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92화 (592/862)

17화. 대지모신(大地母神) (8)

[대지모신이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영혼석(색욕)이 죄악석(오만·식탐)의 병합을 강하게 반발합니다.]

『안 된다. 이것만큼은……!』

대지모신은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저항하려 했지만.

[불발된 ‘가이아의 저주’가 새로운 대상자로 시전자를 지목하였습니다!]

[대지모신이 ‘가이아의 저주’에 잠식됩니다.]

『크, 크아아악……!』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뒤였다.

[죄악석(오만·식탐)이 ‘하데스의 식령검’의 기능을 향상시킵니다.]

[강제 병합에 성공하였습니다!]

[죄악석(오만·식탐·색욕)이 세 가지 성질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여태껏 단단히 잠겨 있던 죄악석의 봉인이 일부 해제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죄악(Cardinal Sins)으로서의 성질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죄악의 성질들을 이제부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죄악의 성질들로부터 여러 가호가 더해집니다!]

……

[‘오만’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입니다. 이제부터 신이나 악마 같은 초월자부터 플레이어 같은 필멸자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섭리부터 바닥에 뒹구는 돌멩이 같은 무생물까지, 만물이 당신의 시선 아래에 있을 것입니다.]

[‘식탐’은 모든 것을 삼키고자 하는 힘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아무리 마셔도 절대 풀리지 않는 갈증은 당신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 끝끝내 더더욱 높은 세계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색욕’은 모든 것으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힘입니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도, 당신에게 적개심을 띠고 있는 존재까지도 당신을 의식하고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

[죄악의 세 가지 성질이 용의 인자에 새겨집니다.]

[죄악의 세 가지 성질이 마의 인자에 새겨집니다.]

[죄악의 세 가지 성질이 신의 인자에 새겨집니다.]

[죄악의 세 가지 성질이 거인의 인자에 새겨집니다.]

……

[현재 영혼이 완숙(完熟)의 단계에 다다라, 성장치의 한계에 봉착하였습니다. 더 큰 성장을 위해서는 ‘탈각’과 ‘초월’을 시도할 것을 권고합니다.]

[인자 변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근골 변화에 실패하였습니다.]

……

[실패한 변화의 시도가 모두 ‘잠재치(潛在値)’로 전환되었습니다.]

……

[마력량의 최대치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죄악석이 영혼석을 집어삼키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는 순간.

연우를 따라 흘러나오던 마력장(魔力場)이 여태껏 보이던 것과 다른 느낌을 풍기기 시작했다.

강렬해지거나, 더 난폭해지거나 하는 것처럼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고, 영혼을 서늘하게 만들며,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시선을 고정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연합군, ‘아스가르드’가 당신에게 던진 선전 포고를 전면 재검토합니다!]

[중립, ‘데바’가 경악합니다!]

[중립, ‘딜문’이 침묵합니다!]

……

[중립, ‘절교’가 당신이 지닌 죄악석에 강한 반응을 보입니다!]

……

[신의 사회, ‘말라흐’가 당신에게 죄악의 성질은 그리 이롭지 못하다며, 이 이상 루시엘의 전철을 따르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당신이 보유한 죄악에 강한 관심을 보입니다.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끔찍한 혼종이었는데. 이제는 훨씬 더 심각한 혼종이 되었구나. 파하하!』

크로노스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며 크게 웃어 댔다.

그는 그동안 지구에서 살고 있었으니 루시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신과 악마들이 저렇게 경악하는 걸로 봐서는 상황이 아주 재미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상시에 그렇게 엉덩이가 무거운 척, 근엄한 척, 내숭이란 내숭은 다 떨던 것들이 날뛰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이 아주 재미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아들이 그동안 대체 얼마나 천계를 들썩이게 만들었기에, 다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크로노스의 의문에 대답해 줄 시간이 없었다.

프로세싱의 중축을 잃어버린 대지모신이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대지모신의 화신체를 구성하고 있던 중심핵이 소거되었습니다.]

[대지모신의 본체가 현신합니다!]

끼아아악!

대지모신은 다시 정제되지 않은 의식을 가진 개념적인 존재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는지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육체는 단번에 붕괴하면서 삽시간에 수백 수천 배의 크기로 불어나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쿵!

세상이 크게 위아래로 들썩였다.

안. 된. 다.

나. 는.

