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대지모신(大地母神) (7)
어린 페르세포네는 그대로 하데스를 따라나섰다. 도중에 데메테르가 상황을 눈치채고 찾아오기도 했지만.
『지금 누이가 벌인 일, 한 번 공론화를 해 볼까? 나야 다시 타르타로스에 처박히면 그만이지만…… 누이는 앞으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텐데?』
하데스가 차갑게 내뱉은 말에 데메테르는 더 이상 항변하지 못하고 길을 열어 줘야만 했다.
어린 페르세포네는 그때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무력한 어머니의 모습은 처음 본 것이었으니까. 여태껏 그녀에게 데메테르는 세상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처음 찾아온 타르타로스에서, 어린 페르세포네는 난생처음으로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좁은 방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되었다.
유리관에 갇혀서 자는 대신, 푹신한 침대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있어,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렇게나 즐거운 일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언제나 뭐든지 혼자서 알아서 해야만 했지만,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녀를 챙겨 주었다.
식사가 맛있었다. 하늘이 예뻤고, 노을이 아름다웠다. 공기가 시원했고, 땅을 디디는 감촉이 너무 즐거웠다. 세상에 있는 것 하나하나, 모든 것이 신비롭고 재미있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자신이 있는 여기 타르타로스보다 훨씬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페르세포네는 타르타로스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지루해졌다.
언제는 그토록 아름답고 신기하기만 하던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칙칙하고 우울하기만 했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 꼭 어린 시절 자신이 갇혀 있던 ‘감옥’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이곳은 진짜 감옥이 맞았다. 수많은 죄수들을 가둬 두기만 하는 감옥.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저 하데스의 권위에 충실한 이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페르세포네는 이런 답답한 타르타로스에서도 탈출하고 싶어졌다.
하늘, 바다, 초원, 사막, 숲, 별, 달…… 람이 언젠가 말해 준 바깥세상에 있다는 것들을 이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타르타로스의 제약은 그녀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고.
언제부턴가 페르세포네는 그런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혹시…… 어머니처럼 하데스도 거짓말로 나를 가둬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암귀.
의심은 그녀도 자각하지 못한 새 무럭무럭 자라나 흉중에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저런…… 이런 곳에 아주 불쌍한 아이가 있구나. 올림포스의 것들에게 속아, 새장 속에 갇히고 만 가녀린 파랑새가.』
그때, 대지모신이 찾아왔다.
가이아의 저주였다.
* * *
[‘냉혈’ 특성으로 이성을 유지합니다.]
[죽음의 태엽이 맹렬하게 가속하여 특성을 강화시킵니다.]
[죽음의 태엽이 한계 이상으로 감겨 과열됩니다. 이대로는 태엽이 마모될 우려가 있습니다.]
『아들아, 정신은? 정신은 좀 드느냐?』
연우는 귓가를 왱왱 울리는 크로노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
그저 의식을 겨우겨우 붙들어 놓으면서 상황 판단을 하는 게 전부였다.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고,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속마음으로도 가능할 크로노스와의 대화마저 버거울 지경이었다.
크로노스도 현재 어떻게든 가이아의 저주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격하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대지모신은 웃고 있었다.
『너는, 이제 죽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대지모신은 여전히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렇게 언제 영혼석이 뽑혀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이면서도, 웃고 있었다. 귓가까지 길게 쭉 찢어진 입이 금방이라도 연우를 집어삼킬 것처럼 굴었다.
아주 차갑게.
『호호호! 그래. 나는 이대로 공허에 갇힐지도 모르지. 여태껏 몇 번이나 되살아났던 것과 다르게, 이번엔 갇히는 것이니 다시 빠져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틀린 입술이 더욱 어그러졌다.
『너는 필시 죽을 것이다. 왜냐고? 내가 그리 만들 테니까. 우라노스처럼! 바로 거기 있는 크로노스처럼!』
대지모신의 눈가에는 광기가 잔뜩 맺혀 있었다. 혼자 당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잔뜩 묻어났다. 이대로 영혼석이 뽑히고 공허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하더라도, 네놈의 명줄만큼은 같이 끌고 가겠다는 듯이.
울컥!
