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598화 (598/862)

22화. 에레보스 (5)

『포세이돈…….』

비그리드에서 크로노스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로서는 헤스티아에 이어서 수만 년에 아들까지 만나게 되었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할 수밖에.

하지만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잠잠했다.

한편.

“너……!”

포세이돈은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조카들을 노려보다가, 뒤늦게 연우를 발견하고 인상을 더 크게 일그러뜨렸다.

그는 여태 연우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그 때문인지, 그의 시선은 너무 강렬했다.

“오랜만입니다.”

연우는 살짝 목례를 하면서 간단하게나마 예를 갖췄고.

“필멸자 나부랭이가 또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포세이돈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를 노려보면서 버럭 화를 냈다. 강한 노호성과 함께 방출된 신력이 공간을 잘게 울렸다.

하지만.

‘이렇게 작았나?’

연우는 그 전에 너무 크게만 느껴지던 포세이돈이 어쩐지 지금은 너무 작고 초라한, 볼품없는 노인네로만 비쳤다.

단순히 연우가 그만큼 강해져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포세이돈의 신격이 현저히 줄어 있었다.

주신격은커녕 더 이상 대신격이라고도 할 수 없는 크기.

아니, 그마저도 언제 필멸자로 영락할지 모를 만큼 너무 급격하게 쪼그라져 있었다.

그래도 포세이돈은 사나운 성격은 그대로였던지, 아니, 외려 그 때보다 더 날카로워졌는지 연우를 쳐다보는 눈길이 그리 좋질 않았다.

-지금은 하데스의 후왕으로서 대우를 해 주겠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는 어림없을 것이다.

연우가 대지모신에게 쫓기던 중에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포세이돈은 필멸자가 칠흑의 힘을 지니는 것을 경계할지언정,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아마도 영혼이 급격한 쇠락을 겪으면서 자존심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자격지심.

그런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는지.

“묻지 않느냐! 네놈이 왜 여길……!”

그래서 연우는 더 이상 포세이돈을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크로노스는 내심 자식들이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모양새였지만, 지난날에 그가 저지른 죄가 있으니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질 못하고 있었다.

연우 역시 헤스티아 때와 마찬가지로 형제애가 있을 턱이 없으므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포세이돈은 거기서 자격지심이 폭발하고 말았는지,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을 지나치려는 연우의 어깨를 강제로 붙잡으려 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부족하다면 어깨가 그냥 으스러질 수도 있는 악력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연우가 그 팔을 막기도 전에.

차앙!

이번에는 아테나가 어느새 나타나 포세이돈의 손길을 옆으로 쳐 냈다.

“이제 그만하세요, 백부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백부님의 감정적 쓰레기통이 아니니까요.”

“뭐?”

삼지창을 쥐고 있던 포세이돈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들이 끝까지 나를 무시하려는 드는구나!”

그는 당장이라도 삼지창으로 아테나를 찌를 듯이 굴었지만, 아테나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더 강하게 다가가 그를 압박했다. 워낙에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 빚어내는 신경전은 아폴론과 헤라클레스 등이 빚어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무력 충돌도 불사할 것 같았다.

그때, 연우는 헤르메스가 있는 방을 찾아 복도로 들어서려 했고.

“멈추래도!”

아폴론은 더 이상 연우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여겼는지, 황금색 태양광(太陽光)을 길게 쭉 뽑아 화살을 날리려 했다.

아레스와 헤라클레스가 즉각 움직였다. 아레스가 검으로 화살을 빠르게 쳐 내는 사이, 헤라클레스가 그 큰 덩치를 앞세우면서 아폴론을 압박하려 든 것이다.

쿠쿠쿵!

신전이 잘게 떨리는 가운데.

연우는 그냥 무시하고 복도로 들어섰다.

제일 안쪽.

헤르메스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 * *

『…… 개판이로구나.』

크로노스는 한참 뒤에야 그런 말을 꺼냈다.

위기에 단합을 하지는 못할망정, 저들끼리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후손들이 너무 갑갑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몰락하고 만 올림포스의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겠지.

하지만 연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크로노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씁쓸한 어조로 물었다.

