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에레보스 (7)
아테나 등이 빛의 기둥에 들어 가기 전.
『도와주랴?』
아가레스가 사이하게 눈을 빛냈다. 동부의 악마 대공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붉은 혀로 입술까지 축이고 있었다.
『아무리 대지모신이 꺾이고, 수장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다고 하지만 올림포스 탈환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게 아닌가? 도와 달라고 소원을 빌어 보아라. 그리한다면 행운이 따를지 누가 알 텐가?』
아테나는 아가레스의 말을 듣고 인상만 찌푸릴 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홱 하고 지나쳤다.
악마의 속삭임은 달콤하나, 그 속에 숨은 독은 절대 놓쳐서 안 된다. 특히 그것이 계약자에 광기를 불어넣고, 끝끝내 파멸로 이끄는 자의 말이라면 더더욱.
아가레스가 저런 식으로 계약자를 유혹하고 끝끝내 영혼마저 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아테나는 지금 아가레스가 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채널링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앉게 된 ‘수석 사도’라는 자리에 걸린 채널링이 탐나는 것이겠지.
“다녀오겠습니다.”
아테나는 연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자신을 따르는 올림포스 신들과 명계의 군사들을 이끈 채.
파앗!
천계로 향하는 빛의 기둥에 몸을 실었다.
* * *
[‘수석 사도’에 빙의를 시도합니다!]
연우는 가만히 눈을 감으면서 아테나에게로 연결되는 채널링에 집중했다.
자유 의지를 빼앗는 강신이 아닌, 빙의는 단순히 사도의 시선만 공유하는 것. 그는 이곳에서 아테나 등이 올림포스를 탈환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필요할 때에 지원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테나는 연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드디어 고향인 천계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에 잔뜩 고무된 것인지, 무조건 자신의 손으로 승리를 이끌어 연우에게 가져다 바치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98층, 천계의 관입니다.]
빛이 사라진 자리.
아테나의 발아래로 온갖 대리석으로 세워진 신전들이 즐비한 올림포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그들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었던 건지, 신전과 성곽을 따라 배치된 기가스들은 무장을 한 채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공포가 잔뜩 어려 있었다.
저들에게는 하늘을 따라 뚫린 수백 개의 구멍에서 침략자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겠지.
[당신은 지금 신의 사회, ‘올림포스’의 성역을 무단 침입 중입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정체불명의 침입자들을 감지하였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침입자를 물리치기 위해 방호 체계를 작동시켰습니다.]
[‘올림포스’가 다른 연합군에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연합군, ‘아스가르드’가 지원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
[동맹군과 연합군의 새로운 전투가 발발하였습니다.]
[탈환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아테나는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고작 저런 놈들에게 당했던 거였나? 이렇게 보니 너무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연우가 나눠 준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체내를 휘감는 막강한 마력.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신력. 이것만 해도 이미 그녀는 에레보스에서 상실한 격을 메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차였다.
그래서 아테나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움직였다.
왼손에 쥐고 있던 아이기스를 흩뿌리면서 이곳으로 쏟아지는 갖가지 권능 세례들을 막아 내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에다 마력과 신력을 함께 집중시켰다. 연우가 승리를 가져다 달라며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부월(斧鉞, 출정하던 지휘관에게 임금이 내어 주던 상징물)이 맑은 소리를 냈다.
쩌어엉!
아테나는 그것을 냅다 아래로 휘둘렀다. 연우의 사도가 되고 나면 기본적으로 터득하게 되는 권능, 검뢰(劍).
비록 아직 숙련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많은 마력과 신력을 집중시켰기 때문인지 검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막강한 열과 빛을 뿜어냈다.
쿠르르릉!
그들이 통과했던 것보다 훨씬 강렬한 검붉은 기둥이 올림포스의 중앙에 내리꽂혔다.
상공을 뒤덮다시피 하던 방어막과 수호 결계들이 줄줄이 깨져 나가고, 다른 방비 시스템들 역시 근처까지 오지도 못하고 모조리 분쇄되고 말았다.
아테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을 잇달아 휘둘러 댔다. 그럴 때마다 검뢰가 마구잡이로 작렬하면서 올림포스를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아앙!
