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에레보스 (6)
[히든 스테이지, ‘에레보스’를 성역으로 삼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정말로…….”
“정말 에레보스를 성역으로 삼을 줄이야.”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일개 필멸자가?”
에레보스에 있던 신들의 망막에 맺힌 메시지는 그동안 그들을 괴롭히던 골칫거리가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가 사라졌을 무렵에는 그 들의 영육(靈肉)을 함께 괴롭히고 있던 모든 압박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에레보스’가 당신의 존재를 수용합니다.]
[‘에레보스’가 당신의 존재를 수용합니다.]
……
[‘에레보스’가 플레이어 ###의 권속들을 완전히 수용합니다!]
마치 천계에 있을 때처럼.
소실되었던 격도 어느 정도 되돌아오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신력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도 느껴졌다.
그렇기에.
올림포스 신들은 더더욱 두려움에 찬 눈길로 연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신력이 허락된 건, 어디까지나 이곳의 주인인 연우가 자신들의 거주를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허락이 사라져 버린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에레보스에 처음 갇혔을 때보다도 더한 저주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말겠지.
그들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에 목에 사슬이 채워졌다는 걸.
‘권속’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 증거였다.
연우가 신전을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후.
헤르메스 등은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올림포스 신들을 설득하거나 제압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올림포스를 다스리던 12대신 외에도, 그들을 따라 함께 온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제압된 이들은 헤르메스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적잖게 놀라면서도, 그 주인이 필멸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무리 연우가 하데스의 후왕으로 내정된 자라고는 하나, 어떻게 신격이 되어 필멸자의 밑에 들어갈 수 있냐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아레스와 아테나의 증언에 따라, 연우가 티폰과 페르세포네를 물리치는 것은 물론, 대지모신까지 봉신시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자신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증언을 한 아레스와 아테나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물며 그가 사라진 크로노스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에는 모두가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특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메테르나 헤라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심적 동요는 심했던지, 둘 모두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포세이돈은 언제부턴가 아무 말도 없이 연우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역정도 내지 않고, 화도 내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연우 역시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 알 바가 아니었다.
크로노스로서는 그것이 여전히 씁쓸하기만 했지만.
그러다.
차차착!
잘게 부서진 비그리드가 재조립되어 크로노스가 되었을 때.
『다들 오랜만이구나. 처음 보는 얼굴들도 더러 있고.』
“…….”
“…….”
올림포스 신들 사이에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크로노스의 폭정을 기억하는 이들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그의 영광을 기억하던 이들은 반색했다. 물론, 크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크로노스를 권좌에서 끄집어 내렸던 포세이돈이 바로 이곳에 있었으니까.
비록 격을 상당수 유실했다고는 하나, 그가 올림포스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지대했다.
데메테르와 헤라도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고 쭈뼛대고 있을 무렵.
크로노스는 포세이돈의 차갑기만 한 시선을 보더니.
털썩.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지난 일들은.』
연우는 그것을 더 이상 볼 용기가 없어 잠시 자리를 피했다. 다른 신들도 똑같이 물러서서 크로노스와 포세이돈 등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 *
크로노스가 되돌아온 건 시간이 제법 흐른 뒤였다.
“좀 괜찮으십니까?”
『그래 보이냐?』
“아뇨.”
『지난 세월 동안 가슴에 겹겹이 쌓인 것이, 하루아침에 풀린다면 어디 한이라 할 수 있을까.』
크로노스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지난날의 잘못들이 가이아의 저주와 마성이 뒤섞이면서 정신이 오염된 탓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결국 잘못을 저지른 건 자신이었다. 어떤 핑계도 용납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몇 번씩이고 계속 찾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용서를 구할 거고.』
“그래도 저들이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는다면요?”
『그래도 가야지.』
“…….”