『헤르메스라는 아이, 너에게 중요한 존재인가 보지?』

“제게는 아테나만큼 큰 은인입니다.”

『너는 아주 오래전부터 올림포스와 이미 인연을 맺고 있었구나.』

“어쩌다 보니.”

『어쩌면 그것도 다 인연의 굴레 속에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때, 연우의 걸음이 어느 방 앞에서 멈췄다.

안쪽에서부터 익숙한 기질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들어간다는 말도 없이, 따로 허락도 구하지 않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헤르메스는 침상에 곤히 누워 있었다.

마치 깊은 잠이 든 사람처럼.

-사실 저희 중에 가장 많은 신력을 사용하고, 격을 상실한 건…… 헤르메스에요.

아테나는 에레보스로 오던 길에 헤르메스가 어째서 가장 크게 영락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대지모신의 추격을 피해서, 저희 모두를 옮기기 위해 억지로 에레보스를 여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받아야만 했었거든요.

-그래서 면역력이 떨어진 사이에 갖가지 괴질에 노출되고 말았고…… 그 결과가 지금이에요.

-그전에는 간간이 의식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고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눈을 떴을 때는 항상 걱정이 많았었고, 숙…… 부님이 언젠가 타르타로스에 다시 돌아와서 우리를 구해 줄 거라, 그렇게 항상 믿었어요.

-아버지보다도, 숙부님을 더 믿었던 거죠.

연우는 아테나가 했던 말 중 가장 마지막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인 제우스보다도 자신을 더 믿었다고?

대체 왜?

하지만 입발림 말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테나는 분명히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헤르메스는 자신에게서 대체 무엇을 봤던 걸까.

처음 올림포스의 보고에서 봤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우는 그의 믿음이 항상 미안했고, 고마웠다.

그래서 지금 의식 없이 누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저절로 꾹 눌리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주선석의 성질은 수용이라 하셨지요?”

『그렇다만?』

크로노스는 의문 어린 대답을 던지다, 살짝 놀라는 음색이 되었다.

『너, 설마?』

“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야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나는 뭐라고 말을 하기는 힘들구나. 사실상 나는 루시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들어 본 적이 없던 터라.』

루시엘에 대해서 처음 들어?

천계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존재라면, 그만큼 예전부터 유명한 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그리고 아마도 이런 분야에 있어서는 네가 나보다 더 지식이 뛰어날 거다. 이 아비는 그렇게 공부를 좋아하질 않았거든.』

“제가 책을 싫어하는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었나 봅니다.”

『영웅은 원래 공부 따윈 하지 않는 법이지.』

연우는 크로노스의 뻔뻔한 대답을 들으면서 그림자에서 순결의 돌을 뽑았다.

지이잉!

순결의 돌이 격하게 떨렸다.

『그것참, 거칠게도 반응하는군.』

연우는 자신이 직접 손을 댈 수 없으니, 그림자를 이용해 순결의 돌을 헤르메스의 가슴팍에 얹어 두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림자를 통해 순결의 돌과 헤르메스의 영혼을 연결시키고자 했다.

연우가 시도하려는 건 아주 간단했다.

주선석의 특징은 수용과 정화. 이것을 이용해 헤르메스를 괴롭 히고 있는 에레보스의 기운을 순결의 돌로 흡수, 그리고 가능하다면 정화까지 시켜 헤르메스의 격을 복원시킨다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영혼석을 다룬다는 건 그만큼 복잡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헤르메스의 영혼에 직접 손을 대는 것도 아주 어려울 테니까.

아무리 영락을 했어도 신격은 신격. 그 완고한 정신 체계를 뚫고 영혼에 다다르는 건, 보통 주신격들도 잘 하지 않는 짓이었다. 의식 세계에 들어갔다가 자칫 휘말리게 되면 어찌할 텐가.

그 뒤에 순결의 돌과 연결하는 작업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에레보스의 기운뿐만 아니라, 다른 신력까지 몽땅 빨릴 수도 있으니.

그렇기에.

헤르메스를 어루만지는 연우의 그림자는 아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성공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고자, 또 다른 시도를 함께했다.

『헤르메스. 여태 날 기다렸다면.』

헤르메스의 무의식에 닿을 수 있도록, 진언(眞言)으로 속삭였다.