『아테나, 이 미친년이! 이대로 성역을 죄다 부숴 버릴 참인가!』
『구, 군사들을 뭘 하는 거냐! 저것들을 어서 막지 않고!』
『저 수상한! 수상한 벼락부터 어떻게 처치하…… 크아악!』
『막아라! 막으란 말이다, 어떻게든!』
아테나는 올림포스가 파괴되는 건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겠다는 듯, 마력과 신력이 바닥날 때까지 연거푸 검뢰를 쏟아 냈다.
도시가 부서질 것을 염려해 시가전을 피하고 몸을 사려서는 결국 올림포스를 장악하는 데 더 긴 시간과 큰 피해만 부를 뿐이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아테나의 작전은 유효해 기가스들은 단숨에 혼란에 잠기고 말았다.
지휘관들이 아무리 창을 들고 마법을 뿌리라고 명령한다고 한들, 이미 병사들은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상태였다. 저들 사이로 공포가 퍼져 나갔다. 무기를 버리고 탈영을 시도하는 자들까지 속출할 정도였다.
디스 플루토는 바로 그 순간 투입되었다.
제아무리 많은 폭격을 가한다고 한들, 결국 승기를 꼽는 건 어디까지나 육군이 할 일이었으니.
더구나 현 디스 플루토는 수많은 사투를 벌이고, 그만큼 많은 승리를 일궈 왔던 정예병들.
단연코 지난 몇백 년 사이에 그들만큼 많은 사선을 건너온 존재들은 아무도 없었다. 기가스도 그들 앞에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격밖에 되지 않을 뿐이었다.
“음. 이래서는 공을 아테나에게 죄다 뺏기겠는걸? 질 수 없지.”
“으하하! 나, 전신 아레스가 어째서 학살자라는 칭호를 얻었었는지를 보여 주마!”
헤라클레스와 아레스는 이에 뒤질세라, 디스 플루토를 뒤따라 전장에 난입했다. 그들은 주로 지휘관급 인사들을 사냥하면서 기가스의 의지를 꺾어 놓고자 했다. 쾅, 쾅, 곳곳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헤르메스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형제들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손을 높이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지면이 흔들리면서 보아뱀이 잇달아 튀어나와 기가스들을 하나둘씩 낚아챘다.
사실 그로서도 공을 놓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사도들이 압도적인 활약을 보이자.
“……우리도 질 수 없지 않은가.”
“올림포스를, 놈들의 손에서 되찾자!”
아폴론을 비롯해 연우에게 강제로 종속되다시피 했던 신들도, 전의가 잔뜩 끓어오른 채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
포세이돈만이 전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 * *
“이, 이곳을 침범하게 해서는 안…… 크아악!”
아테나가 폭격을 끝내고 난 뒤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가장 먼저 장악하고자 한 곳은 올림포스의 중심지, ‘옴팔로스’였다.
원래는 제우스의 성역이었지만, 지금은 기가스의 터전으로 사용되던 곳.
이곳을 차지해야만 올림포스를 온전히 연우의 성역으로 설정할 수가 있었다.
[‘올림포스’가 연합군에게 구원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습니다!]
[‘올림포스’가 연합군에게 구원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습니다!]
[연합군, ‘아스가르드’가 ‘올림포스’의 구원 요청을 묵살합니다.]
……
[연합군, ‘아스가르드’가 동맹 결렬 선언을 하였습니다.]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 간의 동맹이 파기되었습니다!]
……
[‘올림포스’가 다른 신의 사회에 협조를 요청합니다!]
[중립, ‘데바’가 침묵합니다.]
[중립, ‘절교’가 침묵합니다.]
……
[신의 사회, ‘말라흐’가 성명을 발표합니다. “우리는 플레이어 ###의 모든 활동에 지지 의사를 밝히는 바이며, 그가 구축한 올림포스의 새로운 내각 체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승인한다. 다만, 지난날 천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전적이 있던 신왕좌 제도를 복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 재검토를 요청하며…….”]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올림포스’에 성역을 포기하고, 망명 정부를 구성하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고 의사를 밝힙니다.]
……
[‘올림포스’가 용병을 구하고자 합니다.]
[비마질다라가 호의적으로 의뢰를 검토합니다. 대신, 조건을 걸어 ‘올림포스’가 자신의 수하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올림포스’가 강력하게 반발하여 의뢰가 취소되었습니다!]
[케르눈노스가 의뢰 메시지를 거부합니다.]
……
[‘올림포스’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공포가 ‘올림포스’의 성역을 장악합니다.]
