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94화 (594/862)

19화. 에레보스 (2)

“시작하지.”

연우의 지시에 따라, 소환되었던 키클롭스 3형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셋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전까지 연우가 타르타로스를 탈환했다는 소식에 아주 크게 기뻐했던 그들이었지만.

명왕의 신전에 묻어 두었다던 순결의 돌을 막상 찾으려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내심 포기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 이렇게 현실이 된 것이니.

순결의 돌을 묻어 둔 곳은 의외로 개방된 장소였다.

제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왼쪽 두 번째 청동화로 아래.

그걸 본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저런 곳에 숨길 생각을 했냐는 듯한 얼굴.

키클롭스 3형제, 특히 막내인 아르게스는 순결의 돌에 대한 사용법을 알아내지 못했어도, 태초의 불을 조금씩 추출하는 법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디스 플루토의 여러 병장기들을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디스 플루토는 천계에서도 소문난 정병으로 기능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만약 그런 순결의 돌을 티탄과 기가스가 찾아내었으면 어쩌려고 저랬나 싶었지만.

「무엇이든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요.」

아르게스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 사람들은 어째서 아르게스가 이토록 자신만만해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청동화로 아래에 그만이 아는 기관 장치가 숨겨져 있어서, 그것을 이리저리 조작해야만 순결의 돌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쿠쿠쿵!

지면이 갈라지면서 낡은 함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여니, 순결의 돌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저것이……!”

순간, 그것을 보던 이랑진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것만 있다면 옥황상제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세.”

나타태자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랑진군은 그제야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마음이 너무 앞섰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천교의 두 신장이 마음을 다잡는 동안.

『음. 이게 영혼석이란 말이지? 확실히 네가 갖고 있는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구나.』

크로노스는 순결의 돌을 슬쩍 보더니 짧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돌로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뭔가를 감지한 것 같았다.

연우는 혹시 자신이 알아낸 것 외에 새로운 기능에 대한 힌트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기대를 갖고 물었다.

‘어떻게 다른 것 같습니까?’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네가 가진 건 제 주인을 닮아 아주 사악하고 수상쩍은 느낌만 풀풀 풍기는 데 비해, 이건 그 자체로 조금씩 정화를 하고 있어. 왜 그런 얼굴로 보느냐, 아들아?』

연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비그리드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가 아들을 놀리는 맛에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지적해 봤자 정신만 사나울 것 같아 가볍게 혀를 차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보다 정화라니요?’

『신위를 잃은 신력이 서로 분할되어서 한 가지 특정 요소가 극대화될…… 아니다. 쉽게 말해서, 지금 네가 갖고 있는 영혼석, 처음 발견하고 사용법을 알았을 때 느낌이 어땠지?』

‘사나웠습니다.’

『그래. 방출(放出)이었겠지. 안에 담긴 마력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왔겠지?』

‘예. 그래서 현자의 돌 쪽으로 마력을 모두 옮겨 담아 정제를 해야 했습니다.’

『아마 그럴 거다. 네가 가진 건 마력의 성질이 아주 활동적이라,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성질이 강하거든. 미친개처럼. 하지만 이건 반대다. 수용(收容)이지.』

‘마력을 반대로 흡수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비슷하되, 달라. 가두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여서는 돌리거든.』

‘그럼 정화를 한다는 말씀이……?’

『어. 탁기(濁氣)든 영기(靈氣)든, 저 돌은 가리지 않고 그냥 흡수해서 자체적으로 정화를 해. 정말 티 없이 맑은 순기(順氣)로 만들지. 너무 맑아서 일반 생명체에게는 차라리 독이나 다름없는, 그런 것으로.』

연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역시 현자의 돌을 만들고, 계시록을 탐독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쌓은 상태. 순기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마력은 그 순도가 맑으면 맑을수록 좋을지 모르나,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전혀 살지 못하듯, 순기도 오히려 생명체에게는 독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 돌이 원시 우주에서나 존재했을 기운을 만든다고……?

『그리고 성질을 부여한다.』

‘……이름처럼 ‘순결’을요?’