이. 렇. 게.

구슬프게 울어 대는 대지모신에게선 마치 온 우주의 모든 악취란 악취는 전부 모아 놓은 것처럼 썩은 내가 진동을 해 댔다.

녀석은 연우를 잠식하려던 가이아의 저주가 튕겨 나면서 더 큰 패널티에 영혼이 잠식된 상태. 그런 상황에서 강제로 본체로 완전히 돌아와 버렸으니, 악조건은 손 댈 새 없이 더 악화되고 말았고, 결국 가이아의 저주는 대지모신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장악해 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연우의 권속들은 일제히 그림자 속으로, 니플헤임은 재빨리 간격을 벌렸다.

저 악취에 휘말렸다간 단번에 가이아의 저주에 감염될 것 같았으니까.

나. 는.

나. 는.

대지모신은 사념만 구슬프게 토해냈다.

더 크게 팽창해야 할 본체마저도, 검은 쇠사슬에 단단히 묶이고 말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쇠사슬 사이로 세포 덩어리가 삐져나오려 했지만, 재빨리 더 많은 쇠사슬이 겹겹이 쌓이면서 그마저도 포박하고 있었다.

“열려라.”

연우는 왼손으로 쇠사슬을 단단히 쥐고 있는 한편, 오른손으로 비그리드를 낚아채면서 허공에다 길게 쭉 내그었다.

공허가 탐욕스럽게 아가리를 쩍 벌렸다. 마치 대지모신을 아주 맛나게 먹어 치우겠다는 듯이.

그리고 삼투 현상이 빚어지면서, 맹렬한 돌풍과 함께 대지모신이 통째로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 는.

대지모신은 다급했던지 같은 사념만 계속 풍겨 대면서 어떻게든 버티고자 했다.

그사이에도 쇠사슬이 더 겹겹이 싸이고, 더 팽팽하게 바짝 조이면서 녀석을 공허 속으로 욱여넣었다. 하지만 워낙에 덩치가 커서 그런지, 아니면 가이아의 저주를 죄다 뒤집어쓰고도 힘이 남아 있는 건지, 좀처럼 쉽게 들어가지질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니플헤임 등이 연우를 도와주려 해도, 워낙에 가이아의 저주가 풍기는 독기가 너무 강렬한 탓에 연우에게 따로 버프를 걸어 주거나, 원거리 공격을 퍼부어 대지모신을 두들겨 패는 게 전부였다.

바로 그때.

[‘하데스’의 신화가 플레이어 ###을 바라봅니다.]

[‘하데스’의 신화가 현신합니다!]

츠츠츠-

「이런.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로군.」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대지모신 앞에 깔려 있던 그림자가 위로 불쑥 올라오더니, 천천히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갖춰 나갔다.

그리고 드러나는 모습이, 이지적인 시선이 대지모신을 위아래로 훑는 순간.

그쪽을 보고 있던 비그리드에서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데스……?』

연우도 아버지처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존재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몇 번이나 보고 싶었던 얼굴.

하데스가 이쪽을 보면서 엷게 미소를 띠었다.

「아우님, ‘힘’은 그리 쓰는 것이 아니라네.」

하데스는 살아 있을 시절에도 잘 보여 주지 않던 미소를 입가에 살짝 띠었다. 무엇이 그리도 기분이 좋은 건지, 연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하데스와는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우울하거나 어두운 부분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하데스는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집에서 천천히 검을 뽑더니, 그대로 거칠게 휘둘렀다.

지난날, 연우가 처음 타르타로스에 들어왔던 시절. 그가 티탄과 만나서 발목이 묶여 있을 때 하데스가 갑작스레 나타나면서 보여 주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우님이 지닌 ‘죽음’이란 단순히 ‘끝’을 맞은 만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야. 정확하게는 이곳, 명계인 타르타로스로 인도하는 힘, ‘종국(終局)으로 이끄는 힘’인 것이지.」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른다. 그러자 쪼개진 공간 사이로 검은 벼락이 쉴 새 없이 내리꽂히면서 대지모신의 본체를 뭉텅이로 잘라 나갔다.

「죽음을 맞은 것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에는 아주 큰 차이점이 있지.」

쾅, 쾅, 콰앙!

콰아아앙!

네. 가.

네. 가. 이. 래. 선.