[연합군이 해체되었습니다!]
기가스는 어떻게든 아테나 등의 파상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아스가르드, 이 빌어먹을 작자들이……!』
특히 이전에는 간이고 쓸개고 전부 내줄 것처럼 굴던 아스가르드가 바로 등을 돌리자, 배신감을 느껴야만 했고.
다른 사회들이 자신들을 외면했을 때는 허탈해졌으며.
말라흐가 그들을 더 이상 사회로 취급하지 않고, 르 인페르날이 그들을 고스란히 집어삼키고자 할 때에는 더 이상 화를 낼 힘도 없어 무력감과 좌절감만 겪어야 했다.
제아무리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붙인다고 한들, 결국 천계의 사회들도 힘을 가지고 있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이었다.
하물며 여태 대지모신을 등에 업고서 젠체를 해 대던 기가스를 고깝게 여긴 이들이 더 많았으니.
해서 차라리 지금 이 상황이 잘되었다고 싶은 이들도 많았다.
물론, 연우가 지난날 기어 다니는 혼돈과의 전투에서 여러 사회들과 척을 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가스를 도와줘 봤자 별다른 이득을 볼 것도 없으니 외면을 하는 것이다.
결국 기가스는 별다른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모조리 분쇄되고 말았고.
디스 플루토가 각 요충지를 장악했다는 메시지가 아테나에게로 속속 도착했다.
『서쪽 ‘망향성루(望鄕城樓)’, 무사히 장악하였습니다.』
『동쪽, ‘오네이로이의 들판’을 탈환하였습니다. 외부 사회에서 성역을 침범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타나토스의 대지’도 방금 전에 토벌이 끝났습니다.』
『현재 13곳의 신전 성역에서 접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 중 8곳은 몇 시간 내로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수고하였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도록.』
『복명.』
『복명.』
[디스 플루토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투쟁’이 ‘올림포스’의 성역에 빗발칩니다.]
[‘죽음’이 ‘올림포스’의 성역에 만연합니다.]
[새로운 거대 신화가 쓰이는 중 입니다!]
“이곳은, 이곳만큼은 절대 내어 줄 수 없다……!”
옴팔로스.
한때, 제우스의 3형제가 나란히 앉아서 모든 우주를 다스렸던 왕의 홀에서.
죽은 티폰과 페르세포네를 대신해 기가스를 통치하던 아이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에워싼 아테나와 사도들, 그리고 디스 플루토를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자신이 앉은 옥좌를 지키겠다며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이미 눈 속에 자리 잡은 공포만큼은 절대 지울 수가 없었다.
“저 빌어먹을 놈은 내가……!”
“아레스, 기다려.”
“왜?”
아이트에게 한번 당한 전적이 있던 아레스는 자신을 붙잡는 아테나를 홱 하고 돌아봤다.
아테나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옆에 있던 헤라클레스에게 넘기면서 앞으로 나섰다.
“오늘은 수만 년 만에 신왕좌가 다시 이 땅 위에 탄생하는 영광스러운 날이야. 이곳은 그런 뜻깊은 대관식이 열릴 장소이고. 그런 날, 이런 신성한 장소에서 피를 볼 수는 없잖아?”
“……그도 그렇군.”
아레스는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테나는 그를 지나쳐 세 옥좌에 다가갔다.
아이트는 흔들리는 눈길로 아테나를 올려다보았다.
“뭘 어떻게 하려는……!”
“어떻게 하긴.”
아테나가 차갑게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벌레는 치워야지.”
아테나는 손끝에서 검뢰를 크게 일으키면서 아이트가 뿌려 댄 갖가지 신력이나 권능을 모조리 찢어 버렸다. 그리고 녀석의 면상을 잡아 그대로 우그러뜨렸다.
콰드득!
마치 깡통이 찌그러지듯, 아이트의 머리통이 그대로 엉덩이 부근까지 짓눌려 처참하게 뭉개졌다.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부서진 살점이나 뼛조각이 튀었지만, 검뢰에 모조리 태워져 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아테나는 손을 횡대로 휘둘러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옥좌 중 두 개를 날려 버렸다.
어차피 이곳에 앉을 분은 새로운 신왕, 그밖에 없을 테니. 다른 옥좌들은 둘 필요가 없었다.
[탈환전을 승리하였습니다!]
[대성역, ‘옴팔로스’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새로운 주신을 맞이하였습니다!]