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95화 (595/862)

20화. 에레보스 (3)

사도(使徒)라는 것은 신의 화신이며 분신이고, 신도들을 이끄는 지도자다.

그래서 신은 사도를 삼는 데 있어서 절대 허투루 하지 않는다.

사도의 행적이 곧 신의 신화 중 일부가 되는 것이며, 사도의 평판이 신앙의 배경이 될 테니까. 또한, 사도의 권위가 향후 신격의 향방을 결정 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하니, 사도를 삼는 기준은 각자가 다를지라도, 대부분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탑 내에 그렇게 많은 플레이어와 랭커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도의 숫자는 지극히 적은 편이었다.

하계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고 싶은 마음은 신도 굴뚝같지만, 오히려 그런 욕심이 천천히 쌓아 올려야 할 신화를 그르칠 수 있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신들이 사도를 물색하여 삼는 주기는 짧게는 백 년에서 길게는 천 년에 달하기도 하며, 때때로 그 시기가 겹쳐 사도가 아예 전무한 세대가 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그만큼 재능과 자질이 뛰어나 군침이 도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여러 신들이 사도로 삼고자 득달같이 달려들기도 한다는 뜻이었으니.

처음 연우가 외뿔부족의 무공을 자신에게 맞게 개량했을 때, 여러 신과 악마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이후 보이는 파격적인 행보에 숱한 러브콜을 보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같은 인재는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있다 하더라도, 대개 자존심이 강해서 초인이나 군주의 길을 걷는 이들이 숱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또 반대로 뒤집었을 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많은 사도를 부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사실 신들이 사도를 한 명만 삼는 것은 그에게 온전한 권위를 실어 주기 위해서일 뿐.

원한다면 두 명, 세 명…… 심지어 이론상으로 따지자면 수십 명을 동시에 삼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사도는 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존재하는 만큼, 그에게 상당한 양의 신력을 나눠 줘야 하며, 때때로 가호나 축복도 수시로 내려 줘야 하는 등, 관리가 귀찮은 면이 강했다. 무엇보다 시스템의 적용을 받으니 상당한 무리가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사도를 삼더라도 한 명, 많아야 셋을 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고.

연우는 그동안 아르티야의 관리를 위해 도일을, 그리고 거인족 관리를 위해 발데비히를 각각 사도로 삼았다.

그런데 여기에 두 명이나 더 추가적으로 사도를 삼으려 할 줄이야.

그것도 대신격이나 되는 이들이 아닌가.

아레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며 대신격이고, 헤라클레스도 그에 못지않은 신화를 쌓은 영웅이었다.

이런 존재를 사도로 삼는다는 것은 사실 천계에서도 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더구나 그만큼 큰 격들을 종속시키는 것이니, 아무리 연우라 해도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그냥 무리가 갈 뿐이라는 거지, 절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거대한 크로노스의 사체를 삼키고, 끝끝내 기어 다니는 혼돈과 대지모신도 거꾸러뜨린 존재.

그냥 격만 필멸자일 뿐이지, 가지고 있는 저력은 웬만한 개념신보다도 위인 것이다.

더구나 크로노스의 아들이라 하지 않는가.

그렇다는 건 신분도 절대 자신들보다 아래가 아니란 뜻이었다.

제우스 세대와 동등한 항렬.

이보다 지고한 신분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러니 그가 하겠다고 나선다면…… 단단히 코가 꿰일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 삼…… 촌? 호, 혹시 그동안 제게 쌓인 게 있어…… 요?”

아레스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말투로 끝에 ‘요’ 자를 겨우 붙였다. 여태 안하무인으로 세상 무서울 것이 없이 살았다지만, 지금은 어쩐지 저자세를 보여야만 할 것 같았다.

특히 한쪽 입술 끝을 비트는 연우의 모습에서 저게 허장성세이거나 단순히 그들을 압박하려는 용도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니.

“쌓인 거?”

“예…… 그러니 우리 말…… 로.”

“많지. 아주.”

“헤헤헤. 그렇다면 이러지 마시고, 귀여운 조카 대 늠름한 삼촌의 자세로 긴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푸는 것이…….”