『그래.』

연우는 순간, 처음 오만의 돌을 접했을 때를 떠올렸다.

동생의 일기장을 제거한 순간, 오만의 돌은 막대한 양의 마력을 방출했다. 그 기운은 ‘오만’이란 이름처럼 모든 것을 짓누르는 묵직한 힘이 담겨 있었다.

식탐의 돌도 마찬가지. 원주인이었던 식탐황제도 돌이 내뿜는 기운에 휘말려 극성맞은 식욕을 보이지 않았던가.

색욕의 돌도 비에라 듄과 대지 모신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죄악’에 속하는 경우.

‘주선’에 속하는 순결의 돌은 방출이 아닌 수용이라 하니, 순결이 가진 특성에 맞게끔 개량된 순기를 보유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이것들이 모이면 만들어 지게 될 ‘주선석’과 죄악석의 기능이 어떻게 상호 호환되는지 알 것 같기는 하다만. 지금의 너에게는…….』

‘위험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 서로 반발만 일으킬 뿐이지.』

연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순결의 돌에 손을 가져갔다.

파직!

그러자 손끝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면서 접근을 거부했다. 현자의 돌도 격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마치 저건 아직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정말 거래한 대로 천교를 도와 그쪽이 가진 영혼석과 교환하든가, 아니면 다른 ‘주선’의 돌을 찾아야 할 모양이었다.

더불어 영혼석을 처음 접했다면서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기능을 단번에 알아채는 아버지의 식견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거들먹거리는 소리밖에 못 들을 테니.

결국.

연우는 일단 그림자를 확장시켜 순결의 돌을 그 속에 넣어 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 * *

연우는 순결의 돌을 회수한 뒤, 천교와 니플헤임에 타르타로스를 맡기고 곧장 아테나 등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에레보스로 가는 문이 드디어 열렸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오. 이게 누구신가, 사도로군! 오길 기다리고 있었음이야!”

“어허! 누가 사도긴 사도야! 이 몸의 동료가 될 소중한 전사에게!”

“이놈은 아직도 똑같은 소리를 해대고 있네. 야! 내가 먼저 침 발라 놨다고!”

“허! 기도 차지 않을 소리군. 사람이 무슨 물건인가? 침 바르면 자기 거게?”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는 저들끼리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연우로서는 여전히 기가 찰 일이었지만.

“그나저나 오늘따라…….”

“더 반짝반짝 탐이 날…… 아니, 빛이 나는군!”

그러다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는 연우가 그들을 무시하며 옆으로 지나치려 하자, 싸우다 말고 갑자기 시선을 그에게 집중했다.

뭔가 이질적인 점을 느낀 것이다. 사방을 짓누르는 강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시선이 좀처럼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랬던 연우에 대한 욕심이 훨씬 더 무럭무럭 자라난 것 같았다.

‘빌어먹을 색욕의 돌.’

연우는 뒤늦게 이유를 깨닫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다른 신과 악마들을 상대할 때에도 미묘한 분위기 변화를 느꼈었는데, 이들은 그보다 훨씬 심한 것 같았다.

『조카들의 삼촌 사랑이 생각 이상이로군. 인기 많아서 좋겠는데? 참고로 아들아, 이럴 때일수록 교통정리를 확실하게 해야 한단다.』

‘알고 있습니다. 잔소리 그만하셔도 돼요.’

『그럼 되었다만. 하하!』

연우는 크로노스의 신신당부를 들으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헤르메스와 포세이돈 등을 구출하러 간다.

그전이었다면 모를까, 여태 숨겨져 있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이상,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들에게는 미리 진실을 일러 둘 필요가 있었다.

더불어서 크로노스에 대해서도.

아테나는 활짝 열린 게이트 앞에 있었다. 꽤나 지쳐 보이는 것이 게이트를 여느라 얼마 남지 않은 신력이며 심력까지 몽땅 소비한 것 같았다.

“왔어?”

“예. 뒷마무리까지 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아냐. 우리로서는 고마울 뿐인걸. 원래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인데…… 여태 너에게 큰 짐만 이게 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미안할 따름이야.”

