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대지모신(大地母神) (6)
『그래도 우리 어머니, 어떻게 피는 아직 붉은색이네? 나는 여태 징그러운 녹색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크로노스가 속 시원하다는 듯 히죽거리면서 웃었다.
하지만 정작 대지모신은 그런 비웃음에도 대꾸하질 못했다. 잘린 날개 부위를 보고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녀의 상식으로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심상 개변이 불발되었던 것이다.
분명히 ‘날개가 잘렸다’는 사건이 뒤집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거나, 연우가 반격을 당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뭘 그렇게 놀라나, 우리 어머니?』
그때, 비그리드 너머로 크로노스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손주 녀석을 사도로 삼으셨으면 그 정도 애교는 즐겁게 받아 주셔야지!』
『설마……!』
대지모신은 그제야 연우가 무슨 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현재 그들은 사도 맹약으로 이어져 있는 상태.
대지모신은 바라지 않았다지만, 둘 사이에는 채널링이 직접적으로 놓여 있다. 그래서 대지모신이 있는 이데아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데 연우는 더 나아가 이것을 통해 대지모신의 의사 결정에 훼방을 놓기까지 했다.
심상 개변은 주체의 ‘의지’로 일어나는 것. 그렇다면 사도가 이 ‘의지’에 개입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의념을 한 줌이라도 불어넣어 ‘의지’가 제대로 구현되는 데 조금이라도 방해를 줄 수가 있다면, 심상 개변은 불발되고 만다.
법칙이 유동되기도 전에 취소되기 때문이었다.
생각으로는 너무 쉬운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대지모신은 개념신. ‘의지’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는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뛰어나다.
그런데 이런 것에 간섭한다고?
아무리 채널링을 이용한다고 해도?
『어머니, 당신의 손주 말입니다. 재주가 좋지요? 어떻게든 대갈빡 굴려서 부족하던 재능으로도 이만큼 쟁취해 낸 녀석인데, 그만한 건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죠. 아, 물론,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아주 대단한 존재여서 옆에서 도와주는 것도 한몫하겠습니다만. 허허허!』
『네놈, 정녕 하인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냐……!』
대지모신은 깐족대는 크로노스의 모습에 속이 끓으면서도, 분노보다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크로노스는 지금 연우의 보조장치 역할을 맡아 주고 있었다. 연우의 의식 세계를 무한하게 확장시켜 주고, 모든 마력이며 신화가 온전히 그에게 흐를 수 있도록 도왔다.
마성이 하는 것과 똑같은 역할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마성은 주체를 키워서 언젠가는 연우를 잡아먹을 생각이라면, 크로노스는 그런 게 전혀 없이 무조건적으로 돕는다는 점이었다.
오로지 부자지간이니 가능한 모습. 두 아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적이 있었던 크로노스였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아들이 마음껏 빛날 수 있다면, 충분히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대지모신에게는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모든 신격들의 정점에 닿았다고까지 평가받는 녀석이. 온 우주가 자신의 것인 듯 오만하게 굴던 녀석이. 그리하여 타르타로스로 떨어져 복수심만 불태우던 녀석이 지금은 너무나 따스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으니까.
대체.
대체 부자간의 정(情)이 무엇이건대?
평생을 서먹하게 살았고, 갈등만 일으키던 저들 두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이리도 너무 당연하다는 듯 서로의 등을 기대고 있는 것일까.
『말했잖아, 어머니?』
크로노스가 히죽거렸다.
『난 그 어떤 때보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아들을 지켜 줄 수 있는 바로 지금.』
쐐애액-
연우가 다시 움직였다.
대지모신이 흠칫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 많은 자식들을 낳고도, 그들에게 애정이란 것을 단 한 번도 주지 못했던 당신이 대체 뭘 알 수 있을까? 과연 이해나 할 수 있을까? 그들을 제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았던 당신이?』
대지모신은 얼마 움직이지 못했다. 공간을 열어 줄 날개가 잘리고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깐 흠칫거린 사이, 연우가 어느새 목전에 나타나 비그리드를 휘둘렀다.
『당신과 다를 바가 없는 내가 이렇게 말하기에는 조금 낯 간지럽긴 하지만 말이야. 부모란 건 단순히 낳기만 한다고 해서 부모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대지모신은 머리를 옆으로 틀었다. 검광(劍光)이 왼쪽 뺨을 크게 가르고 지나갔다.