“그래. 그러려고 이러는 거잖아? 왜? 싫어?”

“…….”

연우의 미소가 더 크게 비틀렸다.

아레스는 아주 잠깐 아무 말도 못 하고, 잔뜩 얼어붙은 자세로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리는데.

팟!

연우가 아레스에 집중한 사이, 헤라클레스가 갑자기 냅다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워낙에 힘이 좋다 보니, 그 힘을 몽땅 각력에다 실어 땅을 발로 찰 때마다 몸뚱이가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너, 너 이 새끼! 에이씨!”

아레스가 뒤늦게 기겁하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 동시에 둘을 잡을 순 없을 테니 제 딴에는 머리통을 굴린 것이겠지만.

피식!

연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불쌍한 것들. 꼭 직접 찍어 먹어 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나.』

크로노스는 그런 손자들이 안타까운 나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결과적으로.

“…….”

“…….”

“손 똑바로 들어.”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는 둘 다 나란히 눈두덩이에다 시퍼런 멍을 매단 채로, 무릎 꿇고 양팔을 높이 드는 벌을 서야만 했다.

팔이 슬슬 아래로 내려가려 할 때면 연우가 귀신같이 알아채니 농땡이를 피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레스’를 세 번째 사도로 삼았습니다!]

[‘헤라클레스’를 네 번째 사도로 삼았습니다!]

[사도로 삼은 두 존재의 모든 업적이 앞으로 모시는 신, 플레이어 ###에게로 귀속됩니다.]

아레스와 헤라클레스의 얼굴은 한껏 울적해지고 말았다.

연우를 사도나 수하로 삼으려다 말고, 역으로 자신들이 코 꿰인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오죽 억울할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들이 연우에게 달려든다는 건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선택지였다.

“…….”

아테나는 그런 과정을 전부 지켜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둘 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너무 제멋대로 날뛴다 싶더니. 언젠가 사달이 나도 날 건 알고 있었지만, 그때가 이렇게 갑자기 불쑥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천계 내에서도 골칫덩이로 여겨지는 아레스와 헤라클레스, 둘 모두 연우에게 기도 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둘의 자존심 따윈 생각도 않고 강제로 사도 계약을 맺게 한 건, 연우가 아니면 못 할 짓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아테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여전히 두 사람을 감시하고 있는 연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숙…… 부님이라.’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정우 때부터 연우에 이르기까지, 아테나는 처음부터 줄곧 두 쌍둥이 형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그냥 끌렸었다.

차정우가 처음 탑에 입장해서 한창 고생을 하고 있을 때. 그를 발견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올포원이 갑자기 시스템의 속박을 무시하고 튜토리얼에 강제 강림을 시도했다는 것을 감지하고, 원인을 파악하러 갔다가 차정우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올포원이 움직인 이유가 크로노…… 아니, 조부님이었다니.’

처음에 차정우를 보았던 것은 ‘재미있어서’였다.

그리고 ‘응원하고 싶어서’였다.

어느 정도 기초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탑에 입장하는 다른 노비스들과 다르게, 차정우는 책만 읽다 왔는지 마법에 관해서 전혀 문외한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약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차정우는 모진 고생을 겪으면서 차례로 단계를 극복해 나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우면서도 돕고 싶던지.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빠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차정우가 동료들과 여러 군주들에게 당해 쓰러진 뒤, 연우가 탑에 들어왔을 때에도 저절로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차정우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를 하고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보이면서 차례로 탑을 밟아 나가고, 원수들을 처치해 나가는 모습이…… 그녀에게는 가슴 속에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두 형제의 역정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함께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여러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유독 그들에게만 신경이 쓰였던 건, 피의 이끌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테나는 문득 어떤 생각에 미치다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털고 머리를 비웠다.

어찌 되었던 간에.

이제 연우는 자신이 보호해 줘야만 하던 피보호자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는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그렇다면 막내 숙부에게 어느 정도 어리광을 부리는 건……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내 장녀로서 살아왔던 그녀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연우를 바라보는 아테나의 눈썹이 곡선으로 휘어졌다.