『이번에도 날 믿고 따라 와줬으면 좋겠어.』

화아악! 연우를 따라 검고 붉은 광채가 떠오르면서, 하늘 날개가 등가죽을 뚫고 나타났다.

* * *

연우가 모든 작업을 끝마치고 돌아왔을 때.

포세이돈과 아폴론은 아테나 등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채로 있었다.

특히 아폴론은 이미 타르타로스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들었던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형제들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의심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숙였다.

“오해해서 미안하오. 그리고…… 감사드리오.”

아폴론의 태도는 예의가 발랐다.

“숙부님.”

“…….”

연우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아테나 등을 보았다.

아테나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사실이라, 숨기지 않고 전부 말씀드렸어요.”

연우의 정체에 대해서도 이미 말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아폴론이 이렇게 깍듯이 나오는 것이겠지.

하지만 포세이돈은 다를 거란 생각에 그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를 조롱하러 온 것이로군.”

포세이돈이 흉흉한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전처럼 달려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쪽 입술이 크게 비틀리고 있었다.

“네놈이 타르타로스를 구해 냈다고?”

“대지모신도 없앴습니다만.”

“그리고 크로노스의 아들이라지?”

“당신의 동생이란 뜻이지요.”

“닥쳐라! 난 그딴 작자를 아비로 둔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너 같은 버러지를 아우로 두지도 않았다!”

포세이돈은 연우의 곁에 크로노스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비난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곳에서 썩 꺼져라! 우리는 네놈에게 도와 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고, 네놈의 도움을 받을 생각도 없으니까! 올림포스는 우리의 손으로, 아니, 내 손으로 되찾을 것이다. 네놈에게 할당된 유산까지 막지는 않을 테니, 타르타로스로 만족하고 부외자는 사라져!”

물론, 지금의 포세이돈이 올림포스를 차지할 방법 따윈 없었다. 이대로 천계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연우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워 댔다. 아폴론이 옆에서 안타까워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포세이돈은 자신의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는 모른다.

그동안 그가 어떤 내적 갈등을 겪었고, 그로 인해 어떻게 심적 변화가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뭔가 착각하고 있으신가 봅니다.”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포세이돈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두가 놀란 얼굴이 되고 말았다.

헤르메스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전히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래도 풍기는 기도가 강렬했다.

병증이 치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격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뜻.

연우가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그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만큼은 확실했다.

헤르메스에게서도 그들과 비슷한 기질이 느껴진다는 것.

“그분은 부외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백부님은 더 이상 저희를 대표하고 계시지도 못하고요.”

헤르메스는 차가웠다. 더 이상 포세이돈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결국 포세이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고.

“착각하고 있나 본데, 전 당신들을 도울 생각 따윈 추호도 없습니다만.”

다시 연우가 입을 열었을 때, 포세이돈의 시선이 다시 그쪽으로 돌아갔다.

“무슨……!”

“호구도 아니고, 돕긴 왜 돕습니까?”

연우는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냥 차지하면 될 것을.”

“……!”

포세이돈이 놀란 눈이 되어 나서려는 순간.

연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레스, 헤라클레스, 아테나, 헤르메스!”

“하명하십시오.”

“하명하십시오.”

“하명하십시오.”

“하명하십시오.”

네 신이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왕을 향한 신하의 예.

“지금부터 에레보스를 내 성역으로 삼고, 올림포스를 내 권역으로 둘 것이다. 기존의 세 주신 중 포세이돈을 자리에서 폐하고, 제우스를 대신격으로 격하한다. 더불어 크로노스 이후로 세 개로 나뉘었던 옥좌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여 신왕좌(神王座)로 삼을 것이니, 그리 알라.”

“……!”

“……!”

“……!”

“……!”

제우스의 자식들이기도 한 그들로서는 아버지를 배반하라는 말에 흠칫 놀라고 말았지만.

여기에 대해 항의하지 않고, 더더욱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우스가 천마증으로 깊은 잠에 든 이후로, 올림포스는 계속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까.

그들로서도 더 이상 그런 상황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연우는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포세이돈을 차갑게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제압하고, 신속히 이곳의 신전을 장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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