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에레보스 (1)
빛으로 화해 흩어지는 하데스를 보면서.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데스는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던 걸까?
사실 그동안 연우는 몇 번이고 사자 소환 스킬을 이용해 하데스를 불러 볼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도 끝내 그러지 않았던 건, 사왕좌의 근간을 이루는 신화가 하데스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자칫 그를 잘못 부르게 되면 겹겹이 쌓이는 신화에 혼선이 생길 수 있는 데다가.
지난 세월 동안 하데스가 워낙에 힘든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이상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니 원칙적으로, 하데스의 신화는 가이아의 저주로 들썩일 수는 있었어도, 현신까지 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데스는 그것을 해냈고, 연우를 도와 대지모신을 봉신하기까지 했다.
당연하지만, 환상이나 환각을 보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크로노스도 하데스를 같이 보았으니까.
‘아니면 이것 때문일까?’
그래서 연우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높다랗게 선 세계수 쪽으로 시선이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
세상의 이면, 이데아를 구성하는 중축이며, 생명의 윤회전생 시스템을 담당하는 기둥.
그것은 대지모신에 감염되어 크게 잘려 나갔어도, 여전히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지모신이 왜 칠흑왕을 노리다 말고 도중에 이것을 노렸는지,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
다만, 창공 도서관만큼이나 신비로움을 품은 이 나무가, 어쩌면 하데스의 신화를 깨웠는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세계수는 그런 연우의 의문 섞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바람에 나뭇잎만 살랑살랑 흔들어 대고 있었으니.
연우는 한참 동안이나 더 서서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돌아섰다.
* * *
타르타로스로 되돌아왔을 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발데비히와 망자 거인들이 주종의 예를 갖추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른 두 마리의 사룡(死龍)은 근방에 있는 절벽 끄트머리에 앉아 이쪽을 보면서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샤논과 한령을 비롯한 죽음의 군단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디스 플루토는 고향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들뜬 분위기가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 듯했다.
그리고.
좌우로 나뉘어 서 있는 천교와 동마왕군 앞에는.
『우, 우리는 따지자면 그대들과 하, 한편이라 할 수도 있다! 그대들이 적대시한 곳은 기가스가 아닌가!』
『마, 맞아! 그리고 방금 전에 결의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우리 티탄은 얼마든지 당신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이 버러지 같은 것들! 너희들이 도중에 배신하여 전력이 갈라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벌어 지지는 않았을 텐데!』
『닥쳐라! 너희가 우리를 언제 같은 동맹이라 생각한 적이나 있었던가!』
『너희는……!』
시장 바닥이 따로 없었다.
티탄과 기가스의 생존자들이 줄줄이 포박된 모습을 하고도,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거나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은 우습기 짝이 없었으니.
이랑진군과 나타태자, 그리고 아가레스도 그런 녀석들의 모습이 어이없는지 헛웃음을 흘릴 정도였다.
『저런 것들이 그동안 천계를 좌지우지했던 것을 생각하니 조금 우습긴 하군. 더 이상 여기서 지켜볼 필요도 없겠어.』
펜리르와 함께 뒤늦게 타르타로스로 강림한 요르문간드는 가볍게 혀를 차더니, 연우를 돌아보았다.
『큰형이 제멋대로 일을 치르긴 했다지만, 천교처럼 우리 사회도 단순히 선의로만 그대와 동맹을 맺은 게 아니란 건 알고 있겠지?』
“물론.”
연우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요르문간드가 마음에 든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역시. 그대는 별 볼 일 없으면서 바라는 것만 많은 필멸자나, 제 명예만 앞세울 줄 아는 멍청한 초월자들과 달리 아주 합리적이야. 거래를 할 줄 알거든. 여하간 내 눈이 틀리지 않은 것 같으니, 하면 정산은 추후에 따로 하도록 하지.』
연우는 그가 말한 ‘추후’가 타르타로스의 정리와 에레보스로의 진출, 그리고 올림포스를 완전히 탈환하기까지라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굳이 연우가 한시가 급한 지금 발목을 붙잡거나, 일손을 거두어 거래 값을 비싸게 올려 받지 않겠다는 뜻.