속을 짐작하기 힘든 눈빛이었다.

* * *

“말만 잘 듣는다면 사도직을 풀어 주지.”

연우는 오래지 않아 아레스와 헤라클레스의 벌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게이트를 건너기 직전에 그들에게 당근을 던져 주었다. 당연히 죽은 명태 눈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은 저절로 연우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

“나도……!”

“어디까지나 말을 잘 들었을 때 이야기다. 여태 한 것처럼 사고 치고 다니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연우는 무슨 말을 하려는 두 조카의 말허리를 도중에 끊어 버리고,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아레스와 헤라클레스의 두 눈은 어느새 부리부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하하! 이 아레스에게 맡겨만 주십시오, 막내 삼촌! 제가 또 이런 일은 전문이잖습니까!”

“제가 누굽니까? 네메아 사자의 머리통도 한 손으로 꺾었던 헤라클레스입니다. 힘을 쓰는 거라면 제게 맡겨 주십쇼!”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는 의기양양하게 제 가슴팍을 두들기면서 호언장담을 해 댔다.

연우는 대신격들이 참 저렇게 단순하기도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럼 들어간다.”

에레보스로 향하는 게이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이곳은 히든 스테이지, ‘에레보스’입니다.]

[주의! 이데아의 법칙에서 떨어진 장소입니다. 초월적인 존재들의 초월적인 의지가 쉽게 미치지 않습니다. 오래 머물 시, 격에 손상이 갈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떠날 것을 권고합니다.]

‘너무 어둑어둑한데.’

에레보스는 연우가 생각했던 것과는 환경이 많이 달랐다.

마치 심연으로 가는 길목처럼 그냥 온통 어둠으로만 둘러싸인 곳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여기도 비록 잿빛이긴 해도 타르타로스처럼 하늘과 땅이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면이 마치 늪처럼 질퍽질퍽해서 조금이라도 걷지 않으면 금세 발목까지 잠긴다는 것?

무엇보다.

이곳은 연우에게도 어느 정도 낯이 익었다.

‘여긴…….’

『칠흑의 늪.』

다시 검의 모습으로 돌아온 크로노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칠흑의 늪과 닮았구나.』

연우가 크로노스의 신화에서도 엿보았던 곳. 버려진 우주에서도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크로노스에게 마성을 씌웠던 장소와 엇비슷했던 것이다.

‘원래 에레보스가 이러했습니까?’

『아니. 타르타로스처럼 에레보스도 원래 올림포스가 갖고 있던 여러 영토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명계보다도 더 어둡고, 생자와 망자가 구분되지 않는 곳이라, 당시에도 나를 포함한 여러 신격들이 절대 가고 싶지 않아 하긴 했지만……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올림포스와 함께 통째로 탑으로 딸려 오면서 변한 건가? 도저히 알 수가 없군.』

‘그만큼 세월이 지났으니 환경이 변했을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격이 눌리고, 신력을 빼앗기는 건…… 좀 짜증이 나는데?』

크로노스의 말마따나, 아테나와 아레스의 표정은 영 좋질 않았다.

무언가에 단단히 구속된 듯한 모습. 에레보스의 환경이 주는 구속력이 영혼에 막대한 무리를 주는 게 분명했다.

‘신격을 거부하는 스테이지라니. 이런 것이 성립할 수나 있나?’

물론, 갖가지 이적이 발생하는 탑의 세계이니만큼, 그런 곳이 하나쯤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지만.

“엿 같은데, 이거. 둘이서 왜 그렇게 에레보스라고 하면 학을 뗐었는지 알겠어.”

헤라클레스도 연우처럼 난생처음 에레보스에 발을 들인 것이기에 표정이 좋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는 아테나와 아레스처럼 완연히 신격으로 각성한 것이 아니어서 받는 압박이 덜하다는 점이었다.

“일단…… 길을 안내해야 하니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레스는 타르타로스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같이 도망쳤던 혈육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고, 이제 되돌아간다. 당연히 마음이 그만큼 무겁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찰박, 찰박!

그렇게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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