『그게 내 일이니까.』
크로노스의 옅은 미소가 살짝 짙어졌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해야 자식들의 얼굴을 볼 수도 있을 테고. 너에게는 미안하기만 할 뿐이다.』
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나 자식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양반이, 모순적이게도 자식들에게 여태 미움을 받고 있다니.
그 역시 한때 아버지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던 입장이었기에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타르타로스로 가는 게이트를 열었습니다.”
아테나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연우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아테나가 말없이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테나는 잠깐 그를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겉보기엔 말처럼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연우는 그녀의 뺨이 살짝 쀼루퉁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섭섭한 것이겠지.
‘하긴. 헤르메스도 사도로 삼았으니.’
연우는 헤르메스를 치료할 때, 그와 사도 계약을 맺었었다.
신은 자신의 사도에 관한 한 생사여탈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바. 당연히 그 안에는 영혼에 대한 것도 있었기 때문에 병마를 치료하는 데 있어서는 필수 요소였다.
다만, 이는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헤르메스로서는 거부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연우는 자신을 믿어 달라고 간청했고, 헤르메스는 의식이 거의 없는 와중에도 사도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그가 맘껏 치료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신은 필요에 따라 사도에게 일정한 권능을 나눠 주는 것도 가능해서, 연우는 채널링을 통해 헤르메스가 기력을 되찾고 빨리 일어설 수 있도록 마력까지 나눠 주었다.
덕분에 헤르메스는 신력만 따지자면 현재 아레스나 헤라클레스보다도 서열이 앞서 버린 상태. 당연히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항의를 보내고 있었다.
언제는 사도직으로 소처럼 코가 꿰이게 생겼다며 투덜거리더니, 정작 서열이 밀리게 되니 아쉬운 모양이었다.
여하튼 상황이 이런 판국에, 아테나로서는 혼자서만 사도직에서 쏙 빠졌다는 사실이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연우로서는 그다지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이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의 불찰인 셈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으면서, 아테나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게이트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이러다 등이 뚫어질 것 같은데.’
아테나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도끼눈으로 연우를 한참이나 째려보다가, 조용히 뒤따라 움직였다.
* * *
연우는 올림포스 신들을 모두 데리고, 도로 타르타로스로 되돌아왔다.
“아……!”
“타르타로스의 하늘이 이렇게나 반가울 줄이야.”
“대지모신을 쓰러뜨린 게 정말 사실인가 보오. 그 미친년의 신력이 전혀 느껴지질 않아.”
“그보다 여기 왜 이리도 초월자들이 많은 거지?”
“저건 천교의 나타태자와 이랑진군이 아닌가!”
“니플헤임의 마랑(魔狼)과 르 인페르날의 동부 대공까지……!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올림포스 신들은 타르타로스 곳곳에서 감지되는 기운에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천계에서도 내로라하는 존재들이 멀뚱히 서서 자신들을 보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이번에는 포세이돈도 적잖게 놀란 눈빛이었다.
그들 모두 각 사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서열을 지닌 자들. 자존심도 아주 강해서 웬만한 존재가 아니면 인정도 하지 않는다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연우를 동등하게 대우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노라니, 그제야 연우가 대지모신을 거꾸러뜨렸다는 게 실감이 났던 것이다.
아니, 이건 따지자면 어쩌면 연우를 그들 자신보다 위라고 여긴 것일 수도 있었다. 사회와 동맹을 맺은 건, 연우라는 개인이었으니.
개인이 사회와 동맹을 맺은 경우는…… 천계 내에서도 좀처럼 찾기 드문 경우였다.
하물며 연우를 따르는 권속들에 디스 플루토 외에도 용종이나 사멸했다고 알려진 거인족들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저 연속된 충격에 할 말을 잃을 뿐.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올림포스 신들은 냉정하게 현실을 자각하고 나서부터는 조금씩 고무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말 올림포스를 완전히 탈환할 뿐만 아니라, 신왕좌를 새로이 만들어 낼 수도.”