그것이 전부 요르문간드의 배려라는 것을 잘 알기에, 연우는 고마움의 뜻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니플헤임, 이대로 돌아간다.』
요르문간드는 연우가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한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막상 그렇게 되자, 갑자기 날벼락을 맞게 된 건 헬이었다.
『두, 둘째 오라버니……? 지금 이게 무슨 소리죠? 아직 저는 ### 님이랑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구요! 사인도 받아야 하고, 악수도 해야 하고, 개인 채널링도 받아야 하고, 사진도 찍고, 가능하다면 포옹도 받고 싶고, 그리고, 그리고 또……!』
『시끄럽다. 우리가 돌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너 때문이기도 하니, 이대로 돌아간다.』
『안 돼요! 그, 그럼 5분만! 아니, 3분만! 1분만……! 아아악! 사인이 안 되면, 손이라도…… 아니, 머리카락이라도 좋으니까 받…… 꺄아악!』
요르문간드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거대한 입으로 헬을 와락 삼키더니 그대로 포탈을 열어 천계로 사라졌다. 그를 따라왔던 권속들은 하나같이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왕, 왕왕!
그리고 유일하게 이곳에 남은 펜리르는 그런 두 동생들이 못 말린다는 듯, 커다란 머리를 좌우로 휘젓고 있었다.
이랑진군과 나타태자의 눈에는 그런 펜리르가 헬과 다를 바가 없이 보여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지만.
펜리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아가레스와 나란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때, 티탄의 대표로서 가장 선두에 무릎을 꿇고 있던 셀레네가 조심스럽게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전황은 연우에게 완전히 기울어졌고, 올림포스로 통하는 길목도 완전히 차단된 이상, 그들의 운명은 연우의 손에 달려 있는바.
그녀로서는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화가 잔뜩 나 있을 연우의 심기를 달래고, 좋게 설득해야만 했다.
설사 죄수의 신분으로 타르타로스에 다시 갇힌다고 해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어머니도, 오라비도 없는 지금…… 어차피 우리에겐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 따윈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시 숙이고 또 숙여서, 다음 기회를 노려야만 한다. 그게 언제가 되든 간에.’
타르타로스에 갇힌 뒤, 수만 년의 세월이 흘러서 기회를 갖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럴 시기가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셀레네도, 다른 티탄들도 이 지긋지긋한 타르타로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똑같았기에, 연우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대는 하데스의 후왕이면서도, 그전에 스스로 크로노스의 왕관을 쓰기도 했으니…… 크로노스는 본디 우리 티탄들의 위대한 왕이셨다. 그분의 왕관을 썼다는 것은 우리 티탄의 새로운 왕이기도 하다는 뜻! 그대가…… 아니,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나, 셀레네를 비롯한 우리 티탄들은 당신을 왕으로 숭배할 것이오, 또한 추종할 것입니다.』
셀레네와 티탄들은 그동안 올림포스와의 연결이 끊어져 있어, 아직까지 연우의 신분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한 상태.
하지만 그가 ‘크로노스의 시험’이라 부르는 난관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럴듯한 명분을 붙여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느새 비그리드로 돌아와 구경하고 있던 크로노스로서는 우습기만 했지만.
『하하하! 왕좌에 있는 동안에도 내 뒤통수를 언제 때리면 좋을까,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것들이 저렇게 표현을 한다니. 저것도 저것대로 우스운데? 널 완전히 호구로 보는데 어쩔 거니, 아들아?』
어딜 호구 잡을 놈이 없어서 말이야, 우리 인성이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는 아들을 노리냔 말이야. 크로노스는 그렇게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연우는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기가스 쪽을 돌아보았다. 티탄은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보유한 전력과 동맹군들에 티탄까지 더해진다면, 충분히 올림포스를 탈환할 뿐만 아니라 천계 내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사회가 되지 않겠냐고 유혹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심 기가스는 뭐라고 말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죽은 티폰과 페르세포네, 대지모신을 좇아 저항할까?
아니면 투항을 할까?