그래도 막상 연우가 오니 어떻게든 웃어 주려는 모습이, 너무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그래서 연우는 지쳐 있는 아테나와 다르게, 태평하게 자신을 쫄래쫄래 따라오는 두 못난 남정네들이 더 어이없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른 배에서 태어났다지만, 어떻게 같은 씨를 가지고도 저렇게 성격이 다른 건지.

“사실 따지고 보면, 네가 이렇게까지 발 벗고 우리를 도와줄 이유는 없는데도…….”

아테나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연우도 불쑥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뇨. 올림포스의 일은 제게도 남 일이 아닙니다.”

“……?”

연우는 의문 섞인 눈으로 자신을 보는 아테나를 뒤로한 채,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를 돌아보았다.

“에레보스로 가기 전에 우선 말해 둘 게 있는데.”

“오! 드디어 내 사도가 되기로 결……!”

“이제 ###이 너 따윈 가볍게 지르밟고도 남을 텐데, 뭔 헛소리야. 당연히 이 몸과 함께 여……!”

“나, 크로노스의 아들이야.”

“……?”

“……?”

난데없이 던진 말에.

아테나를 비롯한 헤라클레스와 아레스 등은 이게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연우는 등 뒤로 느껴지는 아테나의 시선을 일부러 회피하면서, 멍하니 있는 헤라클레스와 아레스를 보면서 말했다.

“내가 너네들 삼촌이라고.”

“……!”

“……야, 그게 무슨!”

헤라클레스는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그게 뭔 되도 않는 소리냐며 소리를 치려 했지만.

화아악-

연우는 갈무리하고 있던 기운을 개방했다.

자신의 마력이 아니었다.

비그리드가 여태 숨기고 있던 기운.

죽음의 태엽을 돌리지 못해서 지금껏 작동하지 않던 크로노스의 신력이었다.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도 그걸 느꼈는지, 흠칫 놀라면서 저도 모르게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아테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흐. 그래. 난생처음으로 손주 녀석들을 만나는 자리인데. 그래도 명색이 신왕이었던 몸의 재림이 좀 때깔이 나야겠지?』

크로노스는 연우만 들을 수 있게 음험한 속내를 작게 속삭이면서.

차차차착!

현신을 시도했다.

조각난 비그리드의 조각들이 이리저리 뒤섞이면서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검은 머리가 크게 흩날리는 미중년의 모습.

순간, 아레스와 헤라클레스, 그리고 아테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그들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크로노스를 본 적이 없었다. 실물로 본 모습도 산맥으로 누워 있는 사체가 전부였던바.

하지만 그래도 크로노스가 자신들의 친조부라는 사실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유의 기질이 그러했고, 그 속에 있는 영혼도 자신들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신은 겉모습 안에 숨겨진 영혼을, 그리고 다시 그 영혼 속에 숨겨진 모습까지 꿰뚫어 볼 수 있으니까.

『너희들이 제우스의 자식들이라지?』

“……!”

“……!”

“……!”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

세 사람은 거기에 완전히 홀린 것처럼 아무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사실 크로노스라는 존재는 올림포스 내에서도 의견이 아주 크게 엇갈리는 존재였다.

올림포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지만, 결국 제 스스로 광기에 함몰되어 스러지고 만 왕.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올림포스 내에는 암암리에 그를 기리는 이들이 많았고.

특히 현 천계의 상황에 불만이 많은 데다가, 윗세대와 번번이 갈등을 빚고 있는 아테나 세대에서는 오히려 그를 숭상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들에게도 크로노스는 신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더구나.

연우가 크로노스의 자식이라는 말은 그들의 귓가를 아직도 맴돌았으니.

여태 연우에게 무슨 말을 떠들어 댔는지를 떠올린 아레스와 헤라클레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사, 삼촌?”

“숙…… 부님?”

그런 둘의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플레이어 ###이 무소속의 신, 아레스에게 사도직을 제안합니다!]

[플레이어 ###이 무소속의 신, 헤라클레스에게 사도직을 제안합니다!]

순간, 두 신의 안색이 핼쑥해지고.

연우가 흉흉하게 웃으면서 그들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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