“필멸자의 몸으로도 저럴진대, 앞으로 초월까지 이뤄 낸다면 ‘황’도 노릴 수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가 툭 던진 말은 단숨에 해일이 되어 올림포스 신들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크로노스의 몰락 이후, 올림포스 신들은 그동안 쇠락의 길을 걸어 왔고, 결국 티탄-기가스에게 올림포스를 빼앗기는 수모까지 겪고 말았다. 제왕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야 할 제우스는 여전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수장으로서의 자격도 부족했다.
그런 판국에 새로운 지도자로 연우가 낙점이 되어도 전혀 나쁠 것은 없었다.
필멸자라고는 하지만 이미 천계의 존재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고, 혈통 또한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전혀 문제가 없었다.
결국 여론이 조금씩 연우에게 호의적으로 바뀌는 가운데.
화아아!
[98층, ‘천계’로의 계단이 열렸습니다!]
잿빛 하늘에서부터 명왕의 신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내려와 연결되었다.
올림포스 신들의 얼굴이 조금씩 상기되었다. 드디어 그토록 고대했던 순간이 찾아왔으니. 고향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아테나.”
연우는 그곳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테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테나는 다른 올림포스 신들과 함께 감격에 젖은 눈으로 빛의 기둥을 보다가, 그의 부름에 고개를 숙였다.
“예. 숙부님.”
“받아.”
“……?”
아테나는 연우가 무심하게 던진 것을 받았다가 크게 눈을 뜨고 말았다.
손에 잡힌 것은 흑요석을 깎아 만든 검이었다.
퀴네에와 함께 명왕 하데스를 상징하던 대신물.
“이것을 왜 제게……?”
“오늘부터 디스 플루토의 지휘관은 너다.”
“……!”
“넌 군신(軍神)이기도 하니, 이들을 훨씬 유용하게 부릴 수 있겠지. 하데스의 밑에 있을 때보다 더 강화된 무구로 무장시키고, 군율도 더 엄해졌으니 천계에서도 맹활약을 할 수 있을 거야.”
아테나는 그제야 연우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올림포스는 아직까지 상당수의 기가스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 그들을 모두 몰아내려면 한바탕 큰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 연우는 현재 시스템의 제약상 98층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을 대신해 디스 플루토를 천계로 보내고, 그에 대한 권한을 아테나에게 위임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임시이긴 해도, 디스 플루토의 주인은 아테나가 되는 것이니. 천계로의 이동도 비교적 자유로워질 터.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것은 아테나에게 힘과 권위를 실어 주는 것이기도 했다.
향후 올림포스의 신왕좌에 앉을 것은 연우일지언정, 그것을 다스리는 주신의 자리에는 아테나를 앉히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다.
군신이면서도 지혜와 문명이라는 신위를 두고 있는 그녀라면.
분열된 올림포스를 통합하고, 누구보다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테지.
[플레이어 ###이 무소속의 신, ‘아테나’에게 사도직을 제안합니다!]
[플레이어 ###가 ‘아테나’에게 약속한 사도직은 ‘수석 사도(首席使徒)’입니다.]
[수석 사도는 신도들을 이끄는 여러 사도들 중에서도 우두머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며 그의 눈을 대신하고,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리입니다.]
[제안을 승낙하시겠습니까?]
“받겠나?”
아테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연우의 채근에 무언가를 결심하고 재차 부복했다.
머리를 조아리는 동안, 여태 흐리기만 하던 그녀의 신력이 다시 날카로운 창과 단단한 방패처럼 다져졌다.
“신의 말씀을, 따르겠나이다.”
“적군에겐 죽음을, 아군에겐 투쟁을!”
발데비히가 외친 우렁찬 외침에 따라, 권속들이 일제히 땅에다 발을 구르면서 무기를 하늘 높이 들었다.
함성이 터졌다.
쿵!
적군에겐 죽음을!
쿵!
아군에겐 투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