그러자 여태껏 억지로 버티고 있던 대지모신의 몸뚱이가 이래저래 잘려 나가면서 급격한 속도로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면을 붙들면 지면을 부수고, 공간을 붙잡으면 그 공간 자체를 부숴서 어디에도 달라붙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다 하데스의 공세는 니플헤임의 악마들보다도 훨씬 강렬했고, 대지모신의 약점만 집요하게 노리고 있었다.

결국 대지모신은 이리저리 뒤흔들리다,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통째로 공허 속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 모양새가 마치 하수구에 물이 빠지는 듯해 일견 우습기까지 했다.

연우는 대지모신이 공허에 완전히 갇히고 나자, 그대로 공허의 문을 완전히 닫아걸었다.

쿵!

쿵!

공허 안쪽에서부터 대지모신이 어떻게든 빠져나가고자 들썩이면서 공간이 통째로 요동치기도 했지만.

쿠우웅-

완전히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마저도 잠잠해지고 말았다.

봉신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단 뜻이었다.

『…….』

『…….』

하지만 ‘문’이 닫히고도, 연우의 권속들이며 니플헤임의 악마들은 대지모신이 언제 빠져나올지 몰라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면서 상황을 지켜보았고.

『……나오질 않아?』

어디선가 요르문간드가 중얼거린 목소리는 적막을 완전히 깨뜨렸다.

『……저, 정말 끝난 것인가?』

『대지모신이 갇혔어!』

『하! 하하하!』

싸움에 임했던 이들은 모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지모신이 봉신되었습니다!]

[연합군, ‘올림포스’가 수장을 모두 잃었습니다.]

[연합군, ‘올림포스’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연합군, ‘아스가르드’가 타르타로스에서의 퇴각을 선언합니다.]

[‘타르타로스 쟁탈전’에서 동맹군이 승리하였습니다!]

이윽고 떠오르는 메시지는 대지모신의 완전한 붕괴와 연합군의 패배를 선언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

[중립, ‘데바’가 타르타로스 쟁탈전의 결과에 침묵합니다.]

[중립, ‘딜문’이 타르타로스 쟁탈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점칩니다.]

……

[신의 사회, ‘말라흐’가 축전을 전달하였습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당신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동마왕군’을 살핍니다.]

[대다수의 신들이 당신이 빚어낸 결과를 보고 큰 탄식을 흘립니다. 새로운 루시엘이 나타날 수 있다면서 강한 적개심을 느낍니다.]

[대다수의 악마들이 아주 재미난 경기를 관람했다며 동맹군에 상당한 양의 인과율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비마질다라가 당신의 승리에 강한 전의(戰意)에 휩싸입니다. 당신과 만날 시기를 당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깊게 고민합니다.]

[케르눈노스가 자신의 사도가 다친 곳이 없는지 면밀히 살핍니다.]

‘……끝났다.’

연우는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올림포스의 사건이 종료되자, 한순간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싸움을 벌이고, 얼마나 많은 고비와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던가.

물론, 아직도 해야 할 일은 적잖게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팔부능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렇게 차근차근히 앞에 펼쳐진 길을 밟으면서 나아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 종착지까지 다다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형…… 님.”

연우는 긴장이 풀리려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하데스 쪽을 돌아보았다.

하데스는 어느새 이쪽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엷은 미소가 아닌, 짙은 미소를.

그런 그에게 던지는 ‘형’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꾸만 입가에 맴돌 정도로 달콤했다.

「아우님이라고 먼저 호칭한 건 나였지만, 이렇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새롭구나. 못난 나와 달리,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훨씬 잘해 주어서 고맙다.」

그 칭찬이 왜 이리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건지.

하데스는 기특하다는 듯이 연우를 보다가, 시선을 살짝 위쪽으로 돌렸다.

「행복하십니까?」

그 질문은 연우를 향한 게 아니었다.

차차착!

비그리드가 잘게 조각났다가,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크로노스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장남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이면서도, 아버지로서 따스한 사랑을 주지 못했던 지난날의 못난 모습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하고말고.』

「말씀처럼 그렇게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하데스는 진심이란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지난날에 대한 원망이나 미련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그도 그동안 연우를 통해 줄곧 보고, 느꼈던 것이다. 크로노스가 살아왔던 삶과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첫째 누이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둘째 누이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온전히 되돌아오기만을 기다렸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떠나신 뒤로도 줄곧 그러했지요. 하니, 이번에 만나신다 하여도 크게 혼내지 마십시오. 우리 남매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알겠다. 기억하마.』

둘째 누이. 어쩌면 대지모신과 관련된 사건들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데메테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데스는 형제들에 대해 더 설명하려다,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나머지는 우리 막내가 알아서 할 테니.」

『꼭……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말하는구나.』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울적해질 때, 연우가 앞으로 나섰다.