그때, 사각지대에서 공허가 열리면서 검은 쇠사슬이 튀어나왔다.
『애정을 주고, 관심을 갖고, 신뢰를 보여야만 하는데. 당신은 여태 어떻게 했었지?』
콰직!
쇠사슬은 단숨에 대지모신의 왼쪽 손목에 꽂히더니, 팔목을 따라 크게 똬리를 틀었다.
촤르륵-
『그저 당신의 욕망을 강요했을 뿐이지. 당신이 이루지 못한 걸, 당신이 죽어서도 이루고 싶은 걸, 자식들을 통해서 대리 만족하고 싶었을 뿐이야.』
대지모신은 당혹해하며 어떻게든 쇠사슬을 털어 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결박은 더 심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연우가 뭘 노리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봉신!
아니, 정확하게는 쇠사슬로 칭칭 감아 공허에다 처박으려 하고 있었다.
『애정 대신에 강요를, 관심 대신에 강박을, 신뢰 대신에 구속을 주었을 뿐인데. 그래서야 그걸 두고, 사랑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냥 학대했을 뿐이지.』
개념적인 존재인 그녀에게 신살은 통하지 않는다. 크로노스가 잘하는 ‘죽음’의 개념을 씌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지모신은 몇 번이고 신들에게 패배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일어나 다시 기승을 부릴 수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애당초 그렇게 할 수 없도록 공허 깊숙한 곳에다 처박아 꿈쩍도 못 하게 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전 같았으면 그게 무슨 헛짓거리냐고 코웃음을 쳤겠지만.
연우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칠흑왕마저 가둔 저 쇠사슬이, 그 파편에서 태어난 대지모신을 잡아내지 못할까?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아나?』
대지모신은 연우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여러 차례 심상 개변을 일으켰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
계속 불발되고 있었다.
그녀는 짜증이 났다. 그리고 초조해졌다.
모든 것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특히 저 나불거리기만 하는 크로노스!
『원망만 남을 뿐이야. 증오만 끓을 뿐이고.』
하지만 크로노스는 당신의 마음 따윈 아주 잘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고.
『당신이 그동안 숱하게 낳았던 자식들을 떠올려 봐. 왜 그들이 당신의 관심을 거부하고, 나중에는 저들끼리 칼까지 들고 당신에게 적대했는지.』
도저히 끝이 보이질 않았다.
『물론, 어머니, 당신은 절대 생각지 않겠지. 당신의 눈에는 그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듯한 자식들이 가해자고, 자신은 오로지 상처 입은 가련한 피해자일 테니.』
그때, 다시 한번 더 연우와 충돌했다.
이번에도 심상 개변은 불발되고 말았다.
옆구리가 크게 베이면서 핏물이 튀었고, 목덜미에 쇠사슬이 처박혔다.
하지만 대지모신이라고 해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퍼억!
피륙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대지모신의 손날이 연우의 오른쪽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러니.』
그런데도 크로노스는 별달리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테지. 애당초 죽어서도 마음을 바꿀 생각 따윈 없을 테니까.』
대지모신의 얼굴이 다시 잔뜩 일그러졌다.
만능 복원으로 작동된 초재생이 연우의 상처를 빠르게 아물게끔 하고 있었다.
『불쌍한 어머니 같으니.』
그래서 연우는 크게 주저하는 기색 없이 쉴 새 없이 대지모신을 휘몰아쳤다.
검뢰가 번뜩일 때마다 대지모신의 몸뚱이 위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계속 겹겹이 쌓여 갔다. 달라붙는 쇠사슬의 숫자도 그만큼 부쩍 늘어났다.
하지만 대지모신이 연우에게 주는 피해도 비례해 늘어 갔다. 왼쪽 팔뚝이 날아가고, 심장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갈 만큼 큰 충격을 먹였다.
그래도 연우는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다. 팔 하나를 날리고 대지모신에게 쇠사슬을 하나라도 더 박을 수 있다면 그게 이득이었으니까.
날아간 부위야 다시 복원해 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어차피 대지모신을 공략할 방법은 아주 많았다. 채널링을 이용해 권능 발현에 방해를 주고, 비에라 듄이 말해 준 대로 약점을 찾아 공략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크로노스의 신화가 체화(體化)를 이룹니다.]
[수많은 영웅들의 업적이 당신의 영혼에 새겨집니다!]
