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89화 (589/862)

14화. 대지모신(大地母神) (5)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와 화해하고 같이 전장에 선 ### 님이라니…… 저런 모습도 멋져!』

헬은 저 멀리 대지모신의 화신체를 맞닥뜨린 연우와 어느새 현신을 마친 크로노스를 보면서 황홀해하고 있었다.

마치 자다가 갓 일어난 사람처럼 입가엔 침도 살짝 흘러내렸으니.

『헤헤헤.』

니플헤임의 도도한 막내 공주를 알고 있는 천계 주민들이라면 모두 놀랄 만한 모습.

『헬!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다른 놈들 고생하고 있는 게 보이질 않는 거냐?』

요르문간드는 그런 막냇동생을 보면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가뜩이나 계속 쏟아지는 마물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인데, 도움이 될 거라고 데려온 녀석은 정신이 딴 데 팔려서는 헬렐레하고 있으니 원.

대지모신이 허물을 벗어 던진 자리. 축 늘어진 세포 덩어리는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서 세포 분열이 일어났다. 세포들이 연신 꿈틀거리면서 마치 ‘알’처럼 안쪽에서부터 온갖 기괴한 모양을 자랑하는 마물들을 쏟아 냈던 것이다.

원래 대지모신이 가진 권능 중 하나는 생산(生産).

바로, 낳는 것이었다.

천계를 이루는 대신격 중 상당수를 그녀가 직접 낳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분명 그녀가 잉태한 존재들은 뛰어난 자질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잉태한 대다수가 제대로 된 지능이나 형체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대지모신이 필요에 따라 낳기만 하다 보니, 그저 닥치는 대로 부수거나 먹는 등 원초적인 본능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것들도 그랬다.

심지어 이전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동안 세계수의 양분을 얼마나 많이 빨아들인 건지, 개체 수가 이전에 비해 훨씬 많은 데다가 그 하나하나가 가진 위험성도 아주 컸다.

연우의 권속들도 함께 싸우고 있다지만, ‘알집’인 세포 덩어리를 지우지 않는 한 도저히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둘째 오라버니.』

『왜!』

『저 같은 미천한 것이 저런 분과 함께해도 되는 걸까요? ### 님이 내뿜으시는 아우라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되는……!』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야!』

요르문간드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봤자 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제가 도와드린다면, ### 님도 저를 자각하시어서 특유의 고고하면서도 깊은 속정 어린 말투로 저를 칭찬하실 것이고……. 그런다면 이 헬은 죽어욧!』

『…….』

츄릅.

요르문간드는 어느새 입가를 타고 흐르는 군침을 닦는 헬을 보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고개를 돌린 곳에는.

왕!

펜리르가 열심히 허공을 박차고 다니면서 마물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면 아주 위용에 찬 모습이었지만.

요르문간드는 펜리르가 멋진 활약상을 펼치면서도, 이따금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연우 쪽을 힐끔힐끔 곁눈질한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가 그쪽으로 신경을 조금도 써 주지 않으니, 꼬리가 살짝 아래로 늘어졌는데…… 이것도 참 기가 찰 뿐이었다.

아니, 그보다 원하면 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양반이 왜 자꾸 ‘왕’이나 ‘멍’으로 말을 다 통일하는 거야?

『아버지.』

그래서 요르문간드는 정말 진지하게 하늘을 보면서 물었다.

[‘니플헤임’의 수장, 로키가 전장에 두던 시선을 둘째 아들 쪽으로 돌립니다.]

[‘니플헤임’의 수장, 로키가 왜 그러냐며 묻습니다.]

『우리 이대로 계속 있어도…… 괜찮을까요?』

[‘니플헤임’의 수장, 로키가 쓰게 웃습니다.]

[‘니플헤임’의 수장, 로키가 어쩌겠냐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쉽니다.]

다행히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셨는지 씁쓸하게 웃는 것 같기는 했지만.

‘잠깐.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과거에 성별을 자유자재로 바꿔 가면서 여기저기에다 사고를 치고 다니지 않으셨었나……?’

혹시 이건 단순히 펜리르와 헬만의 문제가 아니라, 니플헤임 전체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요르문간드는 저절로 우울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 * *

내가 왜 너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대지모신이 불쑥 던진 질문에.

『…….』

크로노스는 아주 잠깐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연우는 그런 크로노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신화가 우라노스……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건,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나?’

연우는 크로노스가 대지모신의 자식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엿보았던 신화 속에서 우라노스가 했던 말이 있었으니까.

-가이아, 너를 잉태한 어미라고 뻔뻔한 낯짝을 하고 있는 대지모신은 날이 갈수록 괴상한 것들을 쏟아 내면서 호시탐탐 우리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또 어디 그뿐이냐!

하지만 대지모신에 대한 크로노스의 복잡한 마음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던 모양이다.

사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그런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크로노스는 우라노스 외에 ‘진짜’ 가족들에 대해서는 여태 일언 반구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체험한 크로노스의 신화는 우라노스의 막내아들이 되었을 시점부터 시작했었다.

사실 그때는 신화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왜 하필 ‘그 시점’에서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깊게 고찰하지 못했다.

정말로 크로노스라는 신화를 제대로 리플레이할 것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비추어야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아마 무의식중에라도, 크로노스가 절대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기 때문이리라.

두 번 다시는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크로노스의 신화 중 유아 시절의 기록이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화아악!

연우는 아주 잠깐이나마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찾아오는 백일몽을 볼 수 있었다.

-엄마……? 엄마!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수많은 마물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울며불며 대지모신을 애타게 찾는 모습.

-너는…… 그래. 아주 탐이 나는.