연우는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억지로 삼켰지만, 입가를 따라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티폰’의 신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을 해한 플레이어 ###에 강한 적의를 띱니다.]
[‘시케우스’의 신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을 삼킨 플레이어 ###에가 강한 악의를 띱니다.]
[‘헬리오스’의 신화가 일어납니다. 크로노스를 돌려달라며 플레이어 ###에게 항의를 합니다.]
……
[여러 신화들이 ‘가이아의 저주’에 반응해 당신의 신화를 방해하고자 합니다.]
[강한 원념이 저주를 강화시킵니다!]
가이아의 저주가 가지는 효과는 아주 간단하다.
대상이 가진 ‘균형’을 흩뜨려 놓는 것.
잃을 것이 없는 일반 플레이어들에게는 그다지 출혈이 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초월을 이룬 신격들에게는 이보다 더 치명적인 저주가 없었다.
그들이 여태껏 이루고 쌓은 신화를 흩뜨려 놓는 것이니까.
물론, 신화를 직접 붕괴시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탄탄하게 쌓은 것들을 흔들어 ‘금’이 가게 하는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신화란 어떻게 단시간에 수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금’이 점차 커져 ‘균열’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균열이 신화를 전부 뒤덮어 그대로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인위적으로 타천이나 영락을 유도하는 것이어서, 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위험성도 커졌다.
끝내 무너지지는 않더라도 의식에 상당한 타격이 가서 계속해 끔찍한 고통을 안고 사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전자가 우라노스, 후자가 바로 크로노스였다.
올림포스의 왕들이 대를 이어서 고생한 것이다.
물론, 그만큼 대지모신도 자신의 모든 의념을 방사하는 것이라 한 번 발휘하고 나면 다시 힘을 채울 때까지 깊은 잠에 들어야만 했다. 일종의 자폭기(自爆技)인 것이다.
여태껏 ‘신살(神殺)’이라는 연우의 신화에 깊게 깔렸던 식령된 신들의 신화가 발버둥 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대지모신의 부름에 따라, 스스로를 자각하고 날뛰기 시작하니, 연우의 신화도 덩달아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부분 대지모신이 직접 낳은 기가스였다.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일어납니다.]
개중에는 대지모신의 사도였던 페르세포네의 신화도 있었으니.
페르세포네는 대지모신이 품었던 이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존재. 또한, 명계의 여왕이기도 했기 때문에 연우의 신화를 뒤흔들기엔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존재였다.
연우는 겨우 누르고 있던 가이아의 저주가 아주 조금씩 튀어 올라 의식 세계에 침범하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티폰’의 신화가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반깁니다.]
[‘시케우스’의 신화가 ‘페르세포네’의 신화에게 원수를 같이 갚을 것을 요구합니다.]
……
『나의 자식들아! 놈을 집어삼켜라! 놈을 너희들의 숙주로 삼아, 나를 이 쇠사슬에서부터 해방시켜 다오!』
대지모신은 희열에 가득 찬 목소리로 여러 신화들을 선동했다. 연우의 신화를 붕괴시켜 위험에서 빠져나오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다 하여도 동면은 피할 길이 없겠지만, 그래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연우에게는 두 개의 영혼석을 합친 죄악석이 있었다. 그것을 가로챈다면 동면 기간을 최대한 줄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침묵합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플레이어 ###의 시선을 빌어 대지모신을 바라봅니다.]
이상하게도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곧장 대지모신의 말에 따르질 않았다. 티폰이나 시케우스 같은 여러 기가스의 신화들이 독촉해도,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나의 딸아? 어서 그 간악한 것을 처치하여 이 어미를 구해 주지 않고!』
대지모신도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짐짓 얼굴을 굳히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과거의 신화를 되짚으며 대지모신에게 묻고자 합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하였었는지를 묻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티폰’의 신화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냐며 분개합니다.]
[‘시케우스’의 신화가 여왕이 미쳤다며 몰아낼 것을 선동합니다.]