[찬란한 영웅들의 찬송이 당신을 위해 울려 퍼집니다!]
연우는 죽음의 태엽이 감기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합일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잡고 숲속을 산책하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퍽!
비그리드가 대지모신의 복부를 관통했다.
『말도 안 되는……!』
『어머니를 관통하는 느낌, 그다지 좋지는 않은데…… 패륜도 이딴 패륜이 어디 있냐고. 이것 좀 어떻게 안 되냐, 아들아?』
“싫으면 모양을 바꾸시면 되지 않습니까.”
『정 없는 놈. 이런 걸 낳으려고 내가 미역국을 먹었나 자괴감이 들어…….』
“미역국은 어머니가 드셨죠.”
연우는 대지모신의 표정이 일그러지거나 말거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크로노스와 만담을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그러면서도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번들거리면서 대지모신을 관통하고 있었다.
녀석과의 채널링이, 끊어질 듯 말 듯 약해지고 있었다.
촤라라락!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듯, 또 다른 쇠사슬이 하나 더 튀어나와 대지모신의 등에 작렬했다.
영혼석이 위치한 심장 부근이었다.
연우의 손끝으로 무언가가 팽팽하게 조이는 느낌이 났다. 마치 낚싯대에 대어가 물리기라도 한 듯한 손맛.
쇠사슬이 영혼석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연우는 바로 이 영혼석을 강제로 뜯어 버릴 심산이었다.
지금 대지모신이 이렇게 정리된 사고와 계획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영혼석을 중심으로 의식 회로가 프로세싱되어 있기 때문이었으니. 이 주요 부품을 강제로 제거해 버린다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게 분명했다.
정제되지 않은 사념을 가진 채, 행동도 의지도 굼뜬, 그러면서 욕구만 가득한 탐욕 덩어리.
그때는 공허에다 처박는 것도 훨씬 순조롭겠지.
대지모신은 그런 연우의 생각을 알았는지, 발버둥 치듯이 손을 뻗어 연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목뼈를 돌리려는 듯이 강하게 힘을 주었지만, 그럴수록 비그리드도 더더욱 깊숙하게 녀석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힘겨루기는 너무 팽팽해서 어느 쪽이 이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쇠사슬이 더욱 안쪽으로 감기면서 영혼석을 강제로 뽑으려 했다.
[‘하데스의 식령검’이 발동합니다!]
[죄악석(오만·식탐)이 영혼석(색욕)을 발견, 흡수를 시도합니다.]
[죄악석(오만·식탐)이 영혼석(색욕)의 기운을 발견, 흡수를 시도합니다.]
[영혼석(색욕)이 죄악석(오만·식탐)을 거부합니다. 죄악석(오만·식탐)이 강제 병합을 시도합니다.]
현자의 돌은 하데스의 식령검을 이용해서 색욕의 돌을 강제로 집어삼키고자 했다. 두 개의 돌이 거칠게 떨리면서 공명을 일으키고, 마력이 서로 연결되면서 색욕의 돌에 담긴 마력을 강제로 끄집어내려던 그때.
『이대로, 내가 무너질 것…… 같으냐……?』
갑자기 대지모신이 입을 쫙 벌리더니, 입꼬리가 귓가까지 길게 찢어지면서 기괴한 비명 소리를 질렀다.
끼아아아악!
그 순간.
두근!
두근!
연우의 드래곤 하트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피가 너무 빠르게 돌면서 마력이 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설마……!』
연우는 폭주하는 마력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그보다 상태 이상이 더 빨랐다. 크로노스의 다급한 목소리도 도중에 끊기고 말았다.
그제야 연우는 이게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불멸이던 우라노스를 죽음으로 내몰고, 크로노스마저도 마성에 잠식되게 만들었던.
대지모신이 가진 최후의 패.
무언가가, 단숨에 목 언저리까지 치밀었다.
[‘가이아의 저주’가 당신을 잠식합니다!]
* * *
[‘가이아의 저주’가 발동하여 그동안 흡수되었던 여러 신화들이 꿈틀거립니다!]
[대지모신의 간절한 호소에 여러 신화들이 응답합니다.]
[‘티폰’의 신화가 호응합니다.]
[‘시케우스’의 신화가 호응합니다.]
……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호응합니다!]
[기저에 깔려 있던 ‘하데스’의 신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반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