-군침이 도는. 그런.

-그런 육체를. 갖고 있구나.

-칠흑이 좋아할 만한.

대지모신은 그런 크로노스가 어떻게 자신에게서 태어났는지 궁금해하면서도, 이 돌연변이를 이용해 먹을 생각에 잔뜩 들떠 있기만 했다.

크로노스의 정신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피폐해지고, 기계처럼 딱딱해져만 갔다.

-엄마가…… 엄마가 곧 오실 거야. 곧…….

수많은 신들과 다툰 뒤, 대지모신은 말없이 훌쩍 떠나고 말았다.

크로노스는 자신이 버림받았단 사실도 모른 채, 하염없이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썩어 가는 마물들의 시체 더미 속에서. 악취와 구더기가 들끓는 그 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이런 아이가……? 이런. 뭘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했나 보구나. 안 되겠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그렇게 차차 야위어 가던 크로노스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손을 뻗어 준 존재가 바로…… 우라노스였다.

-아저씬…… 누구예요?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

-이제부터는 내가 네 아빠다.

-아…… 빠?

콰아앙!

연우는 바로 그 순간 백일몽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환상이 사라지고, 어느덧 현실이 찾아와 있었다.

그리고.

크로노스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 본 건 아니지?』

연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살짝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 빠?”

『너 이 새끼…….』

“아저씬 누구예요?”

『얌마! 그만해!』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는데.”

『이게 뒈지려고!』

“엄마가, 엄마가 곧 오실 거야.”

연우는 정말 자신이 크로노스라도 된 것처럼 몸을 오들오들 떠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크로노스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뒈져라, 이 새끼야!』

연우는 크로노스가 어느새 다시 비그리드로 변해서 미간으로 날아오려는 걸, 재빨리 몸을 틀어 피했다.

“존속 살해입니다만, 이건?”

『제 아버지 사체를 먹은 놈도 있는데, 뭔 상관이야!』

크로노스는 자신의 흑역사를 들춘 아들 녀석의 멱을 지금 당장 따 버리겠다는 기세로 길길이 날뛰었다.

쐐애애액!

“그런데 아버지.”

『뭐, 새꺄!』

“그거 아십니까? 지금 시스템 상으로는 아버지가 제 권속이라는 거?”

연우는 검은 쇠사슬을 냅다 잡아당겼다. 그러자 연우를 공격하던 비그리드가 그대로 딸려 와서는 너무 쉽게 연우의 왼손에 잡혀 들었다.

웅, 우우웅!

『으아아! 이 거지 같은 놈!』

비그리드가 거칠게 떨리면서 어떻게든 연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의 말마따나 권속으로 지정된 이상 크로노스는 절대 연우를 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크로노스는 한참이나 방방 날뛴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분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은 건지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으으…… 이 새끼, 진짜……!』

“이제 진정이 좀 되십니까?”

『되겠냐!』

“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빌어먹을 놈. 어째 한 마디를 안 지지.』

크로노스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다,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설마 내가 옛정에 휘말릴 거라고 생각한 거냐?』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로노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라. 이 아비가 아무리 못났다고 한들, 소중한 막내아들을 잡아먹은 저딴 괴물을 어머니로 생각할 리 없지 않느냐.』

비그리드의 칼끝이 다시 대지모신으로 향했다.

『낳았다고 해서 다 부모가 되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품어야 부모가 되는 거지.』

[죽음의 태엽이 작동합니다.]

『그러니까.』

쩌어어엉!

비그리드가 맑은 소리를 냈다.

『저년, 죽여.』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연우는 이 순간, 새로운 합일(合一)이 이뤄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성과 합일을 이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의식만 무한하게 확장해서 다른 뭔가에 끌려가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강했었다면.

지금은 의식이 확장했어도, 그 모든 것의 주체는 바로 연우 그 자체였다.

따스한 무언가가 자신을 품어 주는 것만 같았다.

아니, 든든한 무언가가 등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연우는 더 안정된 마음가짐으로 싸움에 임할 수 있었다. 크로노스가 이뤘던 모든 신화들이 완전히 소화되어 그의 체내를 빠르게 감돌고 있었다.

[크로노스의 신화가 완전연소(完全燃燒)되어 죽음의 태엽이 빨라집니다.]

[‘비그리드’의 격이 좀 더 또렷해집니다.]

팟!

연우는 다시 대지모신의 앞에 나타나면서 비그리드를 맹렬하게 휘둘렀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검뢰가 하늘과 대지 사이에 기둥을 놓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섯 번의 칼질.

검뢰오극.

미후왕의 허물도 어렵게 개척할 수 있었다던 경지가 자유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제 어미를 이런 식으로 홀대하다니. 하긴. 그러니 그딴 꼴이 되고 만 것이겠지!』

대지모신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심상 개변이 작동하면서 녀석을 관통해야 할 검뢰가 굴절되어 애꿎은 지면을 허망하게 때렸다.

『그딴 꼴? 왜? 지금 내 꼬락서니가 어때서 그러신가, 어머니?』

『몰라서 묻느냐? 신왕에까지 올랐다는 녀석이! 고작 검 따위가 되어서 아들 녀석에게 휘둘러지는 꼴이라니……!』

『미안하지만.』

크로노스는 분개하는 대지모신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미치광이처럼 날뛰던 그때보다, 아들을 지켜 줄 수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한데 말이야. 어쩌지?』

그 순간, 비그리드가 다시 한 번 더 빛무리를 터뜨렸다.

여태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육극(六極)이었다.

그리고.

푸화악!

대지모신의 잘린 날개가 허공으로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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