“가능하다면 타르타로스를 다시 맡아 주실…….”

「아니. 그 자리는 더 이상 내 자리가 아니다. 너의 자리지. 그리고 전에도 말했다시피.」

하데스는 여전히 씁쓸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크로노스를 마주 보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정말 쉬고 싶습니다. 아주 기나긴 시간 동안…… 지쳐 있었으니까요.」

크로노스는 하데스가 그동안 심적으로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있었을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위로 셋 있는 누이들은 항상 절망에 빠져 있었고, 밑으로 있는 남동생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책임감 있게 타르타로스로 내려와 지난 죄인들을 감시하기를 자처했으니.

여태껏 부모와 형제들의 멍에를,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쇠사슬이 여태 바짝 죄어 오면서 그를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겠지. 심지어 ‘죽음’을 맞은 이후에도…….

「하지만 이제는 정말 남은 미련도 없잖습니까? 이대로 모든 것을 던져두고 도망치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하데스가 살짝 짓궂은 모습으로 연우를 보다가, 크로노스에게 말했다.

「잘난 막내를 두었으니, 그 정도쯤은 애교로 봐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

그 단어가 왜 이리도 무겁게 다가오는 것인지.

크로노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이 바짝 옥죄어 오듯이 아플 뿐이었다.

그렇기에.

연우도 더 이상 하데스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파아아!

[인과율의 한계치가 허용 범위를 넘어 ‘하데스’의 신화가 옅어집니다.]

하데스는 잘게 부서지면서 아버지와 동생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막내야, 잘 지내려무나. 아버지, 막내와 형제들을 잘 부탁합니다.」

크로노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하데스는 그제야 만족에 찬 미소를 띠면서,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천천히 뒤돌아 섰다.

그리고 그렇게.

하데스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면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하데스’의 신화가 저뭅니다.]

[사왕좌의 신위가 죽음의 태엽과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 *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

마치 도화지처럼 새하얗기만 한 곳에서.

페르세포네는 무언가를 찾듯 조심스럽게 한참 동안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씁쓸하게 웃으면서 돌아섰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떠나기 전에 먼발치에서나마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자신은 죄인이었고, 지금에 와서 용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조용히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기다리시었소?」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페르세포네가 놀란 눈이 되어 뒤로 돌아섰다.

하데스가 어느새 웃는 낯으로 이쪽을 보면서 서 있었다.

「어, 어떻게……?」

「말했잖소. 당신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알고 있노라고.」

하데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페르세포네는 막상 이렇게 남편을 만나게 되자, 죄책감이 더 크게 고개를 들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난, 난…….」

하지만 하데스는 어딜 가려느냐며 다가서서 페르세포네의 손을 덜컥 붙잡았다.

페르세포네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하지만.

하데스는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따뜻한 꽃 차처럼.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봄의 노란 햇살처럼.

혹은 그녀가 가장 아껴 보던 격정 어린 오리온자리처럼.

「지난 기억들은 모두 잊읍시다. 본디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하지 않소? 나 역시 무신경하여 여태 그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한 건 똑같으니…… 이제부터라도 둘이서 같이 잘해 봅시다.」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천천히 꿇었다.

「그러니.」

그리고 그녀의 왼손을 부드럽게 잡아, 어느샌가 마련한 노란 꽃반지를 넷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이 못난 나와 다시 한번 더 결혼해 주시겠소, 페르세포네?」

프로포즈였다.

처음으로 하는 프로포즈.

그전에는 혼인이 너무 서둘러 진행되었던 까닭에 제대로 절차도 밟지 못했지만. 모든 게 정리가 된 지금은 달랐다.

페르세포네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꽃반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말없이 하데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승낙으로 받아들이리다.」

하데스는 품에 안긴 페르세포네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이 세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서로만 있다면 어딘들 행복할 것이다. 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보며 행복하게 웃던 둘은 천천히 백색 세계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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