……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반발하는 신화들을 힘으로 억압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식령이 이뤄지는 동안, 우연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신화를 되짚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어린 시절 대지모신으로부터 구명을 받아 딸이 되었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지난 모든 신화를 되짚어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자유를 얻었다는데, 정말 나는 대지모신의 딸로 살아가면서 자유로웠던 적이 있었나?’]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이어서 의문을 던졌습니다. ‘오히려 꼭두각시 인형으로 살아갔던 건 아닐까? 하데스가 날 인형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던 건 아닐까?’]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의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하늘, 땅, 숲, 강, 그런 것이었는데 본 적이 없잖아?’]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가진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
……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그만, 그만!』
대지모신은 연이어 쏟아지는 메시지를 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고 묻지 않았더냐!』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복잡한 의문을 누르고, 대지모신에게 묻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셨나요?’]
『당연한 소리! 이 어미만큼 너를 아낀 존재가 어디 있다 그러느냐! 네 친모는 너를 인형으로만 여겼고, 네 남편은 너를 새장 속 새로만 여겼다. 그 새장을 열어 준 것이 누구였지?』
대지모신은 흉악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최대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자애로운 얼굴.
언젠가 페르세포네가 처음 대지모신과 만났을 때 보았던 모습이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아주 잠깐 침묵합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대지모신에게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아시나요?’]
『그, 그게 무슨……?』
하지만 그런 대지모신의 표정은 얼마 가지 못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대지모신에게 연이어 질문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일까요?’]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대지모신에게 또 질문합니다. ‘제가 즐겨 보던 별자리는요?’]
『아, 아가.』
대지모신은 최대한 당혹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페르세포네를 타일렀다.
『아가야. 혹시 이 어미에게 서운한 것이 있던? 네가 이 간악한 아이에게 붙잡혔을 때, 이 어미가 너의 도와 달라는 간청을 못 들어서 그런 것이냐?』
그 목소리 역시 언젠가 처음 대지모신이 페르세포네를 찾았을 때, 내던 것과 똑같은 목소리였다.
페르세포네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어머니’ 상의 얼굴과 목소리.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포근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대지모신으로서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다른 기가스의 신화들은 모두 페르세포네의 신화에 묶여 옴짝 날싹하지 못하는 상태. 전혀 예사치도 못한 상황에 의해 가이아의 저주가 멈춘 것이다. 이대로는 연우를 거꾸러뜨릴 수 없다. 여기서 어떻게든 페르세포네를 설득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떤 말과 표정을 하여도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대지모신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그때였다.
[‘하데스’의 신화가 천천히 고개를 듭니다.]
여태껏 저 아래 깊숙한 곳에 잠잠하게만 있던 다른 신화가 일어났다.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하데스’의 신화를 보며 흠칫거립니다.]
[‘하데스’의 신화가 꽃차라고 대답합니다.]
[‘하데스’의 신화가 당신은 봄을 닮은 노란색을 아주 좋아했고, 자유를 원하며 그만큼 격정 어린 사랑을 좋아했기 때문에 오리온 자리를 가장 아꼈다고 말합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침묵합니다.]
[‘하데스’의 신화가 조용해진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보면서 말합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다오.’]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침묵합니다.]
……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하데스’의 신화를 보면서 말합니다. ‘미련한 사람 같으니…….’]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자신이 장악한 모든 신화들을 강제로 끌어냅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비롯한 여러 신화들이 잘게 부서져 흩어집니다.]
[‘가이아의 저주’가 불발되었습니다!]
그 순간.
“……컥!”
연우는 여태껏 목덜미를 강제로 옥죄던 무언가가 한순간 확 하고 흩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숨이 돌아왔다. 들끓던 마력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하게 잡혔다.
충격에 빠진 대지모신의 모습이 보였다.
『마, 말도 안 되는……!』
연우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지모신이 당혹해하는 이때가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왼손에 쥐고 있던 쇠사슬을 세게 잡아당겼다.
촤르륵!
대지모신이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고개를 아래로 돌렸지만, 그때는 이미 도르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팽팽해진 뒤였다.
쾅!
쇠사슬이 등가죽을 무참히 뜯으면서 영혼석을 강제로 뽑았다.
연우는 그쪽으로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큰형이라 할 수 있는 하데스가 만들어 준 기회였다.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하데스의 식령검’이 영혼석(색욕)을 삼키고자 합니다!]
[죄악석(오만·식탐)이 영혼석(색욕)에 대한 강제 병합을 시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