다.
도리어 연우는 훨씬 강화된 무채독을 검뢰에 실어서 터뜨릴 수 있었다.
콰르르릉!
순식간에 타 버린 세포 덩어리가 통째로 터져 나갔다. 이전보다 훨씬 더 섬뜩한 귀곡성이 들려오는 사이, 연우의 시선은 찢긴 덩어리 안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두근.
두근.
그것은 수많은 혈관과 장기 따위에 엉켜 진짜 심장처럼 크게 맥박치고 있었다.
동시에 연우의 죄악석도 똑같이 떨리면서 호응했다.
자석이 서로를 끌어들이듯이, 하나로 합치고자 하는 공명이 느껴졌다.
색욕의 돌.
연우가 그것을 낚아채기 위해 손을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는데.
이. 제. 는.
네. 멋. 대. 로. 못. 한. 다.
별안간 영혼석 옆쪽으로 비에라 듄을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냉막한 인상을 자랑하는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마치 석고상처럼 온통 회색으로 되어 있어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
대지모신의 화신체. 그것이 거칠게 손을 뿌렸다.
콰아앙!
연우는 색욕의 돌을 낚아채지 못한 채로, 하늘 날개를 안쪽으로 감아 녀석의 손짓을 막았다.
하지만 모든 충격을 덜어 내지는 못해, 몸뚱이가 허공으로 크게 튕겨 오르고 말았다.
그사이.
대지모신의 화신체는 색욕의 돌을 한입에 삼키고 마지막 변화를 마치고 있었다.
츠츠츠-
석고상 같았던 화신체의 피부가 살구색을 띠기 시작하면서 진짜 육체로 거듭났다.
비에라 듄이라는 쓸모없어진 부위를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쳤던 것처럼, 이번에도 손상되거나 불필요해진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영혼석을 중심으로 필요 부위만 남겨 사람의 형상을 갖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변태(變態)라고도 할 수 있는 광경.
여태 개념적인 존재로만 머물던 그녀가 드디어 현실적인 육체를 갖게 된 것이지만.
대지모신의 얼굴에는 탐탁지 않다는 듯 언짢은 감정만 잔뜩 어려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세계수를 전부 삼키고, 비에라 듄에서 비롯된 자아를 더 또렷하게 만들어 완벽한 전지전능의 신으로 거듭나려 했으나, 지금 이 모습은 사실상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세계수를 일부 흡수하면서 개념적인 부분을 최대한 많이 호환할 수 있었다지만, 그래도 원하던 전지전능은 획득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으니.
당연히 그런 분노는 매번 방해만 일삼는 연우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쾅!
『찢어 죽여 주마!』
대지모신은 어느새 등 쪽에 달린 잿빛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연우에게로 쇄도했다.
존재가 영혼석을 통해 정제(精製)되었기 때문인지 의식도 자아를 갖춘 것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녀석의 움직임을 읽은 연우는 비그리드를 위로 쳐올리면서 도중에 접근을 차단했다.
콰아앙!
연우는 비그리드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에 인상을 살짝 찡그리면서도, 크게 아랑곳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비그리드를 펼쳤다. 칼날에서 삐져나온 검뢰가 번뜩일 때마다 공간이 마구잡이로 찢겨 나갔다.
콰릉, 콰릉, 콰르릉-
콰르르르!
웬만한 신격쯤은 가볍게 찢어 낼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변태를 마친 대지모신도 절대 만만치는 않아, 검뢰는 튀어 오르는 족족 녀석의 손길에 무효화되고 말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연우를 앞서는 면도 있었다.
애당초 대지모신은 태곳적부터 살아왔던 존재가 아닌가. 당연히 이런 초월적인 싸움에서는 몇 수 위일 수밖에 없었다.
오른손을 활짝 펼치면서 무언가 권능을 드러낸다 싶어 그쪽으로 칼날을 돌리려 하면,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왼쪽 아래에서 섬전이 터져 나오면서 빛줄기가 연우를 집어삼키려 했다.
어떻게 쇠사슬로 녀석의 한쪽 다리를 포박해 움직임을 구속해 날개를 잘랐다 싶으면, 오히려 잘린 부위들이 날카로운 칼바람이 되어 복부를 쓸어 오는 등의 형태였다.
이곳의 법칙이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심상 개변]
일찍이 연우가 마해에서 네시와 다투면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물론, 질적으로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당시에는 녀석이 구성한 심상 세계에서 실재와 환상을 서로 호환하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정말 법칙을 비틀어 제 입맛대로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으니.
대지모신이 태곳적부터 쌓아 온 신력, 영혼석의 마력, 그리고 그동안 크로노스의 사체에서 채취한 시정까지.
그 잡다한 것들이 전부 뒤섞였으니 혼잡할 법도 하건만, 대지모신의 핵이 된 영혼석은 그 모든 것들을 너무 순조롭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콰쾅! 쾅!
그래도 다행이라면, 권능적인 부분에서는 연우가 모자랄지 모르지만, 물리적인 충돌에서는 오히려 그가 우위라는 점이었다.
그에게는 여태껏 탑을 오르면서 ‘투쟁’이라는 신위에다 차곡차곡 쌓은 업과 그동안 정리했던 무론(武論)이 있었고.
크로노스가 비그리드를 통해 전해 준 신화도 있었기에 ‘초월적인 존재들의 싸움’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감을 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좌측. 그리고 우측 측면.』
『……무효화가 벌어질 거다.』
『……그럴 땐 무채독으로 안개를 형성해서 뒤로 빠져.』
적재적소에서 크로노스가 도움을 주었기에, 대지모신의 움직임을 간파하기가 훨씬 쉬웠다.
결국.
대지모신은 연우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 한껏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녀석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신력이 주는 파장이 얼마나 강한지, 그녀의 분기가 치솟으면서 주변 공간도 이리저리 굴곡될 정도였다.
그녀는 연우를 잡을 수 없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챈 눈치였다.
『네놈의 아비부터 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가 아주 지긋지긋하게 내 발목을 붙잡는구나. 네가 그러고도, 그러고도……!』
그 순간.
연우가 쥐고 있던 비그리드가 여러 조각으로 나눠진다 싶더니, 다른 형태로 조립되면서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어느새 옆에는 크로노스가 나타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대지모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도 일부 담겨 있었다.
『……가이아.』
대지모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못난 것. 내가 이러려 너를 낳은 줄 알았더냐? 패륜아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