『…….』
『…….』
기가스는 그들의 의견을 대표할 만한 지도자가 없어 서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끝까지 항전을 벌일 것처럼 굴어 놓고,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죽거나 유폐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니, 그들 종족 특성상 앞으로 배신자로 낙인찍힐 게 뻔해 섣불리 나서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정말 죽기는 싫었는지, 한 놈이 눈치껏 재빨리 나서려 했다.
『저희도 당……!』
“됐다. 어차피 너희들에 대한 처분은 다 결정해 뒀었으니까. 그냥 유언이나 들어 두려고 했는데, 별 필요 없겠어.”
연우가 조롱하듯이 말을 던졌지만, 티탄과 기가스에게는 딱 한 단어밖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언!
『와, 와, 왕이시여! 그러시지 마시고 저희들의 말을 끝까지 들……!』
“내가 올림포스의 3주신들에게 가진 불만이 뭔지 아나? 그동안 너희들에 대한 처분이 너무 관대했다는 거야.”
『……!』
『……!』
“불온의 싹은 일찌감치 제거해야지.”
순간, 티탄과 기가스들이 디디고 있던 지면으로 검은 그림자가 넓게 퍼지더니, 위로 쇠사슬이 잔뜩 올라오면서 녀석들의 목과 사지를 칭칭 감기 시작했다.
촤르륵!
『아, 안 돼!』
『살려 줘!』
티탄과 기가스는 하나같이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여태 불멸이라 믿었던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형벌이 내려지자, 상상한 적 없는 공포가 다가왔다.
몇몇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어떻게든 달아나려 했지만, 그런 놈들은 동마왕군이나 천교가 따로 나설 필요도 없이 쇠사슬이 더 빠르게 돌아가며 식령을 시작했다.
마치 모양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쇠사슬은 티탄과 기가스를 마구잡이로 그림자 속으로 욱여넣었다.
뼈가 분질러지고, 몸이 기괴한 각도로 접혔다. 부서진 사지가 위로 잠깐 튀어 올랐다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녀석들이 내뱉는 절규와 비명이 타르 타로스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콰드득, 콰득!
쿠드드득!
[권능, ‘그림자 영역’에 하데스의 식령검의 효과가 부여되었습니다!]
[죄악석(오만·식탐 색욕)이 강하게 반응합니다.]
[대규모 식령(食靈)이 벌어집니다!]
『……보기 좀 안 좋군.』
크로노스는 그래도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면식이 있던 이들이라, 마구잡이로 죽어 나가는 걸 보기가 영 껄끄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굳이 연우를 말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오랫동안 왕좌에 앉았던 이로써, 때로는 포용과 관용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럴 때는 단호한 처벌이 더 효과적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을…… 왕…… 으로 추대…… 한다고 했…… 는데……!』
그때, 티폰과 기가스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셀레네가 무슨 수를 썼는지 억지로 기어 나와 연우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손에 힘은 없었다. 이미 영체의 절반 이상이 뜯긴 뒤였으니까.
연우가 그런 녀석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아무리 그래도 내게도 일말의 양심이라는 게 있으니.”
『무, 뭐가 있어? 야아앙시이이임?』
크로노스는 그런 아들을 기가 찬다는 듯이 보았지만.
“나를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너희들의 갸륵한 마음은 받아 주도록 하지.”
『허. 허허허. 그것참. 아주 크고 아름다운 양심이로구나, 아들아.』
연우는 허탈해하는 크로노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다 죽어 가는 셀레네의 상반신을 도로 걷어차 그림자의 늪으로 빠뜨렸다.
[식령된 영혼의 에너지는 전부 권속들에게로 부여됩니다.]
츠츠츠-
연우는 삼킨 모든 양분을 전부 망자 거인과 사룡, 그리고 디스 플루토에게 고루 나눠 주었다.
어차피 자신이야 완숙의 경지에 다다라 별 필요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권속들을 강하게 만들어 신격을 강화시키는 게 여러모로 더 이득이었다.
그렇게 대규모 식령이 전부 끝난 뒤.
타르타로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파하하하! 확실하다. 저놈은 신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녀석이야!』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며 충격에 빠져 있는 이랑진군이나 나타태자와 달리, 아가레스만이 파안대소를 크게 터뜨렸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정색하면서 같이 엮지 말라는 의견을 보냅니다.]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고 말합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아가레스를 외면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